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쓴 제주4.3사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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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3-01 22:09 조회15,84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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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 북이 제주도 4.3사건에 대한 쓴 논문이다, 우리가 쓴 역사보다 더 단도직입적이고 현장감 있게 썼다. 제주도 역사는 김일성의 역사이지 대한민국의 역사가 아니다. 진정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북이 쓴 역사와 우리가 쓴 역사를 자세하게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주도인민의 4.3봉기와 반미애국 투쟁 의 강화
박 설 영
머 리 말
지난 시기 남조선인민들이 벌린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의 력사를 깊이 연구 분석하여 체계화하는 것은 과학리론적으로는 물론 실천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것은 이것이 오늘 반미자주화와 반파쑈민주화를 위해 힘차게 투쟁하고 있는 남조선인민들의 의식화를 촉진시키는 중요한 방도의 하나로 되기 때문이다.
제주도인민들의 1948.4.3봉기를 비롯한 반미애국투쟁은 이러한 의의를 가지는 연구주제로 될 수 있는 것이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단독괴뢰 정부조작책동을 반대하여 벌린 제주도인민들의 4.3봉기는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정책과 민족분렬 책동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적인 힘에 의하여 나라의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대중적인 반미 애국항쟁이였으며 성스러운 민족해방투쟁이였다.
제주도인민들은 4.3봉기를 계기로 손에 무기를 들고 한나산을 중심으로하여 고립된 섬에서 오래 동안 온갖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미제와 그 주구들을 반대하여 영웅적인 피의 항쟁을 벌려 놈들을 공포 속에서 떨게 하였으며 자기들의 애국적 기개를 남김없이 시위하였다.
제주도인민들의 4.3봉기를 비롯한 적극적인 항쟁은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애국투쟁사에서 빛나는 자리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8.15후 제주도인민들이 벌린 반미애국투쟁을 4.3봉기를 기본으로 하여 시기 별로 고찰하고 매개 투쟁의 구체적 과정과 그 성과, 적들의 탄압책동 그리고 봉기의 특징과 의의를 서술하였다.
1. 8.15직후 제주도인민들의 민주주의적 변혁과 새 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
1 ) 8.15직후 민주주의적 변혁을 위한 투쟁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제일 남쪽에 위치한 가장 큰 섬이다. 섬은 동서가 73km, 북남이 41km, 둘레가 297.86km, 면적은 1,838.346km이다. 제주도는 1946년 7월까지 일제통치시기와 마찬가지로 행정적으로 전라남도에 속해있었다. 이 해 8월에 제주도를 전라남도로부터 분리시켜 독립적인 도로 만들고 남제주군과 북제주군의 2군을 설치하였다. 남제주군에는 7개면이, 북제주군에는 5개 면이 속해있었다. 이시기 주도인구는 30만에 달하였다.
8.15후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조선에 기여든 미제는 군사전략적으로나 경제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제주도를 호시탐탐 노리면서 지체 없이 이곳에 식민지 통치의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였다. 8.15직후 제주도에서는 8만여 명의 일제침략군패잔병과 일제경찰들이 파리 떼처럼 욱실거리며 인민들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을 탄압방해하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미제는 1945년 9월 15일 제주도를 강점한 후 이 섬을 대만, 오끼나와, 일본본토와 련결시켜 아세아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전변시키기 위하여 미쳐 날뛰였다. 미제는 제주도를 조선강점 미군사령부에 직속시키고 여기에 여러 개의 군용비행장, 군사도로, 군항, 군용목장 등을 설치하였으며 수개 련대의 <국방경비대>와 경찰대, 수많은 무장테로단을 주둔시켜 민주주의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미제는 불한당들을 긁어모아 반동단체인<한나단>을 조작하고 민주력량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제주도에서 남조선전지역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미제침략자들과 우리 인민들 사이, 진보와 반동사이의 모순대립이 첨예화되었다. 조성된 사태는 제주도 인민들이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정책을 반대하고 민주주의적 변혁과 통일적인 민주국가건설을 위한 투쟁에 일떠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인민들은 8.15후 험악한 정세 속에서 원쑤들의 총검의 폭압을 박차고 보안대등 자체방위조직을 결성하고 놈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일떠서게 되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남조선인민들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그 앞잡이들의 민족분렬정책을 반대하고 민주주의적 변혁을 요구하여 거듭 대규모의 투쟁을 벌리였습니다.”(김일성 저작집. 19권. 510~511페지)
8.15직후 남조선인민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장기간의 간고한 항일혁명투쟁을 승리 적으로 이끄시여 조국광복을 이룩하고 조국에 개선하신 소식과 해방 후 북반부일민들의 새 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성과에 고무되면서 미제의 식민 예속화정책을 반대하고 민주주의적 변혁을 위한 투쟁에 떨쳐나섰다. 남조선 인민들의 이러한 투쟁의 불길은 제주도에서 도 세차게 일어났다.
