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김익렬의 미스테리(1)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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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1-03-21 21:31 조회14,68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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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익렬 중령
2. 김익렬의 4.3
3. 김익렬의 난투극
4. 김익렬 난투극의 비밀
5. 김익렬의 기고(寄稿)와 유고(遺稿)
6. ‘4.28 평화회담’은 없었다.
7. ‘평화회담’이 아니라 ‘면담’이었다
8. 붉은 9연대
9. ‘평화’에 속은 대가(代價)
1. 김익렬 중령
4.3 발발 당시 제주 9연대 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중령은 4.3에서 제주인민해방군 사령관이었던 김달삼, 이덕구와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가 4.3에서 차지했던 역할의 중요성은 다른 두 사람과 더불어 4.3을 움직였던 삼두마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김익렬은 중요한 고비에서 4.3의 무대에 등장했고 주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4.3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4.3에서 그가 가고자 했던 방향은 어디였을까. 국방경비대 연대장으로서 4.3기간 동안 그가 보여줬던 행적에서 수수께끼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4.3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김익렬은 경남 하동 출신으로 일본 학병에 있다가 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했다. 47년 9월에는 9연대 부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했고, 그해 12월에는 중령으로 진급하며 연대장에 취임했다. 4개월 후에는 4.3의 발발을 ‘목격’해야 했으며 약 1개월 후인 5월 6일 김익렬은 직위해제 되었다.
김익렬은 1988년 12월에 사망했으며, ‘4.3의 진실’이라는 유고(遺稿)를 남겼다. 김익렬이 제주에 주재했던 기간은 약 9개월이었고 4.3을 겪었던 기간은 약 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 짧은 한 달 동안 김익렬은 폭동을 진압해야 할 위치에 있는 군(軍)의 지휘자였다. 그러나 그가 겪었던 4.3은 전투도 아니었고 체험도 아니었다. 단지 ‘목격(目擊)’이었다. 폭동의 한가운데에서 그 폭동을 다뤘던 진압 지휘관의 행동에 대해 누군가가 ‘목격’이라는 용어로 수식(修飾)했을 때, 그 수식어는 군인에게는, 더욱이 지휘관에게는 수치스러운 용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 단락은 김익렬의 수치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그가 단지 4.3을 ‘목격’만 했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김달삼 이덕구와 더불어 4.3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이유는, 그가 인민유격대 사령관이던 김달삼과 했었다고 하는 ‘4.28 평화회담’이라 불리는 선무(宣撫) 협상 때문이었다. 이 회담은 4.3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될 수 있는 길목이었다. 회담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회유냐 진압이냐의 기로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갈림길이기도 했다. 이 중요한 고비에서 4.3은 결국 유혈로 치달았다는 것에서 김익렬은 4.3의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가 후세의 남한 좌익들로부터 ‘평화주의자’라는 명예의 간판을 달게 되는 데에는 순전히 이 협상의 공로(?) 때문이었다. 그러나 4.3 당시에 그에게 평화주의자라는 간판을 달아줬던 그의 부하들은 김익렬의 후임으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을 한 달 만에 암살하였다. 김익렬은 유고에서 자기 부하들을 ‘군기는 엄격하고 일치단결되어 있는 장병’들이라고 자부했다. 그 부하들에게서 부하가 상관을 살해하는, 남로당 비밀 프락치가 군 장교를 암살하는 하극상 반란이 벌어졌다. 김익렬의 부하들은 공산주의로 일치단결되어 있었던 것일까. 박진경 연대장의 죄상(?)은 단 하나 열심히 폭동 진압에 나섰다는 이유뿐이었다.
