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수준의 노동운동가 이정로[백태웅]가 본 광주사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1-04 14:34 조회22,927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한국 최고수준의 노동운동가 이정로(백태웅)가 본 광주사태
월간 노동해방문학 1989년5월호 특집에는 “광주무장봉기의 지도자 윤상원평전”(박노해)과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전환”(이정로)이라는 제하의 글이 나란히 실려있다. 이정로라는 이름은 필명이며 원래 이름은 백태웅이다. 그는 서울대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출신으로 위장취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노동자 해방의 선도자이며 많은 ‘노동지’들에 기고를 하는 문필가로 알려져 있고 많은 책을 냈다. 98년12월05일자 신동아에는 ‘이색대담’ 이라는 제하에 ‘백태웅 VS 한인섭 서울대 교수(형법학)’와의 대담 내용을 이렇게 풀어갔다.
“백태웅씨는 나의 고등학교, 대학교 같은 과 4년 후배다. 때문에 그가 살아가고 변화해가는 것을 누구보다 잘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나 84년 이후 만남은 중단됐다. 수배생활 7년, 감옥생활 7년 동안 그는 타인과 편안하고 여유 있는 만남을 가질 수 없었다. 생각의 가닥이야 다르더라도 그가 걸어가는 가시밭길은 늘 내 마음 속에 진하게 울려왔다.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에 이르는 젊음을 ‘그 무엇’을 향해 송두리째 바치고, 다시 가석방이란 불완전한 상태로 사회 한복판으로 돌아온 그이기에, 그동안 그의 마음 깊은 곳에 겹겹이 쌓아놓았을 이야기를 올올이 풀어내고 싶었다.”
‘노동해방문학’은 CA(제헌의회)의 후신인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입장과 노선을 대변한 월간 노동잡지였다. 사노맹은 핵심적 노동 활동가들이 이 잡지에 기고를 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정치노선과 당면 투쟁방침 등을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전달하려 했다. 잠시 운동권의 계보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80년대 초반까지 운동권 내부에는 파벌이 없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들어 NL-PD그룹으로 노선이 갈리면서 파벌이 생겼다. 85년 서울법대 82학번 주사파의 대부라는 김영환이 작성한 ‘강철서신’은 NL이론의 효시다. 이 문서에서 김영환은 변혁의 과제를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정리하고 영문자를 따서 NLPDR로 약칭했다. 변혁 과제, 활동가의 품성, 대중적 실천 방안에 이르기까지의 전략을 제시한 ‘강철서신’은 운동권 학생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그리고 NL의 맞은편에 섰던 것은 당초 제헌의회파(CA:Constituent Assembly)그룹이었다. 86년 5.3 인천사태 직후 첫선을 보였다. 김문수 현 경기지사를 비롯해 심상정 민노당 의원, 유시민 대통합민주신당 의원, 박노해 시인 등이 참여하고 있던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CA그룹을 형성했다. 그러나 CA는 곧 NL과 사노맹 등으로 흩어지면서 사라지고, 대신 87년부터 등장한 PD그룹이 그 자리를 메웠다. 비로소 NL-PD 구도가 성립된 것이다. 현 한나라당 국회의원인 김성식은 서울대 운동권 출신으로 1978년 ‘유신철폐시위’에 이어 1986년 ‘제헌의회그룹(CA:Constituent Assembly)사건’으로 두 차례 구속됐다. CA그룹은 한국사회를 ‘제국주의의 신식민지’로 간주하면서 ‘파쇼개헌을 반대하고 혁명으로 제헌의회를 만들자’는 좌파혁명 단체였다. 김성식은 출소 후 전국화학노조 기획부장과 민주당 동대문을 지구당위원장을 거쳐 2000년 한나라당 서울관악갑 지구당 위원장으로 한나라당에 들어왔다. 2004년 총선에 떨어진 후에는 손학규 경기지사를 따라가 경기도 정무부지사로 활동했고, 손학규가 2007년3월에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자 이명박 선거캠프에 발탁되어 조직기획팀장으로 활동하다가 2008년에 국회이원이 되었다.
