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전두환에 원한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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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1-07 19:29 조회21,53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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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위를 붉은 집단으로 매도할 때는 언제이고!
2010.1.7.오후 6시경 조선닷컴은 과거사위(진실화해위)의 발표 내용을 극적인 표현으로 선전해 주고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장악을 위한 목적으로 언론탄압을 자행한 사실, 권총을 휴대한 채 언론사 사주들에게 포기각서를 요구한 사실이 문건을 통해 재차 확인됐다는 내용이다. 과거사위의 발표 내용을 마치 연합뉴스-조선일보가 직접 확인한 것처럼 표현돼 있다. 무슨 문건들의 어떤 내용을 직접 확인했는지는 없다. 그냥 과거사위의 발표내용을 받아 쓴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는 그동안 과거사 위의 구성이 좌익 투성이였고, 과거사위의 결정들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들을 써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에는 과거사위의 발표가 모두 진실한 것이라고 확인됐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장악을 위한 목적으로 언론탄압을 자행한 사실”이 문서로 확인됐다고 했고, 이를 전두환이 속속 알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이 내용 역시 조선일보가 직접 확인했다는 것인가?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수시기록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과거사위의 발표내용이 진실이라고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내용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한 목적으로 언론탄압을 자행한 실상이 관련 문건으로 재차 확인됐다.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한 목적으로 언론탄압을 자행한 실상이 관련 문건으로 재차 확인됐다.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
• 진실화해위 "전두환, 정권장악 위해 언론통폐합"
재확인된 전두환 신군부 언론탄압 실태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한 목적으로 언론탄압을 자행한 실상이 관련 문건으로 재차 확인됐다.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
진실화해위 "전두환, 정권장악 위해 언론통폐합"
진실화해위 “공익성 확보 명분 언론 통폐합”
“비판적 인사 명단 언론사에 보내 강제해직”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한 목적으로 언론탄압을 자행한 실상이 관련 문건으로 재차 확인됐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7일 언론사 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 사건 조사를 위해 관련 기록 4만5천여 쪽과 29개 언론사로부터 4천여 쪽의 서면 답변, 증빙 자료를 검토한 결과 신군부의 언론탄압 실태를 일부 공개했다. 보안사는 또 ‘계엄’이라는 비상상황을 이용해 언론사 사주들을 소환해 포기각서를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보안사 소속 군인들은 권총 등을 휴대해 사주들에게 위압을 가했다.
언론사 대표가 없으면 권한도 없는 총무부장 등에게 대리로 각서를 작성케 했고 각서 제출 거부 시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 회유하는 등 공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기도 했다. 당시 신군부는 방송의 공익성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언론사 수뇌진을 교체하면서 DBS(동아방송), TBC(동양방송), 대구한국FM, 전일방송, 서해방송을 KBS로 통합했다. CBS에 대해서는 보도ㆍ광고 기능을 정지시켰다. 지방지 통폐합 과정에서는 적법한 절차를 무시하고 언론사와 개인재산을 환수, 기부채납토록 했다. 진실화해위는 “전두환씨가 보안사령관부터 대통령까지 자리가 바뀔 때마다 (언론 통폐합과 관련한) 보고를 받은 게 확인됐고 이해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 강제해직 언론인 일부는 삼청교육대 입소 = 신군부는 해직된 언론인 중 30여 명을 삼청교육대에 3주 정도 입소시켰다. 해직 이후에는 취업을 제한해 생존권을 위협했다. 진실화해위가 1천500명 정도가 강제 해직당한 것으로 파악한 가운데 해직된 언론인은 취업이 불허된 상태에서 부조리ㆍ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돼 가정파탄과 생계곤란, 불명예 등의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아울러 언론인 해직은 표면적으로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의 자율결의라는 형식을 갖췄지만, 실제는 보안사가 신군부에 비판적인 인사를 선정해 명단을 작성, 이를 언론사에 전달해 해직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군부는 또 정기간행물 172종의 등록을 취소시킨 것에 대해 외설ㆍ부조리하고 사회불안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정기간행물을 정화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 자료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등록이 취소된 정기간행물은 외설ㆍ부조리하다는 불명예와 함께 재산상 손해도 입게 됐다.
