[스카이데일리] 권영해 “5·18 北 개입 안기부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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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6-22 00:21 조회7,5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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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실 찾기㉟] YS정부 안기부장 충격적 폭로
[단독] 권영해 “5·18 北 개입 안기부서 확인”
입력 2024-06-20 20:00:01 국가안전기획부(現 국가정보원)가 북한의 5·18 광주사태 개입을 1990년대에 ‘비밀공작’을 통해 이미 확인한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권영해(87·權寧海·사진) 전 안기부장은 최근 스카이데일리와 만나 “정보기관장 재직 시절 북한의 5·18 개입을 우리 정부가 직접 확인했다”고 폭로했다.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에 대해 전직 정보기관장이 확인 발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93년 국방부 장관에 이어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안기부장을 지낸 권 전 부장은 지금까지 ‘북한의 5·18 개입’을 증언한 정부 최고위직 인사다.
그는 김영삼정부와 김대중정부에 걸쳐 안기부장으로 재임했다. 이 기간은 5·18이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사회적 평가가 극명하게 뒤바뀔 무렵이었고, 김영삼정부가 증거를 조작하는 과정에 정보기관장으로서 권 전 부장도 가담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
이 때문에 이번 인터뷰는 그에겐 최초의 양심선언으로 평가된다.
그동안 권 전 안기부장에게 제기된 의혹과 시대적 분위기 탓에 그는 공개석상 또는 언론 인터뷰에서 5·18에 북한이 개입했는지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실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본지 인터뷰에서 현직 안기부장 재직 시절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을 우리 요원들이 직접 확인한 사실을 처음으로 실토함에 따라 향후 추가 폭로에 나설지 그의 입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권 전 안기부장은 17일 서울 모처에서 열린 정당 행사 직후 기자와 만나 “현직 (안기부장) 시절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을 비밀공작을 통해 내가 직접 확인했다”고 충격 폭로했다.
그는 당시 공작 방식과 경위에 대해선 “정보기관 고유 업무”라고 말을 아끼면서도 “북한 청진에 있는 (남파) 영웅들의 비석은 사실”이라고 구체적인 지형지물을 적시했다.
권 전 부장은 “(청진 비석의 존재가 남한에 알려지자) 위치를 바꾸고 제3의 장소로 숨겼다”면서 비석과 북한 광주 개입의 관련성에 대해 “사실이고 내가 확인한 것”이라고 거듭 부연했다. 제3의 장소는 북한 동북부는 아니다.
확인한 시점에 관해선 “내가 있을 때”라고 현직 정보기관장으로서 확인한 사실을 강조한 뒤 “북한 교과서에 나왔기 때문에 확인하려 한 것이었고 소스(source)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고 여지를 남겼다.
그러면서 “북한 교과서에 (비석의 존재가) 나와서 청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확인에 나섰다”면서 “그러나 공작이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 정보기관에서 확인했다는 말을 확인해 줄 수 없어 탈북자들이 제공한 것으로 그렇게 처리됐다”고 밝혔다.
당시 공작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임기 후반부는 국민의정부(DJ정부)와도 겹친다.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은 1998년 2월25일 취임했고 권 전 안기부장은 그해 3월까지 재직했다.
권 전 부장에 대해선 세간의 평가가 엇갈린다.
노태우의 비자금이 탄로 나면서 5·18이 국가전복 무장 폭동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하는 과정에 그가 일익을 담당했다는 의혹도 받아왔다.
중앙정보국(CIA) 등 미국 정보기관에서 40년간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조사한 마이클 이(91) 박사(미 조지 워싱턴대·정치학)에 따르면 노태우가 민정당 연수원 매각 대금을 착복한 사실을 안 김영삼은 노태우를 압박해 정치자금 3000억 원을 뜯어내고 대권 바통까지 물려받았다.