NL은 미국의 개입 때문에 통일이 안 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미국타도가 그들의 목표다. 반면 PD는 한국을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로 봤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려면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뉴라이트 신지호가 여기에 속했다. NL이 통일운동과 학생운동을 강조한 반면 PD는 노동운동을 핵심으로 삼았다. NL은 북한의 이론과 혁명 전통을 중시했다. 그래서 주사파로 불렸다. 반면 PD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소련의 혁명 전통을 받들었다.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PD는 소련 교과서의 수입상이었고, NL은 북한 교과서의 수입상이었다.
이하 백태웅 즉 필명 이정로가 쓴 45,000자에 이르는 장문의 글 중에서 요점만 발췌한다. 위의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가 외부자 시각인데 반해 이정로의 글은 내부자 시각, 즉 5.18세력의 시각인 것이다.
제목: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전환(월간노동해방문학 89년5월호)
필자: 이정로(노동운동가)
글머리에
"폭도들은 들어라! 너희들은 완전 포위되었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
"와서 죽일테면 죽여라! 이놈들아! 네 놈들한테는 죽어도 항복은 못한다!"
"시민군들은 얼른 날이 새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벽은 우리의 기대처럼 빨리 오지 않았고 얼룩무늬 독사의 혀만이 낼름거리고 우리를 노리고 있었다‥‥‥ 결코 새벽은 오지 않았고 영영 새벽은 죽어버렸다. 계엄군의 사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오월 그날’ 64면,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
수천 광주 시민의 꽃넋과 함께 영영 죽어버린 새벽! 그로부터 9년이 흘렀다. . .그러나 아는가! 광주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민중의 영웅적 무장봉기. . . . 망월묘지의 언덕바지에 묻힌 원한의 주검들! 감형과 특사로 살아남은 동지들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는 그날의 열기와 살 떨리는 분노!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실성하여 껍데기만이 남은 사랑하는 우리의 동지! 아직도 무장봉기의 도시 광주는 목 놓아 울부짖고 있다. . . 피 맛을 본 미치광이 공수부대들이 우리의 형제와 아들딸들을 어떻게 짓밟고 도륙했는지를 볼 때마다 9년간의 세월을 건너뛴 오늘이지만 우리의 가슴은 분노로 들끓고, 어금니 앙당물리고 양주먹이 저절로 굳게 쥐어진다. . .
광주봉기는 민족민주혁명의 교과서
광주의 무장봉기는 민족민주혁명의 살아있는 교과서이다. 광주봉기는 당면 혁명의 타도대상이 누구인지 그리고 민중의 대체권력은 어떻게 창출되는지를 보여준다. 광주봉기는 남한 민족민주혁명의 핵심 고리가 민중의 무장에 의한 낡은 권력의 전복과 새로운 권력으로의 대체임을 보여주며 그러한 경로를 알려준다. 우리는 광주무장봉기를 통하여 민족민주혁명의 전략과 전술을 배워야 한다.
광주의 노동자와 민중은 아세아자동차에서 장갑차를 몰고 나오고 파출소의 무기고를 덮쳐 캐리버50을 꺼내오고, 화순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를 끌어다 싣고 왔다. 권력의 총구가 민중의 가슴팍을 겨누고, 대검에 찔린 민중의 배에서 창자가 꾸럭꾸럭 허리 아래로 흘러내릴 때 민중의 뼈저린 자각은 저항의 총구에 불을 붙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권력이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존재라는 깨음에 신나를 몸에 끼얹고 활활 타오르는 노동자에게도 광주의 경험은 다시 살아나야 한다. 농약을 들이마시고 절명하는 농민들에게도 광주의 희망은 부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광주봉기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뜯어고치고 알짜배기 혁명의 교훈을 찾아내야 하는 이유이다. . .