김준곤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언론 통폐합 과정에서 사용된 공권력의 구체적인 모습, 구체적인 피해내용을 피해자 진술로 정리했다”면서 “이번 진실규명을 통해 국민의 권리인 언론을 국가권력이 인위적으로 재편하고 권력에 반대하는 언론인을 해직시키는 것은 더는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교훈적으로 증명한다”고 말했다. =============
진실화해위 "전두환, 정권장악 위해 언론통폐합"연합뉴스
입력 : 2010.01.07 15:43
“국가는 피해자에 사과하고 적절한 조치 취하라” 권고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제5공화국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언론통폐합 사건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7일 밝혔다. 언론통폐합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1980년 11월 ‘언론창달계획’ 아래 언론통폐합을 단행해 전국 64개 언론사를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합했고 이 과정에서 언론인 1천명 이상이 해직조치를 당했다는 게 주 내용이다.
이영조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이날 오후 중구 진실화해위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80년 1월경 전두환 보안사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부가 집권하는 방안을 검토한 데 이어 3월경 집권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언론을 조정ㆍ통제하는 내용의 계획을 세웠다”고 밝혔다.
또 인권위 조사 결과 언론인 해직ㆍ정기간행물 폐간, 언론사 통폐합을 단행한 신군부의 조치는 법적 근거도 없고 법절차와 요건에 따라 처리한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언론이 강제해직에 대해서는 신군부가 체제에 순응하는 언론구조를 만들려고 정보기관의 자료와 보안사 요원들의 동향자료를 바탕으로 언론계 저항세력을 30%로 규정하고서 이들을 해직하도록 언론사에 강요했다고 진실화해위는 설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러한 결론을 토대로 “국가는 공권력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책임을 인정하고 관련 피해자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를 내렸다. 또 “이 사건의 신청인들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2007년 11월 1980년 당시 언론인 해직사건과 국제신문 강제폐간 등 언론통폐합과 관련한 6건을 직권조사키로 하고 그동안 관련기록 4만 5천여 쪽을 입수해 검토ㆍ분석했으며 29개 언론사에서 4천 쪽 분량의 서면 답변과 증빙자료를 제출받아 검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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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수사자료에서 확인한 사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판검사들은 신군부가 집권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일환으로 K-공작을 통해 언론을 통폐합했다고 몰아쳐 왔다. 필자의 자료조사에 의하면 이는 인민재판이다. 신군부에는 집권 시나리오가 없었고, 언론작전이라는 보안사의 K-공작이라는 것은 5공의 배신자 권정달이 전두환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혼자 주도 한 것이었다.
저 하나 살자고 거짓말 꾸며 5공을 팔아넘긴 배신자 권정달
권정달은 5공을 창출해낸 핵심멤버였지만 역사바로세우기의 소용돌이를 맞아 돌연 자세를 바꿈으로서 역사의 동지들을 배신했고, 배신한 대가로 사법처리를 면제받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그를 배신자로 불렀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이른바 신군부세력을 얽어 넣은 포승줄은 비상계엄전국확대-국회해산-국보위설치-언론대책방안(K-공작)이었다.
권정달을 묶어야 했을 이 포승줄이 엉뚱하게도 신군부 인사들을 묶는데 사용됐다. 이 네 가지의 이른바 시국수습방안들은 모두 권정달이 직접 책임지고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권정달 대령은 보안가 정보처장이었고, 정보처는 시국수습 임무를 전담했던 주무 부서였다. 위 네 가지 시국수습방안들은 권정달이 직접 창안했고, 권정달이 직접 보고했다. 그가 보고를 했다면 결재서류에는 그의 서명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권정달은 검찰신문에서 자기는 바지 처장이었을 뿐이고, 사실상 이를 창안하고 실천한 사람들은 당시 실세였던 사관학교 후배들과 선배들이었다고 진술했다. 자기 이름으로 서명돼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보안사 실세였던 허화평, 이학봉, 허삼수, 정도영 그리고 이른바 신군부세력인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노태우가 수시로 모여 기획한 것이고, 이는 완벽한 정권찬탈 시나리오였다고 진술한 것이다. 그의 이 진술은 신군부를 유죄로 몰아넣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판결문에는 권정달의 진술내용들이 일사천리로 반영됐다.
그의 처신은 그가 진술한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육사출신 장군으로서의 도리와 체신을 저버린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서명의 의미가 무엇인가?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남이 제의했던 자기가 창안했던 일단 대령이 주무처장으로서 결재서류에 서명을 했으면 서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장교의 기본이요 도덕률이다. 더구나 허화평과 허삼수는 육사 17기, 이학봉은 18기 그리고 권정달은 육사 15기다. 선배가 바로 이웃 후배들을 배신하여 그가 책임져야 할 내용을 뒤집어씌운 대가로 자기는 빠져나갔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육사의 비극이요 장군세계에 대한 불명예라고 생각한다.