제주도 인민들과 보안대원들은 1945년 10월초 도처에서 미제와 <한나단>의 만행을 반대하는 강력한 시위를 단행하였다. 이에 질겁한 미제와 주구들은 50여 명의 애국자들을 검거 투옥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미제와 주구들의 이러한 탄압만행에 격분한 조천면, 애월면의 인민들 1,000여명은 미군정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애국적 인민들의 이와 같은 항의투쟁에 질겁한 미군정과 그 앞잡이들 다시금 무력으로 항쟁군중을 탄압하고 애국자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 투옥하였다 놈들은 <재판>놀음을 벌리고 100여명의 무고한 애국자들에게 중형을 들씌웠다.
이것은 미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 배격하는 제주도인민들의 투쟁을 더욱 촉진시키는 하나의 도화선으로 되였다. 조선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 채택되자 남조선에서는 이것을 중심으로 한 반동과 민주력량 사이의 대립이 한층 격화되었으며 이러한 속에서 로동자, 학생들의 투쟁 이 활발히 전개 되였다.
1946년 1월 제주 버스회사 종업원 50여 명이 로동조합결성 허용, 8시간 로동제 실시, 로동조건 개선, 임금인상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투쟁에 일떠서자 이것을 계기로 도안의 전 지역에서 로동자들의 련대 투쟁이 진행되였다. 이와 함께 1,200명의 맹원을 망라한 교육자동맹도 학생들을 반미반괴뢰투쟁에 떨쳐나서도록 하기위한 활동을 다양하게 벌리였다. 그리하여 애국적인 학생들은 조선인민의 피땀을 짜내는 ‘양과자’, ‘양담배’ 배격운동을 맹렬히 전개 하면서 반미애국투쟁의 불길을 전도적으로 세차게 일으켰다. 이것을 계기로 미국상품이 도안의 시장과 상점들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것은 학생들의 투쟁에서 이룩한 커다란 성과였다.
학생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46년 하반기에 들어와서도 일제식 교육잔재와 학원의 모리화, 파쑈교육을 반대해서 동맹휴학을 단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싸웠다. 미제는 남조선을 영원히 예속화하기 위하여 1946년 2월 <민주의원>을 조작한 후
각종 악법을 연달아 조작공포하고 민주력량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길에 들어섰다. 특히 놈들은 제주도에 <국방경비대>를 증강하고 <해안경비대>를 연해에 특파하여 바다로부터 인민들을 위협 공갈하는 한편 남조선 각도의 경찰국에서 이른바 <선발된> 가장 반동적인 경찰관 100여 명을 급히 파견하여 제주. 서귀 경찰서와 각 지서들에 배치하여 민주, 애국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준비를 일층 강화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놈들의 그 어떤 탄압책동도 새 사회 건설과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한 제주도인민들의 불굴의 투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 시기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탄압책동을 물리치고 투쟁 기세를 높이기위해서는 남조선의 민주력량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나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을 강화하고 로동자, 농민을 묶어 세워 혁명의 주력군을 튼튼히 꾸리며 이에 기초하여 각계각층 애국적 인민들을 광범히하게 망라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을 굳게 형성하는 것을 남조선혁명운동에서의 력량편성의 기본방향으로 규정하시였다.
제주도의 애국적 인민들은 1946년 12월 각계각층의 진정한 민주단체들을 망라한 민전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고 애국적인 도민들을 인민정권 수립하기위한 투쟁에로
고무 추동하였다.(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 서울문우사 1963년 36~37페지)
민전 제주도위원회의 결성은 새 사회 건설과 통일적인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제주도 인민들의 투쟁을 더욱 전진시키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제주도인민들은 더욱 조직된 력량으로 미제와 그 앞잡이 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떨쳐나서게 되였다.
2) 제주도인민들의 1947년 3.1절 투쟁
남조선인민들은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파쑈적폭압을 반대하며 민주주의적 변혁과 새 사회 건설을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벌려나갔다. 1947년 3월 총파업은 그 대표적인 투쟁의 하나였다.
