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김익렬의 미스테리 (3)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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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1-03-23 21:27 조회13,7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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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익렬 중령
2. 김익렬의 4.3
3. 김익렬의 난투극
4. 김익렬 난투극의 비밀
5. 김익렬의 기고(寄稿)와 유고(遺稿)
6. ‘4.28 평화회담’은 없었다.
7. ‘평화회담’이 아니라 ‘면담’이었다
8. 붉은 9연대
9. ‘평화’에 속은 대가(代價)
3. 김익렬의 난투극
김익렬과 김달삼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뒤, 미군정청장관 딘 장군은 현지에서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직접 제주로 들어왔다. 회의는 5월 5일 12시에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미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 딘 장군 전용통역관 김씨(목사출신) 등 9명이었다.
회의의 주제는 4.3의 진압에 대한 것이었고, 김익렬과 조병옥의 난투극은 이 때 열렸던 최고수뇌회의에서 벌어졌다.
이 회의에서 첫 번째로 발언하게 된 최천 경찰감찰청장은 4.3폭동은 국제공산주의자에 의한 사전에 조직 훈련‧계획된 폭동이며 군‧경 대병(大兵)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철저하게 토벌할 것을 주장하고, 이어 발언한 김익렬 연대장은 무력위압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건의하였다. 그러면서 김익렬은 직접적인 도화선은 밀무역자와 경찰 간의 마찰이라 주장한다. 폭동자 수가 증가된 것은 경찰이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한데서 기인된 것이며, 이 작전의 방해요소는 경찰의 기강문란이므로 전 제주도경찰을 자기의 지휘 하에 달라는 요구를 한다.
1948년 5월 5일 최고수뇌회의의 참석자들. 왼쪽 두번째부터 딘 장군, 통역관, 유해진 도지사, 맨스필드 중령,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경비대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중령,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김익렬이가 증거로 제출한 사진첩을 들여다보던 딘 장관은 흥분하여 사진첩을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던져주며 불쾌한 어조로 조병옥을 다그친다.
이 장면부터는 김익렬의 유고에서 묘사된 난투극 부분을 옮겨온다.
조 씨는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 등 증거물이 전부 허위조작된 것이며 (사실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가 작성한 것인데)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나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요”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닥쳐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딘 장군은 나를 제지하며 연설 방해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조병옥 씨는 계속해서 나를 가리키며 “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 자는 자기 부친의 교화를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의 지령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요”하면서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더구나 나의 부친은 내가 다섯 살 때 이미 작고한 분이었다).
딘 장군은 조병옥 씨가 나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깜짝 놀라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맨스필드 대령까지도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그냥 두었다가는 내가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힐 판이었다. 나는 격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에 뛰어올라 연설하는 조병옥 씨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나는 유도 3단이었다). 그러나 조 박사는 의외에도 힘이 장사였다. 당시 50세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단상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 조 박사는 숨을 못 쉬고 비명을 지른다. 최천 씨가 말리러 올라왔으나 나의 발길질에 급소를 차여서 그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딘 장군이 송호성 장군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 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하며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송 장군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채로 “이 놈 연대장! 누구에게 폭행을 하느냐. 네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하며 고함을 친다. 그러나 말릴 뜻은 없는 듯 입으로만 호령호령했다. 돌아가는 내용의 대강을 눈치챈 안재홍 민정장관은 “연대장! 손을 놓으시오. 폭행을 멈추시오. 외국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역시 소리만 지를 뿐 단상에 올라와 말릴 뜻은 없었다. 유해진 지사가 단상에 올라와 나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였으나 노령이라 역부족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덤볐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딘 장군은 싸움은 말리지 않고 떠들고만 있는 안재홍 씨와 송호성 장군이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냐고 통역관 김씨를 옆으로 불러 물었다. 그런데 이 자의 통역이 또 괴변이다. 그 경황 중에도 내가 단상에서 듣자니 이 자는 딘 장군에게 안재홍 씨와 송 장군이 연대장에게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다고 터무니없는 통역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화가 치밀 대로 치밀어서 두 손으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붙잡은 채 단하로 끌어 내리면서 김 통역관에게 발길질을 했다. 입을 걷어찬다는 것이 빗나가서 그만 그 자의 음부 급소를 걷어찼다.