그의 성품에도 문제가 있다하겠지만 그런 보기 흉한 모습을 연출해낸 검찰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이 도마 위에 올린 핵심쟁점은 분명 권정달의 작품이다. 그런데 권정달은 그 작품을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가지고 권정달의 이름만 사용한 것이라 진술했다. 검찰은 그의 진술을 바탕으로 하여 그 다른 사람들을 유죄로 몰아갔고, 권정달은 기소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놓고 세인들은 검찰과 권정달 사이에 뒷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들 했다. 이런 의혹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승복력에 결정적인 흠으로 남게 할 것이다.
1996년 4월 22일 1심 제5회 공판정에 전두환이 장장 6시간 정도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검사 김상희는 전두환에게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제대로 된 국민이라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야말로 추악한 신문들을 했다. 국가원수에 대한 명예와 국가에 대한 엄중한 존엄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땅바닥에 놓고 발로 짓밟은 것이다.
김상희 검사: 최근 일부에서는 최규하 대통령의 대통령직 사임에 관련해서 피고인이 최대통령에게 세 차례에 걸쳐 175억원을 주었다는 주장이 대두됐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그러한 돈을 준 사실이 있습니까?
전두환: 주고 안 주고 간에 그것은 최대통령에 대한 모독이고 본인에 대한 모독이고 또한 이것은 우리 국민들에 대한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대한민국 대통령을 돈을 주고 살 수도 있고, 돈을 받고 팔 수도 있고, 이런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나라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검찰이 확실한 증거를 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국민들의 수치감을 해소시킬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노가다 공사판보다 더 난잡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김상희 검사: 그러니까 175억원을 준 사실이 없다 이런 말씀이지요?
전두환: 물론이지요.
김상희: 피고인은 혹시 조명작전이라는 말을 들은 사실이 있습니까?
전두환: 오늘 처음 듣습니다.
김상희: 최규하 대통령에게 돈을 건네주고 그 일부의 돈에 대해서는 최광수 비서실장이 작성해준 영수증까지 받았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있는데 혹시 그런 소문이나 주장을 들은 사실이 있습니까?
전두환: 글쎄 그 증거를 제시해 주어야 되지 않느냐 이겁니다.
검사: 그런 사실이 없다는 것이지요?
전두환: 있을 수가 없지요.
검사: 그러면 액수는 불문하고 어떤 형태로든지 최규하 대통령에게 하야 위로금 명복으로 돈을 건네 준 사실은 있나요?
전두환: 없습니다.
이양우 변호인: 재판장님, 지금 검찰은 우리나라 역대 국가원수에 대한 중대한 모독을 하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대통령직 인수인계를 둘러싸고 돈을 주고받고, 그것이 특히나 대통령의 인계에 연관된 돈의 수수다, 이것이 과연 증거도 없이 이 공개된 법정에서 국가기관인 검찰이 얘기할 수 있는 것인지 검찰이 이런 질의를 하는 저의를 명백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비단 피고인에 대한 모독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에 대한 모독입니다.
재판장 김영일, 변호인에게: 언성을 낮추십시오. 너무 언성이 높습니다.
재판장 김희상 검사에게: 첫 번 질문에 175억 원을 준 사실이 있는가를 물었을 때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무슨 기억을 더듬어 가지고 해야 될 그런 문제도 아니니까 거기서 질문과 답변은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이상은 질문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바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질적 수준 그리고 난잡 성이 웅변적으로 배어있다고 생각한다.
검찰에서 한 권정달의 진술내용(거짓 증언으로 동지를 팔아넘긴 진술)
당시 보안사 핵심 5인방으로 불렸던 권정달은 1996년 1월 4일, 삼정호텔 1110호에서 검찰과 마주하여 그의 동지들을 배신하는 진술을 했다. 250장에 이르는 그의 진술내용 중에서 핵심만 요약한다.
