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역린, 국민의 역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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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5-12-22 11:40 조회1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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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역린, 국민의 역린
[항쟁본부] 사령관 등 5.18 최상의유공자들 증언: “우리는 5.21. 괴한들이 무기고 털고 군사작전 할 때 도망다녔다. 도청을 지키는 위엄 있어 보이는 높은 관료들이 사라진 다음 5.24.부터 한 사람씩 도청에 들어갔다가 5.27.에 진압당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광주에 광주인들이 만든 조직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반면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에는 조직이 있었고, 카리스마의 아우라가 뿜뿜 솟았다는 뜻입니다. 현장 사진들에는 조직화 된 무장 전투팀들이 많이 보입니다. 수많은 팀에는 모두 지휘자들이 있고, 그들에서는 전투프로의 카리스마가 뿜어납니다. 그런데 실제 광주에는 “내가 어느 팀의 지휘자였다”며 나타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들 카리스마의 아우라를 풍기는 전투프로들과 그 지휘자들은 도깨비이거나 북한 특수군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절대로 광주사람은 아닙니다. ➀ 광주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5.18 항쟁본부 사령관 및 그 참모들이 증언했고 ➁ 현장 사진들이 증명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17권 65쪽에는 5.18 주역이자 평민당 국회의원이었던 정상용의 회고가 들어있습니다. “5.18의 기동타격대 구성원은 그 80%가 17살에서 22살 사이의 청년이었고,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도시근로자, 노동자, 점원, 실직자, 구두닦이, 품팔이, 식당 종업원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며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 이 증언은 1982년 3월 15일 육군본부가 발행한 ‘계엄사‘(戒嚴史)의 분석과 일치합니다. 계엄사 134쪽에는 “극렬시위의 전위대들이 불량배, 구두닦이, 넝마주이, 공장근로자, 전과자, 무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쓰였습니다. 이와 같은 20세 전후의 양아치들이 광주 현장 사진들에 나타나 있는 무장 주역들의 모습을 연기할 수는 없습니다.
정상용의 증언은 [5.18 항쟁자료집]에서도 이어집니다. “21일 누군가가 도청을 탈환했다. 이걸 장악한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닌가?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은 따로 있고, 우리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도청으로 간 거다.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은 위엄 있는 높은 관료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인데그들이 우리에게 ‘곧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니 학생들은 나가라’고 말했다.23일에 보았던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이 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같은 책(5.18항쟁자료집)에서 박남선(상황실장, 사형선고)은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무기를 탈취한 사람들은 광주가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간 사람들이다”
[5.18항쟁자료집]에는 내무위원장 허규정의 증언도 있습니다. “일부 시민들이 도청에 들어갔다는 말이 들렸다. 나도 다시 도청에 갔다. 갔더니 시국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있었다. 높아 보이는 사람들은 안 보였다. 23일에 보았던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이 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은 오직 종교지도자들, 교수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태를 여기서 끝내고 시국을 수습하지고 했다. 나도 멋모르고 참여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내무위원장이 된 거다”
2025.12.22. 지만원
요약하면 2002.에 전남대 출판부가 발행한 [5.18 항쟁증언자료집]에서 [항쟁본부] 주역들 모두가 무력충돌 기간인 5월18일부터 23일까지 각자도생하며 숨어다니다가 5월 24일에야 비로소 한 사람씩 도청에 들어가 초면으로 만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현장 사진에 나타나 있는 무장 전투조들은 광주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초대 학생수습위원장 온건한 성향의 김창길(전남대)의 증언입니다. “윤상원, 정상용, 박효선, 윤강옥은24일 오후에야 도청에 들어왔다. . 강경파가 이끄는 항쟁지도부는 26일 아침부터 가동됐다. 김종배가 항쟁지도부 항쟁위원장이 된 것이다. 나는 25일 저녁에 자리를 내놓았다.”
