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정치인들의 민주화를 빙자한 망치기의 공작에 의해 작금의 대한민국은 바다에 침몰해가는 거함(巨艦)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날히 침몰해가는 배를 살리기 위해 전국의 애국지사들은 도처에서 대한민국을 향한 국민의 각성과 단결을 호소해온다.
그러나 일부 국민들은 좌파정치인들이라 볼 수 있는 YS, DJ,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선택하여 장장 15년간이나 집권을 하게 하였다. 15년 내내 좌파 대통령들은 입만 열면 민주화 타령을 하면서, 첫째, 종북정치로 국가 반역질 하고, 둘째, 천문학적인 부정뇌물을 받아 챙겼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문민정치는 종북정치외에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인가? 개탄을 토하면서, 김일성의 난(亂)인 한국동난 때, 인민군과 중공군의 총칼을 물리치고 망해가는 대한민국을 회복한 국군과 미군들을 회상하고, 추모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경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했다. 인민군들은 소련제 T34 탱크 130대와 155mm 중포를 앞세우고 물밀듯 쳐들어왔다. 그날의 서울은 조용한 일요일이었다. 전쟁발발의 보고를 들은 이승만은 황급히 주한미대사인 ‘존 무초’를 찾았다. 존 무초는 전선상황을 종합분석한 후 즉각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과 동경의 맥아더를 향해 긴급 전문을 타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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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하는 국군 1사단(시단장 백선엽) 국군들 |
인민군 남침에 대해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에게 트루먼은 결연한 얼굴빛으로 “좋아, 우리는 할 일이 생겼다”고 말했다. 동경의 맥아더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사납게 .“아직 내가 할 일이 있구먼”.했다. 지금까지 수수께끼같은 처신을 한 사람은 트루만정부의 국무장관 애치슨이다. 애치슨은 한국을 미군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스탈린과 모택동, 김일성은 에치슨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남침을 개시한 것이다. 그 애치슨이 북한군이 남침하자 한국방위를 위해 제철만난 메뚜기처럼 뛰기 시작했다.
애치슨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긴급 건의했다. 1. 맥아더 장군에게 남한에 군사장비를 충분하게 공급할 권한 부여, 2. 공군에게 미국 국민의 대피를 맡아 보호할 수 있는 권한 부여, 3. 유엔안전보장 이사회의 역할을 강화, 4. 제7함대를 중국 본토와 타이완 사이에 배치하는 것 등이었다. 애치슨의 첫 번째 건의사항은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트루먼에 의해 승인되었다. 또 애치슨은 남침한 인민군에 대한 응징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를 받아 하도록 트루먼에게 건의하고 승인받아 추진했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트뤼그베 리(Trygve Lie)’였다. 남침소식을 접한 리는 즉각 소련을 비난했다. “신이여, 이는 유엔헌장을 위배한 것입니다.” 그와 애치슨은 침략자들을 유엔에서 응징하도록 순발력있게 손발을 맞추었다.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침략자들을 응징하기 위해서는 이사회의 결의안이 필요했다. 세계의 관심은 워싱턴보다 유엔에 집중되었다. 미국 대표단의 우려는 소련 대표인 ‘야코프 말리크(Yakov A Malik)'였다. 그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응징할 결의안을 얻기가 힘들었다. 워싱턴의 간절한 청을 받은 유엔 사무총장 리는 유엔 대표들과 말리크를 설득하려고 오찬을 열었다. 오찬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사무총장은 말리크에게 회의에 참석하겠느냐, 고 물었다. 말리크는 침울한 음성으로 “참석하지 않을 거요”라고 말했다.