광주무장봉기의 중심은 노동자계급이었다
"이때 갑자기 금남로 끝부분인 유동 쪽에서 수많은 차량들이 일제히 비상라이트를 켜고 동시에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돌진해 왔다. 맨 선두에는 대한통운 소속 12톤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가 앞장섰다. 대형트럭 4대, 시내외버스 11대가 선두에 섰고, 그 뒤로 2백여 대의 택시가 도로를 가득 메운 채 뒤따르고 있었다. 트럭 위에는 20여명의 청년들이 올라서서 태극기를 흔들어 댔으며, 버스 속에는 남녀노소할 것 없이 시민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순식간에 시위대열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충천했다."
1980년 5월20일! 오후 7시! 노동자계급은 이렇게 광주 민중봉기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5월18일까지만 해도 시위대열의 중심은 학생이었다. 14, 15, 16일의 민족민주화 성회를 주도하던 학생회 간부들보다도 역사적 현장에서의 정치적 각성을 받은 학생대중들이 가두투쟁의 중심이었다. 전남대 앞에서의 첫 번째 충돌과 광주신역과 가톨릭센타 앞에서의 두 번째 전투에 이르기까지 광주지역의 혁명적 학생들은 단호하게 투쟁의 선도체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5월19일부터는 학생시위가 민중항쟁으로 변화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대에는 노동자와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났다. 이미 학생들의 숫자보다, 소상인과 가게종업원, 노동자의 비중이 월등히 커졌다. 학생시위가 민중봉기로 전환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 .
그리하여 5월20일 오후 2시부터 무등경기장에는 택시운수노동자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군저지선의 돌파에 앞장서자’고 결의하면서 2백여 대가 무리지어 도청을 돌격해 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들 운수노동자의 결의에 고무된 박남선, 오한균 등의 노동자와 혁명적 민중은 동운동 고가도로 밑의 주유소에 본부를 정하고,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파괴, 점령하고 고속도로를 차단한 다음 모든 차량을 징발하는 작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화물트럭과 대형차가 선두와 양 옆을 호위하고 소형택시들이 대오를 이루면서 도청을 향한 '차량돌격대'를 편성하게 된 것이다. 이 날의 노동자계급의 대진군을 부르주아적 언론은 '차량시위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시위대'가 아니라 '전투부대'였고 '돌격대'였다. 그러한 차량돌격대의 중책은 바로 노동자계급이었으며 혁명적 민중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저지선 돌파작전에 함께 하였다.
5월20일 저녁부터 21일 새벽에 걸친 처절한 혈투는 마침내 반동권력의 하수인인 계엄군의 본색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게 만들었다. 계엄군은 칠흑 같은 밤공기를 가르며 민중의 가슴에 총탄을 쏘아보내기 시작하였다. 일제사격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지자 차량돌격대를 구성한 핵심부대원은 무장혁명군으로 변화해 갔다. 5월 21일 오전에는 아세아자동차에서 APC장갑차 3대를 포함한 3백60여 대의 차량이 징발되었다. 무기를 탈취한기 취하여 나주 방면을 향하는 7대의 버스에는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돌격대가 되어 있었다. 나주경찰서의 무기고에서는 Ml소총과 AR소총, 그리고 카빈소총 등이 광주로 반입되었다. 그리고 화순탄광의 돌격부대원들은 화순탄광 광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무기로 얻었다. 그리고 일부 광산노동자들도 무장혁명군대의 대오에 합세하였다. 광주의 노동자계급은 봉기에 뛰어들자마자 무장혁명군대라는 가장 핵심적 부분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무장혁명군의 계급 구성
'시민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진 무장혁명군의 중책은 노동자계급이었다. 5월21일 오후 4시쯤 광주공원에서 최초로 1백20여명의 무장혁명군이 편제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산업노동자, 목공, 건설노동자들과, 구두닦이, 웨이터, 일용품팔이 노동자들이었다. 한편, 오후5시경 유동삼거리에서도 2백 명 가량의 무장혁명군이 편제되었다. 박남선씨를 총지휘자로 한 이 대오 역시 이미 학생들의 시위부대가 아니라 노동자가 중심이 된 민중의 혁명군이었다. 이들 무장혁명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금남로를 따라 도청을 향하여 진군하면서 광주시민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는다. 이 부대는 광주공원의 무장부대와 합세하여 단일한 무장혁명군의 대오를 형성한다. 이들은 계엄군으로부터 노획한 무전기를 무전병 출신에게 맡겨 계엄군 이동 상태를 파악하고, 적십자병원을 본부로 하는 무장혁명군의 사령부를 건설하였다.