5월 26일에 처음으로 구성된 항쟁본부, 대학생 김종배가 사령관이었습니다. 그 의 증언이 있습니다. “5월 25일, 윤상원, 정상용, 김종배 이렇게 셋이서 투쟁위원회를 짰다. 예비군까지 동원하려 했지만 동원은 못했다. . 기동타격대를 구성했는데 대장은 윤석루(19세, 무기징역 선고)가 맡았다. 사실 윤석루는 그때 뭘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21일 발포 이후인 저녁에 총이 나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 수습대책위원회가 설치되어 무기반납을 추진했다. 나는 도청 분수대에 뛰어 올라 마이크를 뺏어가지고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무슨 수습이고 무슨 무기반납이냐 소리쳤다. . 26일, 우리는 참 외로웠다. 계엄군은 들어온다 하지, 사람들은 계속 빠지고 있지, 이런 상태에서 계엄군과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나중에 보니 17명이 사망했더라. . 박남선(투쟁위원회의 상활실장, 화려한 휴가의 안성기 역)은 평시에 알던 사람이 아니라 도청에서 처음 만났다. 도청에서 최후까지 싸운 사람들은 거의 다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외무위원장 정상용의 이어진 증언입니다. “‘항쟁지도부’라는 것은 낯모르는 사람들 끌어 모아 임시방편으로 만든 임시조직이었다. 윤상원, 나, 이강현, 윤강옥 이렇게 넷이서 주로 대책을 의논했다. 25일 이후에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겨우 70-80명 수준이었다. 그나마 얼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온건파인 김창길 등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박남선이었다. 그가 권총을 쏘며 무섭게 해서 몰아냈다. 19일에 나는 녹두서점에 있었다. 거기서 윤상원을 만나 대책을 의논하다가 21일 총격전이 벌어지자 흩어졌다. 김종배(총사령관역)와 허규정(내무위원장)은 도청에서 처음 만났다. 이 두 사람은 조선대 학생이었고, 운동권이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거기에서 생전 처음 만난 거다.”
“역사로서의 5.18” 제3권 (329-332)에는 김효섭의 증언이 있습니다. “상원이 형은 그게 자기가 생각해도 잘 안 되겠던지, 이번에는 무기를 개발하자고 했다. 깨진 보도 불록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철공소들에 다니면서 쇳토막 하고 나사를 많이 가져오라 했다. 21일 새벽부터 계림동 대인동을 다니면서 나사와 철근토막들을 구해 녹두서점으로 왔다. 그걸 가지고 나가 땡겨보았는데 날카로워 손에 피가 났다. 이거 안 되겠다 생각하고 있는 순간 어디선가 모르게 총이 쏟아져 나와 버렸다. 수집한 쇳토막들은 소용없게 되었다.”
[5.18 항쟁본부]를 구성하였다는 것을 명예로 5.18 최상의 유공자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누리며, 위세를 떨어온 사람들의 위 증언이 한동안 [북한군 개입]을 의심하던 수많은 국민에게 “바로 이거다” 하고 무릎을 치게 했던 결정적 일침의 역할, 마침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내용이 [5.18 분석 최종보고서]에 실려있고, 그래서 그 책을 읽은 분들이 많은 호응을 해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5.18 최상의 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운동권도 아니고, 23일에 한 사람씩 도청에 갔다가 카리스마 넘치는 위엄 있어 보이는 높은 관료들이 출입을 못하게 해서 주눅들어 가지고 발길을 돌렸다가, 5월 24일 오후부터 각자 초면인 상태로 도청에서 만나 갑론을박하며 다투기만 하다가 5.27.에 점령당한 20대들이었습니다. 이것이 5.18 최고 반열에 있는 5.18유공자들의 초라한 초상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도청 앞을 지키는 위엄 있어 보이는 관료들”은 북한 사람인 것입니다. 시위에 불타던 광주에 광주인들이 만든 조직이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몰려다니는 부나비들이었습니다.
전남 운동권의 전설이라는 윤한봉은 5.17계엄령 발동 이전에 숨어 다니다가 밀항하여 미국으로 도망갔고, 김대중으로부터 김상현을 통해 500만원을 받았다는 정동년은 5월 17일 자택에서 체포되었고, 광주 운동권에서 가장 신망 높았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시위 기간 내내 도망가 있었고, 5월 27일 사망한 윤상원은 5월 22일까지도 이리저리 숨어 다녔습니다. 5.18유공자들 중 최고반열에 정좌한 사람들의 증언을 읽어보면 5월 18일부터 21일 계엄군을 도청에서 몰아낼 때까지의 전투 지휘자는 광주에 없었습니다.
이상의 모든 증언들에는 5월 21일에 벌였던 신출귀몰하는 군사작전을 광주인들이 주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역력히 증명돼 있습니다. 이동하는 20사단 차량부대를 공격한 것도 광주인이 한 것이 아니고, 아시아 군납업체에서 군용트럭 400대와 장갑차 4대를 탈취한 것도 광주인이 한 일이 아니며, 4시간 만에 17개 시군에 감쪽같이 위장돼 있는 44개 무기기를 탈취한 것도 광주인이 아니고, 교도소를 5회에 걸쳐 야간공격한 것도 광주인이 아니고, 도청 지하실에 2,100발의 TNT 폭탄을 조립해놓은 사람들도 광주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쨉도 안 되는 광주가 감히 맥가이버 수준의 북한군이 벌인 화려한 무공 실력을 자기들의 무용담으로 포장하여 국민과 국가와 세계를 속이는 대범한 사기극을 벌여온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모든 국민들이 분노해야 하는 역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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