김 통역관은 비명을 지르면서 마루 위에 나뒹군다. 놀란 딘 장군은 급히 회의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가더니 대기 경호 중이던 미군헌병을 불러들여 장내 질서를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수 명의 MP가 달려들더니 그 중 2명의 MP가 양쪽에서 나의 두 팔을 붙잡아 조 박사에게서 떼어놓고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번쩍 들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두 팔을 잡고 꼼짝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장내의 소란은 끝났다.1)
김익렬의 유고는 거짓과 오류로 얼룩져 있다.(이 부분에 관해서는 5편 '김익렬의 기고(寄稿)와 유고(遺稿)'에서 자세히 다룬다) 따라서 그의 유고에서 묘사되는 최고수뇌회의의 난투극 상황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판가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유고의 전체에 나타난 과장과 오류를 참작한다면 최소한 여기서도 김익렬은 자기변호를 위하여 어느 정도의 과장과 왜곡이 섞였을 거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좌익 측에서는 최고수뇌회의를 4.3의 갈림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강경파 조병옥과 온건파 김익렬이 진압과 선무를 놓고 벌이는 한판 승부로 보고 있는 것이다. 김익렬은 유고에서 자기를 ‘도민들을 구출하려던’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약에 김익렬의 주장대로라면, 그런 막중한 사명감에 비해 김익렬이 보여준 인내심은 경박한 것이었다.
김익렬은 최고수뇌회의에서 수뇌진을 설득하여 화평책을 주장하기는커녕 회의에서 화평책의 논리를 제시조차 하지도 못했다. 화평책의 장점을 부각시키기보다는 경찰의 진압책에 대한 비난 공격으로 일관함으로서 반격을 초래했다. 그리고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무너짐으로서 일거에 대사를 그르쳤다. 김익렬의 실수는 순간적인 것이었지만 좌익 측 주장대로 최고수뇌회의가 중요한 갈림길이었다면 김익렬의 실수가 4.3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김익렬의 실수는 최고수뇌회의 참석자들에게 화평책이라는 것에 혐오를 느끼고 했고, 화평책은 틀린 방법이란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무력진압으로 돌아서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동안의 협상공작은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그럼으로써 그 동안의 협상기간은 적에게 시간을 벌어준 이적행위가 되었다. 최고수뇌회의는 이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경비대가 진압 명령을 하달 받은 것은 4월 17일이었다. 최고수뇌회의에서 화평책이 틀린 방식이거나 김달삼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4.3폭동은 1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있었고 5.10선거는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인민해방군에게 주어졌던 휴전 동안의 시간적 여유는 다가오는 5.10선거에서 남로당의 선거반대의 토대 구축을 완성하게 해주는 영양제가 되었다. 5.10선거에서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2개의 무효 선거구를 배출하는 오명을 써야 했다. 휴전으로 비축된 인민해방군의 체력은 4.3폭동에 지구력을 부여했다. 이 지구력은 5.10선거 반대의 폭동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힘이 되었고, 4.3폭동을 김달삼 체제에서 이덕구 체제로 이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제주인민해방군 사령관 김달삼이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 차 8월 말 제주를 빠져나가버리자 이덕구가 2대 사령관에 올랐다. 그리고 9월 9일에는 북한에 인민공화국 정권이 들어섰다. 이때부터 4.3은 정확하게 반란(反亂)으로의 장정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반란의 얼굴을 한 4.3은 건국 대한민국의 암 덩어리로 자라나 48년 겨울의 강경진압으로 이어지면서 4.3은 다시 한 번 유혈(流血)의 얼굴을 띠게 된다.