한편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서는 기관총 2정이 도청의 계엄군을 향해 불을 뿜었고, 휘발유를 가득 실은 소방차가 도청정문을 돌파하기 위해 시민군의 엄호를 받으며 도청으로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계엄군은 도청을 버리고 총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와 혁명적 민중으로 이루어진 무장혁명군은 마침내 계엄군을 광주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치열한 전투의 과정에서 지휘체계를 갖춘 무장혁명군은 도청으로 집결하여 상황본부를 구성하고 무장봉기의 최선봉에 섰던 박남선이 상황실장이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혁명군대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시민군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박남선은 골재채취를 주역으로 하는 하층 쁘띠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그는 무장봉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자계급과 함께 투쟁의 중심적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상황실 산하에는 기동타격대와 경비대가 설치되었다.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는 '자개조각공'인 노동자였으며, 경비대장 정화성은 식당종업원이었다. 기동타격대는 5, 6명을 1개조로 하고 각 조마다 조장 1명, 타격대원 4, 5명, 군용정차 1대, 무전기 1대, 개인 화기로 카빈소총1정과 15발들이 실탄 1클립씩이 지급되어 모두 13개조가 편제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제껏 천대받고 억압받는 노동자와 민중의 혁명적 군대가 억압의 군대인 계엄군을 몰아내고 민중의 혁명적 무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광주무장봉기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혁명적 무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광주봉기 이후 기동타격대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밝혀진 구속자들 중 노동자간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성원의 76.7%나 된다. 광주의 무장투쟁에 가장 헌신적인 계급은 바로 노동자계급이었던 것이다.
광주무장봉기의 주력은 노동자계급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혁명적 학생, 소상인, 지식인이 결합함으로써 광주봉기는 계엄군을 몰아내고 일주일간 광주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노동자계급은 수적인 구성에서나 투쟁에서의 헌신성에서나 광주봉기의 주인공이었다. 이제까지 발간된 문헌에서의 광주봉기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으로 봉기의 주체가 '민중'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한 측면에서는 타당하고 올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의 대부분은 투쟁주력이 노동자계급이었다는 점을 빠뜨리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혁명군대는 투항파 학생들이 수습대책위에서 물러나가게 하고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가져오는 핵심적 물리력이었다. . "니미헐! 공수부대 들어온께 다 좆빠지게 도망가 버리드라! 그래갖고 우리 못배우고 가난한 놈들이 목숨걸고 공수들 몰아내 놓은게 슬그머니 들어와서 명분이 어떻고 폼잡다가, 또 밀고들어 온다니까 슬그머니 도망가 불드만!" "어따 두고 보라구. 앞으로 세월이 지나면 도망갔다 와서 몇시간씩 폼잡던 즈그들이 광주를 지켰다고 왕왕댈 것이구만!" (‘오월그날’ 89면)
초기의 민중적 봉기지도기관이 형성되는 과정
광주지역의 봉기 지도 기관은 사전에 만들어져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투쟁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가장 선진적인 부분이 봉기의 실질적 지도기관으로 성장하고 발전해 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에서는 ‘투사회보’라는 지하유인물을 발간하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당시 유인물은 들불야학팀과 전남대 지하유인물 발간팀인 '대학의 소리'팀, 그리고 한국문화연구소의 문화패 광대팀 등의 것들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5월20일경 (자료에 따라 22일이라고 나오는 곳도 있다) 합류하여 투사회보라는 유인물을 발간한다. 