한국으로서는 절대절명의 유엔 안전보장회의에 소련대표의 불참은 하늘이 도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련대표의 불참은 소련의 실수라고 논평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소련의 계획된 책략이라고 본다. 소련은 미국이 북한과 전쟁을 하고 나아가 중국과 전쟁을 하기를 내심 바랐을 것이다. 미국이 전쟁의 수렁에 깊이 빠져 허우적 거릴 때, 미군이 선점한 서부 유럽의 소련진출과 아시아 지역에 소위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노리고, 고의적으로 불참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유엔은 1950년 7월7일, 미국이 주도하는 ‘통합사령부’를 설치하고, 이 사령부가 유엔의 깃발아래 활동하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다음날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군 최고 사령관으로 맥아더를 임명했다. 맥아더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을 겸임했다. 유엔 결의를 통한 미국은 국제적 명분속에 전쟁을 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왜 남침을 결행했을까? 첫째, 남로당 당수 박헌영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인민군이 남한에 내려가면 일백만이 넘는 남로당원들이 무장봉기하여 내응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박헌영의 장담을 철석같이 믿는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을 찾아가 박헌영의 말을 들려주며, 구차하고, 장황스럽게 지원요청을 했다. 스탈린은 일본을 미국에 빼앗긴 앙심에 김일성이 동족상잔(同族相殘)을 하면서 대리전을 하겠다는 말에 속으로 비웃으며 엄숙히 김일성의 요구를 승인했다. 모택동도 마찬가지였다. 동족상잔을 하면서 대리전을 하겠다는 말에 속으로 비웃으며 엄숙히 승인했다. 모택동과 스탈린은 각각 한국전에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을 속셈으로 승인을 한 것이다.
김일성이 난(亂)을 일으키기 전 한국사회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공작으로 좌파세상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인민군이 남침해오기 직전 대한민국 국군은 남로당에 의해 조종된 흔적이 보인다. 첫째, 6,25동난이 일어나기 전(6월28일), 국군은 육본의 훈령으로 전장병의 3분의 1을 농번기 휴가를 떠나 보내 부대가 텅비어 있었다. 둘째, 각 부대의 트럭, 대포를 포함한 주요 전투장비가 영등포 수리창(修理廠)으로 이송되어 있었다.
셋째, 전쟁 발발 3주일전(6월 10일) 육군본부 인사이동으로 본부국장, 사단장이 교체되어 대부분 지휘관이 새부대의 업무파악이 안된 상태였다. 넷째, 인민군이 남침해오기 전날(6월 24일)밤, 육군회관 상량식이 있어 채병덕 총참모장을 비롯한 군수뇌들이 미군고문관들과 함께 댄스 파티를 열고 양주를 마음껏 마셔 6월 25일, 인민군 탱크가 38선을 돌파 할 때 쯤에는 술에 만취해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다섯째, 채병덕 총참모장, 신성모 국방장관, 장창국 작전국장 등이 6월 25일 아침 연락두절이었다. 군지휘부가 전쟁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인민군은 38선에서 10km가 넘게 진격해오고 있었다. 자취를 감춘 고위장교들이 많았다.
1950년 6월 28일, 인민군은 남침 3일만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과 국군, 미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 김일성은 수안보 온천까지 내려와 작전회의를 주재하면서 8월 15일까지 최종목표인 부산을 점령해 1950년 광복절을 남조선 해방축제일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서울 시민의 피난길인 한강다리는 27일 밤, 공병대 대령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폭파되어 버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끝까지 서울을 사수한다”며 안심하라고 했지만,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빠져 나가 대전에 있었다. 대통령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국민의 실망과 비탄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한강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한강에서 추락하여 죽은 사람과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서 우왕좌왕 하다가 무수히 사람들이 죽어갔다.
맥아더는 대구, 부산을 향해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대군(大群)의 인민군을 낙동강 전선에서 붙잡고 대치하여 전투를 벌이면서 시간을 버는 작전을 폈다. 미군과 국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을 방어할 때, 인천상륙작전을 펼친다는 작전계획이었다. 당시 낙동강 전선의 미군은 8군이었다. 사령관은 2차 대전 때 전차부대의 명장인 패튼 장군의 참모장을 지낸 월턴 워커(Walton Walker) 중장이었다. 그는 패튼의 불독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패튼 장군을 닮아 용맹한 장군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낙동강 전선은 인민군에게 돌파되고, 대구, 부산은 차례로 함락되었을 것이다.
워커 사령관은 직접 정찰기를 타고 적진의 정찰에 나섰다. 조종사 린치(Michael Lynch)대위에게 정찰기를 타고 높이 날아 올랐다 내릴 때는 엔진을 끄게 하고 비행하면서 적진을 살펴 아군에게 고성능 확성기로 적의 위치를 알려주어 공격하게 했다. 인민군의 고사포와 기관포, 개인화기에서 소나기처럼 총탄을 퍼부어도 워커는 추호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총탄 속으로 비행기를 날아 오르고, 내리며, 아군에게 적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대전 수복 때, 워커는 직접 대전을 정찰하고 방송으로 “대전은 인민군이 달아나고 없다. 비었다. 진격하라!” 외쳤다.