1) 1980년 2월에 구성한 언론대책반의 반장은 이상재 준위였는데 그는 나의 직속 부하였지만 보안사 인사처장인 허삼수가 추천했고, 모든 사항은 나에게 보고하기 전에 허삼수, 허화평, 이학봉, 정도영에게 먼저 했다. 그가 “K-공작계획을 수립한 것에 대해서도 내가 보고를 받았고, 전두환에게도 내가 보고한 것이 사실이지만 입안과 시행과정에서 나는 껍데기였고 모두 다 보안사 핵심인물들이 주도했다
2) K-공작을 시행한 목적은 전두환 등 핵심세력이 반대여론을 무마하고 언론을 조종, 통제, 회유하려는 데 있었다. 여야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구태의연한 정치작태로 부각시키고, 최규하 대통령에 대해서는 무력한 허수아비요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부각하여 여론을 조작했다.
3)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탐낸 것은 전두환이 사회적 인물들을 많이 만나는데 필요한 격려금 등의 거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정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예산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4) 시국수습방안을 작성한 주무부서장은 나였다. 1980년5월초, 전두환으로부터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해 보라는 지시를 받고 내가 지휘하는 정보처 산하에 4-5명으로 구성된 정세분석반을 활용하여 문안작성 작업을 시작했다.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후 2-3일간 보안사 핵심들(허화평, 허삼수, 정도영, 이학봉)과 함께 비서실장실 허화평의 조그만 회의실에서 비상계엄전국확대, 국회해산, 국보위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시국수습방안 초안을 완성했고, 허화평과 허삼수는 내각이 매우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내각을 강력히 조종 통제하기 위해서는 국보위가 필요하다고 제의했다. 또한 군부가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지역계엄보다는 전국계엄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5) 신군부는 국회가 계엄해제를 의결할 것이 겁이 나서 국회해산과 정치인 연행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했다.
6)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초안은 보안사핵심참모 5명이 작성했고, 신군부 핵심세력(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등)이 수시로 만나 긴밀히 협의했다. 이들을 부른 사람은 허화평 비서실장이었다. 이들은 수습방안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시국수습방안은 수립단계부터 전두환 등 신군부가 전면에 나서서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형식상으로는 내가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하는 실무자 역할을 담당하긴 했지만 실질은 신군부가 주도한 것이었다.
7) 5월17일 밤, 비상계엄전국확대를 심의할 때, 중앙청 현관에서 회의장까지 1m간격으로 병사들을 배치함으로써, 국문위원들은 찬성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군부가 두려워 찬성했을 것으로 본다.
8) 당시는 비상계엄해제, 전두환 퇴진을 원하는 국민적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다. 시국수습방안을 실천하게 되면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발과 저항이 예상됐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은 시국수습방안의 수립 및 준비 단계에서부터 무자비한 진압을 계획하고 있었다.“과감히 타격하라, 끝까지 추격 검거하라, 분할 점령하라”는 공수부대들의 시위진압 지침을 전제로 하여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이다.
법 정 공 방
권정달은 5공세력에 대한 이른바 배신자의 모습으로 1996년 7월 22일 1심 제23회 공판정에 증인으로 나왔다. 권정달은 자유의 몸으로 증언대에 섰고, 그와 함께 5공을 주도했던 동지들은 수의를 입고 있었다.
변호인 김현무(유학성을 위한 변호인): 증인이 시국수습방안을 만들어 보안사 참모 5명과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등 이른바 신군부 핵심세력과 함께 토의한 날자가 5월 4일 전후라고 했지요?
증인(권정달): 예
문: 군의 관례나 예의상 4성장군들을, 전두환 사령관이 부른 것도 아니고 대령에 불과한 허화평이 부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요?
답: 당시 상황은 계급이나 관례를 가지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서실장인 허화평이 상의할 게 있다고 오라 하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호인 정영일(황영시 변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변을 당했고, 통치권이 확립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학생시위와 노사분규가 끊이지 않아 비상계엄은 물계엄이다 종이호랑이다 하는 식으로 비하됐고, 5월에 들어서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폭력의 규모나 양상이 위기를 실감케 했고, 구호도 정치구호로 변질되었고, 북한의 동향도 심상치 않은 상태에서 최규하 정부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다 내각역시 소극적인 역할만 수행해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정국을 장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나요?
증인(권정달): 예
문: 보안사의 시국관도 이러했나요?
답: 예, 그렇습니다.
문: 증인이 작성한 시국수습방안은 바로 이에 대한 대책방안이며, 이를 최대통령에게 건의하였지요?
답: 예
문: 국가적 위기를 맞아 국가보위를 책임지는 보안사가 나름대로의 대책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답: 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더구나 전두환 피고인은 보안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겸임을 하고 있었기에 국가적 난국에 대해 나름대로 무슨 대책을 내놓아야 마땅한 것 아닌가요?