투사회보는 문안작성조인 윤상원, 전용호를 비롯하여 필경조, 등사조, 종이보급조, 배포조 등의 체계를 갖추고 민중운동권과 학생, 노동자 등이 어우러져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광주봉기의 전 기간에 걸쳐 유일한 '봉기의 기관지'라 할 투사회보를 10호에 이르기까지 제작한다(10호는 미처 배포되지 못했다). 이들은 5월20일자에 발간된 투사회보 제1호에서 "무기제작, 무기고 탈취, 송곳, 칼 등으로의 개인적 테러를 가하는 방법" 등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이들 그룹의 주도하에 아세아자동차의 차량접수와 무기탈취 등의 무장 행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한편 대중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옥주씨와 차명숙씨 등의 여성대중 지도자가 등장한다. 봉기의 전개과정은 이처럼 평범한 대중을 순식간에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여 역사의 현장에 서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도청을 둘러싸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던 5월20일 밤부터 5월21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가두방송을 통하여 전체 시위대를 총지휘한다. 그러나 이들은 5월 22일 '간첩이라는 선동'에 휘말려 계엄군에게 넘겨짐으로써 봉기의 지도기관으로서의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항쟁인가 무장봉기인가?
광주의 80년5월은 '민중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과연 우리가 광주를 '민중항쟁'이라고 부르는 것에 머물러도 좋은가? 반동부르주아지들은 광주무장봉기의 이름을 '사태'라고 불러왔다. 그들은 일체의 민주화 요구의 의의를 부정했다. 오로지 폭도들의 난동이라는 시각을 강요해왔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주의적인 보수야당과의 절충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민주화운동'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합의를 도출해 냈다. '광주민주화운동'이라? 이 말에는 민중이 왜 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를 아예 언급조차 하기 싫어하는 부르주아계급의 위선이 숨어 있다. 그들은 '무장'의 문제에 대한 태도는 아주 빼버림으로써 광주봉기의 혁명적 의의를 삭제해 버렸다.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비열한 의도에 쐐기를 박기 위하여 '민중항쟁'이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광주의 민중은 분명히 '항쟁'하였다. 그러나 과연 광주의 노동자와 혁명적 쁘띠부르주아지(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중간에 위치하는 소생산자, 소상인, 봉급생활자, 자유직업자 등)의 무장부대는 계엄군의 만행에 못 이겨 들고 일어난 단순한 '저항부대', '정당방위대'였는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대로 욱하는 심정으로 무장을 한 '선량한' 폭도였는가? 광범위한 민중이 처음 시위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분명 단순한 분노와 생명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한 무장이었다. 그러나 계엄군의 발포를 받으면서 광주민중은 이미 파쇼권력과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성을 확인하였다. 민중의 군대하고 선전해 오던 국군이 민중의 가슴에 총탄을 쑤셔박고, 민중의 정부와 관리라는 자들이 민중을 저주하여 죽음의 구렁텅이로 나날이 몰아넣는 것을 본 순간부터 민중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민중은 혁명군대가 되고 혁명적 봉기부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광주봉기를 '민중항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이 표현은 민중이 무엇을 위해 투쟁했고 무엇을 위하여 죽음을 달게 안아 들였는지를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무장을 통하여 권력을 탈취하고자 하는 시도, 낡은 권력을 깨뜨리고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고자 하는 광주민중의 영웅적 투쟁의지를 살려야 한다. '무장봉기'라는 규정은 광주민중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명칭이다. 광주 민중은 민주주의를 위한 '압력'을 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도'하기 위해서 총을 들었다. 