3월 총파업은 3월 2일 “인민을 학살한 경찰을 총살 처단하라”는 구호를 들고 일떠선 제주도인민들의 투쟁을 계기로 하여 벌어졌다. 제주도인민 들은 3.1절을 며칠 앞두고 3.1절 기념행사를 합법적으로 벌리기 위하여 미군정 , 도청, 감찰청 당국과 교섭전을 거듭 벌리었다. 그러나 놈들은 여기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3.1절을 기회로 섬 땅의 민주세력을 교살하려고 중요지점에 바리케트를 쌓는 한편 3월 1일 제주도인민궐기대회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하여 기마대와 기동경찰대를 편성하는 데로 나갔다.
그리하여 애국적인 전체 도민들은 미군정과 그 앞잡이들의 탄압공세를 물리치면서3.1기념집회와 시위를 전적으로 승인하라>, <비법적인 탄압을 즉시 중지하라!> ><3.1 기념대회는 우리의 실력으로 전취하자!.라는 구호 밑에 시위 집회들을 단행하였고 삐라를 대량적으로 살포하였다.
이와 같은 정황 속에서 제주도 인민들은 3.1절 28주년 기념대회를 가져야 할 시각을 맞이하였다 3월 1일 오전 8시경 오현 중학교 교정에는 미군과 괴뢰경찰의 살인적인 무력 탄압에도 불구하고 약 2,000여명의 인민들이 집결하였다. “3.1절 기념 만세” “3.1정신으로 통일독립을 전취하자!” 등 글발이 씌여진 기발과 프랑카트를 든 그들의 기세는 충천하였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3.1절 28돌 기념대회를 진행하려 할 때 미군정 법무관 파트릿치와 1구 서장 놈이 거느린 기마대와 기동대원 수명이 학생들과 시민들의 대열애 함부로 기관총과 권총을 란사하면서 즉시 해산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양키는 이 땅에서 물러가라” “조선통일독립 완전민족해방만세”를 높이 부르면서 돌멩이로 무장하고 강력한 시위를 벌려 적들의 무력을 제압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군정은 “대회를 10분간에 마쳐라‘는 굴복적인 선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투쟁에서 승리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오현중학교 교정에서 기념대회를 마치고 가두시위에 떨쳐나섰다. 3,000여명의 시위자들은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시내를 행진하였다 여기에는 주변의 로동자, 농민은 물론 지어 군청의 량심적인 직원까지도 호응해 나섰다.
화북,함덕,삼양,조천 등지의 군중들로 이루어진 시위대의 한 대는 동문통으로, 하귀, 애월 주변의 군중들로 이루어진 다른 한 대는 서문통으로, 동광지방농민들로 이루어진 또 다른 한 대는 남문통으로 각각 행진하였다. 이리하여 순식간에 무려 3만여 명의 군중이 북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하였다. 원쑤들의 견고한 경비진을 돌파한 애국적인 인민들은 어마어마한 무력을 갖춘 적들의 포위 속에서 ‘3.1절 28주년 기념 제주도대회’를 실력으로 쟁취해서 개최하였다.
대회에서는 “우리들은 3.1혁명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통일민주국가를 세우자”라는 개회사를 하였으며 각계각층 대표들의 결의토론이 진행되였다. 이어 그들은 놈들의 야수적 탄압으로 박차고 “미제의 식민지 정책 절대 반대‘ ’3상회의 절대지지‘ ’‘민족통일전선만세’ ‘파쑈세력타도만세’ 등 구호를 피타게 웨치면서 부강한 통일적 자주독립국가를 세우기위한 시위에 돌입하였다. 시위자들은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발광적인 폭압을 뚫고 시위를 계속하였다. 한편 관덕정광장에서도 미제와 매국노들을 배격하는 시위가 치렬하게 벌어졌다.
미군정은 인민들의 기세에 기겁하여 ‘발포하여도 좋다’는 야수적인 지령으로 적수공권의 평화적 시민들에게 무차별사격을 가하여 ‘식산은행’ 앞에서 귀여운 사내아이를 사살하고 수많은 시위 군중들에게 부상을 입히는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시위군중의 분격은 하늘도 무너뜨릴 듯하였다 그들은 양키야 양키야 살인귀들아 이 아이를 살려내라고 웨치며 시체를 안고 적들의 코앞에서 항의 시위를 단행하였다.