그리고 선무 협상 후에 열렸던 최고수뇌회의에서 김익렬은 경무부장 조병옥과 난투극을 벌임으로서 역사의 무대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이 난투극을 끝으로 김익렬은 4.3의 무대에서 쫓겨났다. 김익렬은 왜 난투극을 벌여야만 했을까. 이 최고수뇌회의는 무력 진압의 길목으로 가는 작전을 선무 공작으로 유도할 수도 있었던 마지막 자리였다. 그가 정말로 평화주의자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려면 회유를 주장하는 선무 측 대표주자로서 진압 측 주자들을 따돌리며 이 난관을 돌파해야만 하는 임무가 있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김익렬은 여기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가 죽기 직전에 4.3의 유고를 남겨야만 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유고에서 그는 많은 말을 했다. 당시의 정세에서부터 4.3 발발 당일의 체험, 김달삼과 회담하는 세세한 장면, 조병옥과의 난투극 상황에까지, 김익렬의 유고는 원고지 400여 장 가까이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많은 것들 중에서도 불구하고 유고에서는 중요한 진실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최고수뇌회의의 중요한 자리에서 김익렬은 왜 조병옥과 난투극을 벌여야만 했던 것일까. 김익렬은 그 원인으로 조병옥의 발언을 꼽았다. 그 회의에서 조병옥은 김익렬을 향해 공산주의자로 공격하였고, 김익렬 부친까지 소련에서 교육받은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여기에서 김익렬은 발끈했고 감정을 폭발시켰다.
조병옥의 발언은 순전히 인신공격이었다. 회의석상의 첨예한 논리의 대립에서 이것은 김익렬의 방어를 무너뜨리기 위해 감정 격발을 유도하는 조병옥의 고의적 공격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김익렬이 과대포장으로 가공하거나 없는 말을 지어낸 거짓 표현일 수도 있었다. 진실은 무엇일까.
그 어떤 것이었던 간에 개인적 인신 공격에 김익렬의 이성이 무너져 버렸다면 화평책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김익렬의 어깨가 가벼웠고 역량이 모자랐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었거나, 아니면 김익렬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김익렬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의 ‘유고’는 과연 믿을 만 한 것인가라는 의문의 절벽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게 될 것이다.
김익렬의 유고는 역사의 이면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 같은 것을, 어쩌면 일반인들이 영원히 알지 못했을 역사의 내밀한 용틀임 같은 것들을 일반인들에게 펼쳐 보인다.
그러나 유고 속에서 많은 것들이 펼쳐졌을 때, 김익렬은 본의 아니게도 김익렬 자신이 숨기고 싶었던 내면까지도 밝은 햇빛 아래 펼쳐져, 유고를 읽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준엄한 역사의 심판대 위로도 올려져, 유고에서 김익렬의 비판을 받아야 했던 인물들처럼 김익렬 또한 냉엄한 역사의 비판 아래 서야 한다는 사실은 예감하지 못했던 것일까.
유고에서 보여주는 김익렬의 역사인식 수준은 얕았다. 흡사 ‘써프라이즈의 노빠들’처럼, 코드가 맞지 않는 정보들은 삭제해 버리면서 자기들이 보고 싶고 믿고 싶은 정보 속에서 오로지 만세만 불러대는 게시판의 깊은 우물 속, 김익렬은 비밀 남로당원이 되어버린 부하들이 물어다주는 편향된 정보만을 먹으며 9연대라는 우물 속에 갇혀 사는 개구리였다.
그렇게 한쪽 뇌만 키운 채로 김익렬은 4.3을 맞았고, 유고를 썼고, 자기가 죽은 후에 유고를 발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고의 책임에 대해서, 그 유고의 반론에 대한 답변의 의무에서 김익렬은 도피했다. 전투 중에 그 전투장에서 한 발짝 비켜서서 평화를 주장하는 군인만큼이나 이것은 비겁한 행동이다. 그가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자부했다면 그의 유고는 생전에 국민 앞에 나와야 했을 것이며, 그 발언에 대한 책임 앞에 떳떳이 서야 했을 것이다.
김익렬은 그 유고에 대한 반론에 대하여 필히 답변해야 할 이유가 많았다. 유고에 나타나는 그의 이념성이나 과장 같은 것은 그의 소신으로 치부하더라도, 그의 유고에는 너무나 많은 곳에서 왜곡(歪曲)과 침소봉대(針小棒大)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4.3에 대한 그의 발언 번복은 그의 유고 도처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그의 유고가 역사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 남겨졌다기보다는, 그의 개인적 감정을 위해서, 그 감정의 한풀이를 위해서, 그리고 그의 모호했던 행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남겨졌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에 주저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이런 결론은 다시 우리를 어디론 가로 인도한다. 우리가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 그곳은 비겁한 김익렬이라는 중간역을 지나서, 4.3 당시에 김익렬은 과연 누구를 위해 충성했는가라는 강력한 의문의 종착역이다. 김익렬,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었는가.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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