그것은 '시민항쟁'의 차원을 넘어서서 '반란'이요 '혁명'이며, '주권탈취'의 한판 싸움이었다. 광주의 민중은 '비굴한 타협'이 아니라, 해방을 위한 '총공격'의 신명나는 한판을 벌였다. 그것은 '실패한 무장봉기'였다. 만약 광주지역의 승리가 전남 전체지역의 승리로 그리고 나아가 전국적 승리로 되었다면 위대한 민족민주혁명의 성취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 처절하게 참혹한 실패를 정확하게 배우고 새로운 혁명의 첫걸음을 열기 위해서도 우리는 광주를 '무장봉기의 도시', 권력을 일시적으로나마 민중이 직접 소유한 소중한 경험을 가진 '혁명의 도시'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광주봉기의 교훈은 권력의 문제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은 그 자체를 골백번 외쳐도 오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의 과제를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며, 제국주의의 지배에 도구가 되고 있는 반민주적이고 예속적인 권력을 타도해버리고 새로운 혁명권력을 수립하는 방법뿐이다. 수 십 년간 민주화투쟁이 계속되어 왔지만 80년5월에 와서야 비로소 낡은 권력을 향하며 직접적으로 총을 들이대고 주권을 탈취하기 위한 첫 시도가 전개되었고 그것만이 민주주의의 과제를 달성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남한사회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변혁 상의 과제는 수도 없이 많다.
광주봉기에서 미제국주의가 담당한 역할
"광주무장봉기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고 반제투쟁의 씨앗을 뿌렸다." 이것은 가장 자주 언급되어온 광주민중봉기의 교훈 중 하나이다. 미제국주의는 광주무장봉기에서 남한 국가권력의 충실한 동맹군의 역할을 했다. 미제국주의는 남한 민중의 벗이 아니라 파쇼권력의 혈맹임을 계엄군의 이동을 승인함으로써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자신의 신식민지 지배를 지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남한 민중의 민주화 옹호자인 듯한 모습을 취했던 그들은 학살자의 피 묻은 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맞잡는 민중의 적인 것이다. 광주봉기는 미제국주의가 남한 권력을 통하여 우리 노동자와 민중을 지배하는 '간접지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증해 보였다.
당면 혁명과 무장봉기의 불가피성
광주민중에게 차량돌격부대를 조직하게 하고 M16과 캐리버50 장갑차와 다이나마이트를 들게 만든 일차적 촉발제는 계엄군의 잔인한 민중탄압과 우리의 형제와 아들딸의 가슴을 정조준한 공식발포였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끓어오르는 적대감은 어제 오늘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계엄군의 공식발포는 다만 그러한 분노를 가리고 있던 차단벽을 제거해 주었던 것이었다. 초기의 시위는 단순한 항의에 그쳤지만 민중의 무장부대가 조직되면서부터는 혁명적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투쟁이 되었다. 파쇼권력은 발포로써 자신의 계급적 실체를 드러냈고 민중은 이제껏 가슴속에서 꼬물꼬물 일어나고 있던 갈증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혁명적 무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무장은 단순한 자위적 수단에 머무르지 않았다. 반동권력을 타도하고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발전해 갔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혁명적 민중은 권력하의 타협을 모색하던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과 쁘띠부르주아지 동요파들을 힘껏 박차버렸다.
군대를 민중의 편으로 돌리는 작업
광주무장봉기에서 계엄군은 무자비한 학살의 군대였다. 기다란 작업봉을 허리에 차고 M16에 대검을 곧추세운 계엄군은 일반 민중의 눈에는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들은 추호의 동요도 없고, 피도 눈들도 없으며, 명령에 눈깜짝도 하지 않고 복종하는 로보트처럼 보였다.
그러나 광주무장봉기가 진행된 불과 열흘간의 경험은 군대를 민중의 편으로 돌리는 작업이 결로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실증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5월20일 광주지역 향토사단인 육군 제31사단이 공수부대의 지나친 진압에 반발하면서 계엄당국의 명령을 거부하여 전남북 계엄 분소장인 정웅씨가 경질되는 사태가 발생한 점이다. 이것은 민중들의 분노가 폭발적으로 고양되어 감에 따라 군대마저 영향을 받게 된다는 단적인 증거인 것이다.