답: 시국을 수습해야 할 입장에 있었습니다.
문: 증인은 보안사에 얼마나 근무했나요?
답: 20여년 될 것입니다.
문: 그래서 아실 터인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도 시국이 어려울 때마다 보안사가 나름대로의 시국수습대책을 연구해 가지고 대통령에 건의하지 않았나요?
답: 그랬습니다.
문: 증인이 만든 시국수습방안도 바로 이런 차원의 일이 아니었나요?
답: 예
문: 결론적으로 시국수습방안을 만들 때는 몰랐는데 시국수습을 해나가다 보니까 결과론적으로 전두환 피고인이 집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말인가요?
답: 예
문: 그렇다면 시국수습방안은 만들 당시 집권계획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는 것인가요?
답: 꼭 집권하겠다고 만든 것은 아닙니다.
문: 전두환 피고인이 증인에게 시국수습방안을 만들어 보라 지시할 때 구체적인 내용까지 지시했나요?
답: 아닙니다.
문: 그러면 구체적인 내용은 증인의 주도 하에 만든 것이군요?
답: 예
문: 시국수습방안에 따라 실제로 국회가 해산이 됐나요?
답: 국회는 해산되지 않았습니다.
답: 아까 증언하시기를 시국수습방안은 집권계획도 아니고 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서 실시한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내란의 마스터플랜이라는 것인가요?
검사 김상희: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법리해석이나 의견에 대한 신문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 검찰은 증인이 만든 시국수습방안을 내란의 마스터플랜으로 보고 있는데 증인은 어떻게 보시나요?
답: 제가 답변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검찰 기소대로라면 시국수습방안이 내란의 마스터플랜이라 한다면 중인의 주장대로 5월 4일 여러 분들을 모아놓고 증인이 브리핑한 것은 내란의 공모요 모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안을 만들고 브리핑 한 증인이야 말로 핵심중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증인은 기소저차 안 되어 있고, 반대로 그날 브리핑을 받은 사람들만 구속되어 내란의 공범으로 재판받고 있는데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답: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변호인 김순갑: 보안사의 핵심부서는 정보처, 대공처, 보안처이지요?
증인: 예
문: 인사처, 군수처 등은 지원부서이지요?
답: 예
문: 증인은 정보처장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정보를 수집 분석하여 시국수습을 위한 대안을 만드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지요?
답: 예
문: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특별히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정보처의 업무소관이 아닌가요?
답: 예
문: 증인은 국보위 내무분과위원으로 임명되었었지요?
답: 예
문: 임명되긴 했지만 고유의 업무가 너무 많다보니 내무분과위원으로서의 임무는 거의 수행하지 못했지요?
답: 예, 나가지 못했습니다.
피고인 허화평: 이런 자리에서 증인을 만나 질문하게 된 것을 서글프게 생각합니다. 증인께서는 10.26 이후에 보안사를 떠날 때까지 당시 전두환 사령관을 중심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국난극복에 동참한 데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계실 줄로 압니다. 인정하시나요?
권정달: 예
문: 그 당시 증인은 정보처장으로 그리고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의 직책을 가지고 언론통폐합이라는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정보처장을 그만 둔 다음에는 예편을 해서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민정당을 창당하고 11대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루에 냈습니다. 그 공으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민정당 초대 사무총장이 되어 5공의 정당성을 주장했었지요?
답: 예
문: 시국수습방안이라는 말은 검찰에서 처음 들어본 이야기입니다만 여튼 수습방안을 연구해보라는 지시는 증인 혼자 사령관실에 불려가 지시를 받은 것인가요?
답: 예. 사령관님이 말씀하시기를 사태가 어지러우니까 이를 수습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보라 하셨습니다.
문: 증인이 혼자 가서 지시를 받은 것이 맞지요?
답: 예
문: 보안사 정보처는 정보업무의 주무처입니다. 오랜 경험과 훈련을 쌓은 전문가들이 있고, 자체 존안자료가 방대하고, 중정이나 경찰로부터 자료를 얼마든지 입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료들을 가지고 전문요원들이 아이디어를 내서 대책안을 만들어 가지고 증인이 직접 사령관님께 보고한 것이 아닌가요?
