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내란을 전두환 내란으로 뒤집은 과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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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5-12-24 11:14 조회6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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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내란을 전두환 내란으로 뒤집은 과정(3)
환각제의 의미
광주 유언비어의 꽃은 [환각제]였습니다. 전두환이 공수대원들에게 환각제를 빼갈에 타서 먹였고, 환각제를 마신 계엄군이 짐승처럼 남녀노소 구별 없이 마구 학살하고 농락했다는 것이 광주 유언비어의 핵이었습니다. 또한 1991년 김일성이 제작해 개봉한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테마 역시 [환각제]였습니다. 이창룡은 환각제를 광주 증심사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던 거물 간첩 손성모를 통해 광주에서 사망한 계엄군 주머니에 넣기 위해 휴대하고 거사일인 5월 22일에 맞추어 미리 평양을 떠났습니다. 5월 21일 순천에 상륙하여 5.22. 광주로 침투하려다 경비가 삼엄하여 광주에 내리지 못하고, 23일 새벽 서울역에까지 떠밀려 와서 서성거리다, 호객하러 나온 여관집 부부의 신고로 체포되었습니다.
당시의 수사관들이나 그 후 5.18을 수사한 수사관들이나 이창룡 소지품 중에 환각제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장면들을 바둑판에 올려놓고 보면 이창룡의 환각제는 전국 폭동에 대한 김대중의 선전포고와 북괴의 남침 계획을 연결시켜 주는 매우 중요한 증거입니다. 5.18이 김일성과 김대중이 공동으로 기획한 군사작전이었다는 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바로 이창룡의 환각제인 것입니다.
김영삼의 날치기 반역행위
1981년 1월 23일의 대법원은 5.18을 김대중이 주도한 내란이었다고 확정 판결하였습니다. 이 대법원 확정 판결을 우리는 [기판력]이라 부릅니다. 기판력을 뒤집으려면 [재심] 절차가 필요하고, 재심을 하려면 재심의 요건이 충족돼야 합니다. 그런데 김영삼은 이런 원칙을 다 무시했습니다. 1995.12.21. [5.18특별법]을 만들고, 그 특별법에 근거해 5.18을 다시 재판했습니다. 그리고 5.18은 김대중의 내란사건이 아니라 전두환의 내란사건이라고 뒤집었습니다. 어제의 충신이 역적 되고, 어제의 역적이 충신으로 등극했습니다. 이는 나라가 바뀌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현상입니다.
노태우의 반역 및 배신행위
1988년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총선 전략을 잘못 짜서 여소야대 정국을 불러왔습니다. 궁지에 몰린 그는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1990년, 김영삼과 김종필을 끌어들여 3당 합당을 했습니다. 민정당이 민자당이 되었습니다. 3당 합당에는 김영삼이 내거는 전제조건이 있었습니다. ① 5.18을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호칭케 하도록 법을 만들 것 ② 정호용을 민자당에서 내쫓을 것 ③ 광주 희생자들에 보상을 할 것 등이었습니다.
정호용은 당시 온 사회에 차기 대통령감으로 회자되고 있었습니다. 김영삼은 그를 축출해야 차기 대통령을 넘볼 수 있었습니다. 정호용을 축출하려면 명분과 이유가 필요했습니다. 노태우와 김영삼은 공모하여 그 이유를 만들어 냈습니다. “정호용은 공수특전 사령관으로 광주에 특전부대를 보내 양민을 학살했다.” 정호용 부인은 너무 억울해서 자살 기도까지 했습니다. 노태우가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육사 동기생을 모략하여 희생시킨 것입니다.
[5.18 민주화 운동]이라는 말은 정치인들이 야합한 흥정 물
[폭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날치기 한 것은 이처럼 정치인들끼리 이해득실에 따라 절충하고 타협한 흥정물이었을 뿐, 과학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단계에서 김영삼은 5공의 5자도 꺼내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5.18 역사는 이 상태로 1995년 10월 27일까지 5년 동안 굳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5.18은 국가와 광주 사이에 벌어진 충돌사건이었을 뿐, 그것을 운동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성격의 사건입니다. 무릇 [운동](movement) 이라는 것은 새마을 운동이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처럼 지도자가 있고, 조직이 있고 슬로건과 목표가 있고, 계몽기간이 있어야 성립합니다. 그런데 5.18에는 이 모두가 없습니다. 광주시를 수놓은 슬로건은 오로지 “찢어죽이자 전두환” “석방하라 김대중” 이런 것뿐이었습니다. 현장 사진들에는 수많은 무장한 괴한들이 조직화돼 있었고, 조직에 마다 지휘자가 있었지만, 실제 광주인 가운데에는 지휘자가 단 1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5.18은 절대로 [운동]이라는 명칭도, [민주화]라는 명칭도 달 수 없는 괴한들의 폭동이었습니다.
2025.12.2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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