"오로지 누워서 잠 좀 잤으면 하는 바램뿐이었습니다. 그 옆에 누워서 밤하늘을 쳐다보니 별은 총총히 빛나고 최루탄 냄새, 앵앵거리는 불자동차 소리, 시위대의 고함소리 특히나 그 전옥주라는 여인의 선무방송은 저희들도 고향생각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동안 광주시민에게 너무 무자비하게 구타를 했다고 후회도 되었습니다. 선무방송 소리에 나도 이곳을 이탈해서 집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내 고향에서 이래야만 하는지 몰랐습니다."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 - 한 공수부대원의 수기,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47∼48면)
위의 인용문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공수부대 원은 시위진압의 격무 속에서도 이처럼 인간적 고뇌를 끊임없이 느낀다. 이들은 민중진영의 대오가 한없이 약할 때는 오만감과 각종 군 내부의 이데올로기 공작에 의하여 정확한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민중의 투쟁역량이 성장해 가면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한다. '군대가 돌아서지 않으면 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하고들 흔히 말한다. 그러나 혁명 초기에 군대가 곧바로 총을 돌려 겨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민중의 대오가 튼튼하고 저력이 막강하다는 것이 입증되면서부터 군 내부의 동요는 격화된다. 실제로 5월 21일 계엄군의 퇴각을 전후해서는 계엄군 사병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틈서리를 벌려내어 군대를 민중의 편으로 돌리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군대를 민중의 편으로 돌리는 작업은 일상적 시기에도 시작되어야 한다. 파쇼권력의 극악한 탄압 속에서도 가열차게 시위를 주도해 온 선진학생들의 영웅적 투쟁이 오늘날의 학생운동을 만들어 냈다. 마찬가지로 군대 내부에서의 투쟁을 조직하는 일도 지금 즉시 시작될 수 있다. 최근 군대와 전투경찰의 탈영과 양심선언이 줄을 잇고 있다. 이처럼 군대 내부에서 투쟁하는 것은 더욱 긴급하고 또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사병의 권익을 대변할 '사병대표자회의 소집'이나 '군대 내부의 민주화'를 내걸고 선도적 투쟁을 전개하는 것인 시급하다. 군대생활 3년을 감옥생활로 대신하겠다는 각오를 갖는다면 이러한 투쟁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확대발전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장투쟁을 실제 기술적으로 준비하자 !
. . 초기에는 송곳이나 칼 등의 개인적 테러의 도구들이 주요 관심사였지만 점차 화염병과 차량, 장갑차 등이 등장하고 다이나마이트와 소총에 이어 기관총인 접수되어 활용되기에 이른다. 광주무장봉기의 과정을 찬찬히 돌이켜 보라! 불과 5월20일로부터 5월22일에 걸쳐 얼마나 급속하게 무장대오가 창출되어 가는가 ! 다이너마이트를 접수했지만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까닭에 계엄군의 첩자가 뇌관을 뽑아 가버리는 것도 모른 채 다이너마이트의 위력만 믿고 있었던 무장혁명군의 전철은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우선 화염병제작법이 대중화되는 과정을 보라! 그 다음 단계로 사제폭탄 제조법이 급박하게 필요하게 되었을 때 어디에 가서 그것을 알아낼 터인가? 그리고 다이너마이트의 제작, 사용법은 언제 배울 것인가?
우리는 첫째, 무기의 제작 및 사용법에 대해 지금부터 목적의식적으로 조사, 연구하고 숙지해야 한다.
둘째, 무기를 입수할 수 있는 경로를 연구, 조사해 두어야 한다.
셋째, 시가전을 위한 지형의 연구, 조사 작업에 즉각 착수해야 한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