8월 4일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전선에 방어선을 치고,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지는 9월15일까지 41일간 피아간 처절한 전투가 있었다. 낙동강은 피아간의 유혈로 붉은 핏물이 되어 흘렀다. 낙동강 안쪽으로는 미군 4개 사단, 국군 5개 사단, 등 9개 사단이 어깨를 바짝 붙이고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인민군은 제6, 제7, 제9, 제4, 제2, 제10, 제30, 제13, 제1, 제8, 제12, 제15, 등 13개 사단이 어깨를 맞대어 공격해왔다. 인민군의 포탄이 대구시내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구에서 낙동강의 전투와 대구에 떨어지는 인민군의 포탄을 보면서 조국이 공산화의 위기에 처한 것을 목도하고, 조국을 구하는 일념으로 전선으로 가기 위해 진해 육군사관학교로 달려갔다. 당시 YS, DJ는 무엇을 했을까? YS는 군대를 회피했다. DJ는 대한민국의 적인 남로당 목포시 조직부장으로서 대한민국에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률은 5천분의 1이었다. 워싱턴, 국방부, 육본, 등 요직들은 인천상륙작전에 회의를 품고 작전을 바꾸거나 좌절시키려 음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초지일관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50년, 9월15일, 맥아더는 자신의 참모장인 알몬드 중장을 인천상륙군인 10군단 사령관에 임명했다. 인천상륙작전명은 크로마이트(Chromite)였다. 마침내 상륙작전은 성공했다. 10군단이 서울을 탈환한 것은 인천 상륙 13일만인 9월 28이었다. 소위 ‘9,28 수복’이라는 것이다.
서울을 되찾은 맥아더에게 미 국무부는 긴급전문을 보내왔다. 서울을 점령하더라도 서울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복시키는 일은 국무부가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이를 무시했다. 유엔 결의안에 의해 침략자를 물리치라는 명령을 받은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침략자를 물리쳤으면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를 복귀시킬 권한이 있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이다. 맥아더는 중앙청에서 수도 서울 반환식을 가졌다.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경례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각하, 나의 장교들과 나는 이제 우리의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이며, 당신과 당신의 정부에 행정책임을 위임하는 바입니다”
맥아더는 전쟁 전의 38선 수복에 만족하지 않았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지 않으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50년 9월22일, 트루먼은 6월과 7월 안보리의 결의가 유엔군에게 38선을 넘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라고 선언하도록 애치슨에게 지시했다. 드디어 유엔은 인민군이 먼저 38선을 넘었기에 남과 북을 분활하는 38선의 의미는 사라졌다고 보고, 미국은 “한국의 전역에 안전을 보장하고,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자”는 8개국 결의안 작성을 주도했다. 유엔총회에서 소련권 내 국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반대표가 없었다. 10월 7일, 마지막 투표에서 찬성 47표, 반대 5표, 기권 7표로서 통과되었다. 그것은 첫째, 패주한 인민군을 추적하여 격멸하는 것과, 둘째, 유엔군의 깃발아래 한국전 지역을 통일하는 뜻과 권한이 있었다.