이날의 제주도인민들의 3.1절 집회와 시위투쟁은 읍, 면 단위로 성과적으로 진행 되였다. 놈들이 줄여 서 발표한 이 날 동원인원수를 보더라도 투쟁이 얼마나 광범하고 통일적인 대중투쟁 이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제주읍 3만 명, 애월면 1만 명, 한림읍 1만 2,000명, 대정읍 8,000명,
안덕면 3,000명, 중문면 5,000명, 서귀읍 6,000명, 남원면 3,000명, 표선면 4,000명, 성산면 4,000명, 좌면 7,000명, 조천면 1만 명, 계10만 2,000명 이였다.(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자료집 46페지).
이날 놈들의 비상계엄령 속에서도 슬기로운 애국전통과 불굴의 혁명정신을 이어받을 제주도인민들이 벌린 대중적인 반미애국항쟁 시위는 놈들의 통치기능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지어는 대정, 중문. 조선 등지 의 일부 경찰관들은 대중의 투쟁 기세에 눌리워 동요하던 나머지 상투의 명령을 거부하고 피동적으로나마 관하의 3.1절 기념대회에 참가하여 ‘축사’를 하는 등으로 인민들의 투쟁을 지원하여나서기 까지 하였다.
제주도인민들은 이러한 실전투쟁을 통하여 더욱 자각하고 단결 되어갔다. 애국적인 제주도인민들은 미군정과 과뢰경찰의 3월 2일 검거선풍을 계기로 “3.1절에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말자‘라는 굳은 맹세를 다지고 10일 또다시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총파업에는 로동자, 학생 , 교원, 사무원, 상인 할 것 없이 극소수의 반동을 제외하고 30만 도민이 거의 참가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주도인민의 선두에 서서 인민들의 항쟁을 직접 지휘하였던 김달삼은 북조선기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미제국주의의 충실한 주구인 반동경찰은 1947년도에 3.1절을 경축하는 애국적 인민을 학살하고 수많은 부상자를 내였다. 이와 감은 반동경찰의 만행은 제주도 전체 인민들에게 참을 수 없는 민족적 분격을 일으키게 하였다. 제주도인민들은 미제국주의의 비호 밑에서 강행된 이 포학에 대하여 일대 파업으로 항거하였다. 즉 3월 10일에 단행된 총파업 에는 공장, 농촌, 학교 등에서 광범한 대중이 참가하였다. 로동자들은 기계를 멈추고 농민은 세금징수에 불응하고 학생들은 일제히 맹휴를 단행하고 미군정 절대 반대를 웨치며 투쟁하였다. 이 3.10파업은 남조선전역에 걸쳐 단행된 3월 20일 총파업의 단서가 되였다.‘(로동신문 1948. 8. 22)
이 총파업은 거대한 규모의 대중투쟁으로서 제주도인민투쟁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었다. 총파업은 제주도인민들의 단결된 힘을 크게 시위하였으며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식민지반동통치를 절대로 감수하지 않으려는 제주도인민들의 불굴의 투쟁의지를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총파업은 제주도인민들을 불굴의 투쟁정신으로 더 한충 무장시켰으며 그들의 앞으로의 투쟁을 힘있게 고무하였다.
총파업은 또한 미제와 그 주구들 에 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으며 놈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제주도의 애국적 인민들은 그 후에도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발악적 책동에 맞서 투쟁의 불길을 더욱 높이였다. 놈들은 총파업이후에 인민들에 대한 무력적 탄압을 악착하게 감행하였다. 3.1절 시위와 총파업 후 불과 한 달도 못되는 기간에 2,000여명의 진보적 인민들을 ‘군정 법령 위반’이란 죄명으로 재판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을 ‘군정재판’에 걸어 사형에 처하는 살인 만행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놈들은 그 어떠한 폭압으로써도 전체 조선인민의 절대적인 지원 밑에 진행되는 제주도인민들의 혁명적 진출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이처럼 인민들의 반미기세가 날을 따라 높아지자 3월 15일 놈들은 전도적인 대검거선풍을 일으켜 온 섬을 감옥과 인간도살장으로 전변시켰다.
제주도 애국인민들은 놈들의 발악적인 검거와 학살에 보다 발전적인 투쟁으로 대답하였다. 3월15일 중문면 로동자 300여명이 지서에서 벌린 결사시위 투쟁을 비롯하여 1947년 6월 6일 구좌면 종달리 군중대회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 8.15 2주년을 맞으며 도내 곳곳에서 진행된 투쟁들은 인민들의 단결된 위력을 시위하였다.
이후 계속
2011.3.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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