3당 합당으로 재야인사에서 보수정당인 민자당 대선 후보로 변신한 김영삼은 집권 후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노태우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들통나자, 스캔들을 물고 늘어지는 호남 세력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을 제정했다. 이 박사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협력한 대표적 인사가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과 홍준표(현 대구시장)였다”고 직격했다. <본지 2023년 11월1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 <21> “5·18이 민주화운동 된 건 정치권력 야합 탓” 보도 참조>
이런 배경 탓에 권 전 안기부장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쪽과 대체로 이해관계를 같이 한다는 그동안의 평가가 있었다. 자해 소동과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전력 등 각종 논란에 휩싸여온 인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권 전 부장이 본지 인터뷰에서 “우리 요원들이 직접 확인했다”고 한 발언은 크로스 체킹(cross checking·교차검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청진 묘비의 확인 공작에 관여한 A씨는 지난해 11월 서울 모처에서 익명을 전제로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 직원” 또는 “우리 라인”이 직접 가서 확인했다고 확인 방식을 제시한 바 있다. 삼성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했다고 장비에 대해서도 밝혔다.
구체적으로 ‘북파공작원(HID)’으로 불리는 군 첩보부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가 관여했다고 증언한 데 이어 5·18 북한 개입 정보의 최초 입수 경위는 “안기부/정보사 자료”라고 답했다.
HID가 북한 현지에서 취득한 안기부 획득 자료를 기초로 북한 현지에서 팩트 체크를 거듭한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권 전 부장의 말과 일치한다.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대북 정보는 다양하게 취득하며 북한에서 협력하는 사람을 통한 휴민트(HUMINT·인간정보) 방식도 널리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우리 요원들이 공작을 통해 확인했다”는 말은 권 전 부장이 이 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선 알거나 섣불리 밝힐 수 없는 내용이다.
작년 A씨와 인터뷰 당시 본지는 이민트(IMINT·이미지 정보)를 제시한 만큼 현지 정보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봤다. 하지만 교차 검증할 방법이 없어 ‘첩보’ 단계로 분류하고 이에 관한 보도를 유예하고 있었다.
청진 비석에 새겨진 北 남파공작 사망자 490명
1998년 2월8일 청진역 건물 북쪽 800m 떨어진 곳에 세워
534·108·806군 부대 ‘전사자’ 기록물·전투기록장 2건 존재
사망일 1980년 6월19일… 죽은 날 달라 작전 종료일로 통일
전직 안기부장의 폭로로 청진 묘비의 존재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청진 묘비 확인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만든 ‘북한과 한·미·일 정보기관의 기록물로 본 광주사태(새동아서·2020년 6월 刊)’에 따르면 김일성이 5·18에 남파한 북한 군부대 사망자는 534군부대 158명, 108군부대 112명, 806군부대 74명 등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 344명을 포함해 모두 490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중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 구역 낙양동 해발 약 70m 지점, 청진역 북쪽 약 800m 지점에는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비’가 있다. 1998년 2월8일 세워진 묘비에는 전사자 명단이 새겨 있다. 비석 왼쪽 옆에는 붉은색으로 ‘일천 구백 구십 팔년 이월 팔 일 세움’이라고 건립 날짜가 적혀 있다.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한 인민군 전사들의 전투 기록장(1980년 6월)’과 ‘남조선 통일전선을 위한 투쟁에서 전사한 조선인민군 열사자료(1980년 8월1일)’ 등 2개의 북한 문건에 기재된 명단과 묘비의 명단은 일치한다.
전투 기록장은 함경북도·함경남도·강원도에 자리한 534·108·806군부대 전사자에 관한 기록이다. 김계철 외 15명의 저자는 책 26쪽에서 534군 부대는 북한군 최정예로 1968년 김신조 1.21사태 당시 청와대를 기습한 124군 부대의 후신이라고 밝혔다.