4.3에서 제주인민해방군의 제1대 사령관이었던 김달삼 체제는 제주도에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거창한 목표보다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훼방을 놓는다는 목표가 주안점이었다. 이들의 무기는 열악했고 죽창이나 몽둥이 같은 원시적인 무기도 많았다. 그래서 5.10선거가 끝나고 얼마 후 김달삼이 월북하면서 4.3은 사그라지는 듯 했다. 4.3 첫날 일거에 파출소를 습격했던 것을 제외하면 김달삼 체제는 마을이나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사람들을 죽이는 폭도 수준이었다.
그러나 인민해방군 2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 체제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9연대로부터 반입된 무기와 인원으로 무장은 강력해졌고, 폭도 수준을 벗어나 이덕구 체제의 인민해방군 주력 부대는 토벌대를 포위해 기습 공격하고 제주읍을 급습해 도청을 방화하고 지서를 습격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2) 북조선의 성립은 이덕구 체제에 희망을 안겨주었다. 제주에서 조금만 버티면 북에서 밀고 내려올 것이라는 기대감과 그리하여 조선반도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신념은 이덕구 체제의 힘이었다.
김달삼 체제의 시기는 대한민국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김달삼 체제가 인민공화국을 위한 단순한 ‘대한민국 탄생 반대’였다면 이덕구 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현존하는 대한민국과의 전쟁을 불사하는 ‘북조선인민공화국 만세‘로 완전히 진화한 것이었다. 이덕구 체제는 태극기와 인공기의 대결이라는 쌍방 구조에서 정확하게 인공기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김달삼 체제가 ‘폭동’이었다면 이덕구 체제는 ‘반란’이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대한민국을 지지한 적이 없었던 .이덕구 체제로서는 4.3의 외형은 ‘반란’이었지만 내면은 대한민국과 북조선인민공화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戰爭)’이었다.
이덕구 체제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대한민국 현대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단초가 된다. 강력한 이덕구 체제의 진압에서 열세를 느꼈던 진압군은 여수 14연대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되고 제주로 떠날 준비를 하던 14연대는 반란을 일으켰다. 여순반란사건의 시작이었다. 여순반란사건은 경비대의 전국적인 연쇄적인 반란으로 이어지면서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의 울타리가 되는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6.25때 적화통일을 막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되는 국군에 대한 숙군(肅軍)을 불러왔다. 그리고 4.3을 비롯해 연속되는 좌익폭동은 북한을 고무시켰고 결국 6.25남침이라는 악마의 초대장을 보내게 된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흔들었던 일련의 역사적 물굽이는 4.3의 이덕구 체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이덕구 체제를 잉태하고 키웠던 어머니가 바로 미스테리한 행적의 김익렬이었다. 선무공작을 한방에 무위로 돌려버리는 경박한 난투극, 그리고 김익렬의 ‘진압 태업(怠業)’은 김달삼과 이덕구의 세대 교체를 축원하는 주문서였다.
중국 북경에서 나비의 날개 짓에서 일어난 작은 바람이 미국 텍사스에서 토네이도를 만드는 나비효과처럼, 김익렬의 진압 태업은 산들바람으로 시작했지만 역사의 물고랑을 넘어설 때마다 바람이 거세지고 풍랑이 높아지면서 전쟁과 유혈이라는 폭풍으로 성장했다.
애초에 싹수가 노랬을 때 일찍이 4.3은 뿌리를 뽑아야 했다. 김익렬의 죄과는 호미로 치울 일을 가래로도 못 치우게 일을 키운 것이었다. 4.3에 대해서 평생의 긴 시간 동안 사색을 했다면 김익렬은 진압이 늦춰진 것으로 인해 발생했던 문제점들을 목도했을 것이고, 인지했을 것이다. 김익렬은 이것에 대한 참회나 반성을 유고에서 언급해야 했다. 그러나 김익렬은 이 문제에 대해서 말이 없었다. 어쩌면 김익렬의 유고는 이런 책임을 통감한 것에서 출발했기에 자기변명과 거짓말로 얼룩진 것은 아니었을까.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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