유엔결의를 받들어 맥아더는 유엔군사령관으로서 북한에 대해 즉시 항복할 것과 “한국에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기 위해 유엔에 충분히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북한의 호의적인 답이 즉시 없을 때, “곧장 유엔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필요한 군사적 조치를 취하겠다”라고 북한당국에 통보했다. 최후 통첩장은 맥아더가 직접 작성했다. 최후통첩장의 양식과 문구도 자신이 직접 작성했다. 1950년, 10월1일, 맥아더는 한국군을 선봉에 세워 38선을 넘어 북진을 명령했다. 그날의 미군과 국군의 생사를 초월한 반공정신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전투가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된 것을 우리는 절대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압록강까지 북진한 맥아더는 팽덕회가 지휘하는 중공군, 소위 항미원조군(抗美援朝軍)과 전투를 해야했다. 맥아더는 한국의 완전한 통일을 위해서는 중공군을 격멸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원폭사용이 절대 필요하다고 트루먼에게 승인요청을 했다. 트루먼은 원폭을 보유한 소련을 두려워했다. 공산당의 로비를 맡은 내외 정치인들이 트루먼을 압박했다. 언론에서는 맥아더가 중국 주요도시를 폭격하고, 장개석군(軍)의 본토수복을 도을 것이라는 음해성보도가 난무했다. 중공과의 전투가 심화되면,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서유럽으로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첩보에 놀란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고 말았다. 자나깨나 대한민국의 완전통일을 염원한 이승만 대통령과 중국본토수복을 열망하든 장개석 총통의 꿈은 사라져버렸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풍요를 누리며 주거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은 누구의 덕인가? 한국동난의 맥아더를 위시한 유엔군이요, 국군이 목숨바쳐 대한민국을 수호했기 때문이다. 동작동 현충원을 가보라. 한국동난 때 얼마나 많은 국군들이 죽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하의 검은 비석에는 이등병, 일등병이 가장 많이 죽어 이름을 남기고 있다.꽃다운 나이에 조국을 위해 산화한 것이다. 아직도 전상(戰傷)의 참전 군인들이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다. 또 미군과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한국은 김일성 세습독재의 나라요, 저 북한이 기아로 수백만명이 죽어나가듯이, 가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한국동난의 과거를 망각하고, 맥아더의 동상을 끌어내려 파괴하려는 자들의 전성시대를 이루고 있다. 즉 좌파세상이 된 것이다.
누가 한국사회에 좌파 세상을 만들었나? 물론, 북한정권의 대남공작과 북한정권의 하수인들인 종북정치인들이다. 좌파들이 일으킨 ‘김일성의 난’을 교훈삼아 미래 미래로 선진국의 대열로 나가가야 할 싯점에 종북정치인들은 첫째, 국군 죽이기에 나서고, 둘째, 미군철수를 바라는 한미연합사해체를 공작하고, 셋째, 피땀흘려 이룩한 세계가 경탄하는 경제성장의 대한민국을 북한 세습독재자 김정일에 바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일부 못난 국민들은 여전히 좌파 종북 정치인들이 위장의 민주화 타령을 하면 몰표를 던져주고 있다. 대하민국이 망하는 것은 북핵이 아니다. 북핵을 가진 자들에게 대문을 활짝 열어 내응하는 좌파들 탓이다.
한국사회는 각성해야 한다. 일부 못난 국민들이 민주화 타령만 부르면, 좌익들을 대통령으로 선택하는 업보로 조만간 북핵으로 받을 수 있는 불행한 시절에 직면해 있다. 피땀흘려 이룩한 경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당하는 위기에 처해간다. 이제 한국사회의 정치는 붉게 물들어 희망이 없어 보인다. 좌파가 아니라도 좌파인척 해야 청와대, 국회, 각 지방단체장, 각 위원회 등에 취직할 수 있고 고액의 월급, 국록(國祿)을 받을 수 있는 개같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YS, DJ, 노무현, 종북 정치인들에 의해 한국정치는 '6,25 동난‘ 직전 때로 무섭게 역사회귀를 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정권과 국내 좌파들이 ‘6,25 동난’ 직전 국군 수뇌부를 향해 공작을 마치고 침략했듯이, 이번에는 김정일을 위해 또다시 공작이 있을 수 있다. 김일성은 원폭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한탄하며 패주했다. 그 아들 김정일은 아비의 유훈을 받들어 원폭을 만들었다. 언제 원폭이 한국에 투하될지 전전긍긍해야할 불행한 시기에 와 있다. 이때에 좌파들은 북핵의 홍보 전도사가 되어 한국사회를 공포에 빠지게 하고, 내응의 백기를 들게 하고 있다. 한국 문민정치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한국 희망의 마지막 보루는 애국장병들 뿐이다.
끝으로, 한국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유엔군, 특히 미군들, 전투에 언제나 선봉에 나섰든 애국 국군장병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한국전에서 산화한 국군을 포함한 모든 유엔군들의 호국 영령들은, 종북 정치인들이 조성하는 위기의 환란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가호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며, 국민의 대오각성을 거듭 촉구한다.◇
이 법 철(bubchul@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