이들 북한 문건에 따르면 조선 인민군 무력부 소속 각 군부대는 1980년 8월1일자로 전사자 명단을 만들었다. 붉은 표지 상단에 ‘당과 수령과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라는 금색 글씨가 있고 표지 중앙에 북한 국장(國章·북한을 상징하는 공식 표장)이 있다. 보위부가 이 명단을 관리한다고 책은 기술했다.
명단 작성 시기인 1980년 여름에 남녀 별개로 가묘 두 기를 만들었지만 북한 당국은 광주사태 남파를 비밀로 하기 위해 처음에는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김계철 등 저자들은 책 118쪽에서 ‘1997년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북한은 자신들이 숨긴 것이 성공했다고 판단해 1998년 묘역도 새로 단장하고 비석도 세웠다’고 해석했다.
실제 묘에는 시신은 없다. 머리털이나 소지품을 넣고 만든 가묘(假墓)다.
가묘에 이름이 적힌 전사자들의 사망 날짜는 모두 1980년 6월19일로 똑같다. 이날은 북한의 5·18 작전 종결일로 알려졌다.
신원이 확인된 344명을 비롯해 북한에서 490명이 전사한 대규모 교전 또는 전투가 1980년 6월에 있었다는 정보는 아직 없다. 이 때문에 가묘는 최초 사진이 공개된 이후부터 5·18 관련성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2012년 9월27일 탈북인 단체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묘와 비석의 정체를 밝히자 묘비를 숨기기 위해 2013·2014년에 걸쳐 철거했고 6·25 전쟁 기념물, 즉 인민군 렬사묘로 위장했다고 책은 기록했다. 청진 렬사비가 세워진 지 15년 만이다.
2014년에도 묘 단장으로 위조해 묘 두 개는 그대로 두고 비석은 모처에 옮겨 숨겼다고 한다. 이어 중앙 계단이 있는 곳에 새로운 기념비를 세우고 앞면 하단에 1950~1953년이라는 숫자를 넣어 1980년 6월 사망자들의 가묘가 별안간 6·25 전쟁 전사자의 묘지로 변했다.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 묘비’에는 전사자 명단이 있었지만 2013·2014년 새 단장을 마치고 세워진 ‘인민군 렬사 묘비’에는 명단이 없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북한 당국이 감춰야만 하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며 ‘위장의 증거’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 전사자 명단이 든 북한 문건에는 또 다른 전사자들의 명단도 발견된다.
북한 534부대 전투 기록장에는 1975년 9월11일 전북 고창에 침투해 14명이 사살됐다고 기록됐다. 당시 경찰특공대가 투입돼 교전을 벌이다 우리 경정 3명이 숨졌다. 전투 기록장은 최영남 대위 등 전사자 14명의 명단을 기재하고 있다.
1980년 6월 경기 문산 임월교 간첩 침투 사건은 강철환 소좌 등 4명이 전사한 것으로 534군부대 전투기록장은 기록했다. 정부는 무장 공비 3명을 소탕한 것으로 발표했다. 전사 일은 3월23일로 다르다. 우리 발표가 틀렸거나 북측이 훈련 중 사망자를 포함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간첩침투 사건 당시 박철 소좌 등 북한군 534부대 전사자 13명 명단도 전투 기록장에서 발견된다. 이와 별도로 승조원 12명의 명단도 있다고 책은 밝혔다. 승조원 11명은 숨진 채 발견됐고 승조원 이광수는 주민 신고로 생포됐다. 534부대원 14명 중 13명은 도주 중 사살됐고 1명은 휴전선 철책을 넘어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우리 군은 파악하고 있다. 공비 13명을 사살했다고 발표한 우리 군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북한은 이들의 전사 일을 일괄적으로 9월20일로 기록했다.
가묘 확인 공작에 관여한 A씨는 “확인 과정에서 4명이 보위부에 발각돼 숨졌다”며 “공동저자 중 맨 앞에 이름이 있는 이들이 목숨을 잃은 공로자들”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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