답: 시국수습방안에 담긴 세 가지 문제는 실무적인 차원의 관계관들이 모여서 회합을 하는 방법으로 논의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국비상계엄 같은 것은 다른 관계기관에게 노출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문: 그래서 묻겠습니다. 아까 이 자리에 계신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 차규헌 피고인 등 당시 중요한 위치에 계신 분들을 모아놓고 사령관의 허락도 없이 비밀이 보장돼야만 하는 그런 문제를 이야기 했다는 것은 비밀보장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요?
답: 허화평 의원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그 때에는 사령관님이 꼭 소집을 해서가 아니라 서로 통하는 입장이어서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문: 결국 보안사 안에서 증인이 책임지고 있는 업무를 이웃에 있는 핵심참모들과 논의해서 사령관에게 보고를 했다 이런 얘기이군요?
답: 그렇습니다.
문: 책임을 회피하자는 말인가요?
답: 무슨 책임 회피입니까?
문: 검찰공소장에 의하면 증인이 보안사 핵심참모인 이학봉 , 허화평, 정도영, 허삼수 그리고 증인 이렇게 다섯 사람이 비서실 대기실에서 2-3일간 모여가지고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만들어 사령관에 보고했다고 되어 있는 데 그게 사실입니까?
답: 사실입니다.
문: 그러면 사령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을 때 다섯 사람이 공동으로 연구해서 가져오라 이렇게 지시받았나요?
답: 지시를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다섯 사람은 언제나 의논하고 특히 비서실장과는 사령관실에 들어가기 전과 후에 늘 의논을 했습니다.
문: 10.26사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정승화씨와 같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 관련돼 있었습니다. 그 수사를 보안사 대공처 수사국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 중요한 일에 증인은 참여한 일이 있나요?
답: 참여한 일 없습니다.
문: 그러면 거기에 보안처장이 참여했었나요?
답: 수사사항과 일반적 정책입안은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문: 12.12사건은 모든 참모들이 매달려 있었던 사항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건은 대공처 수사국이 아무도 모르게 비밀을 지키면서 처리했습니다. 하물며 국회를 해산한다, 비상기구를 만든다, 전국비상계엄을 선포한다, 정치인을 잡아가둔다 이런 사항들은 일반적인 사항이 아니고 고도의 정보적 감각을 가진 사람만의 사항들입니다. 이런 극도의 비밀을 요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과 의논을 하고, 보안사 전체가 매달렸던 12.12사건에 대해서는 정보처장이 참여를 하지 않았다? 모순된 말이 아닌가요? 보안사 업무는 차단의 원칙에 의해 수행됩니다. 자기 업무는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이 생명 같은 원칙입니다. 그런데 유독 증인께서만 증인이 해놓고도 ‘나 혼자 한 일’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 했다?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답: 그것은 논리의 비약입니다. 분명히 다섯 사람이 상의해서 했습니다.
문: 비서실장실은 그야말로 남대문 시장입니다. 증인은 저보다 2년 선배입니다. 보안처장은 1년 선배입니다. 정말 그런 중요한 업무를 함께 기획했다면 찾아오는 사람들로 와글거리는 비서실이 아니라 넓고 조용하고 보안이 유지되는 증인의 사무실이나 보안처장의 사무실에 가서 해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요?
답: 그것은 말씀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비서실장이 어떻게 자리를 비우고 다른 사무실에 갑니까?
문: 그러면 제가 선배장교들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답: 그건 아닙니다만 당시 비서실장은 통제형 참모의 역할을 한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 고위장성분들을 모아놓고 설명을 했다 이거지요?
답: 예
문: 그 분들을 누가 집합을 시킨 것입니까? 사령관 지시도 없었다, 비서실장이 했는지는 모르겠다, 증인도 안 했다 그러면 유령이 집합을 시켰나요?
답: 모임이 형성돼 있었고, 누군가가 저더러 나가서 설명을 하라 해서 설명을 했는데 저는 그 주도를 허화평 실장이 한 것이 아니겠느냐 생각한다고 검찰에 진술한 것입니다.
문: 제가 어째서 정보처장의 일을 위해 고위장성들을 소집해 줍니까?
답: 그 때 상황은 지금의 정상적인 상황과 다릅니다.
문: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런 모임은 없었습니다. 증인은 검찰에 5번 불려가 조사를 받았지요?
답: 예, 밤을 샐 때도 있었습니다.
문: 5차례의 검찰 조사를 통해 증인은 줄곧 사령관실 옆에 있는 접견실에서 그 모임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오전에 다시 생각해보니까 안가였다고 했습니다. 모임의 장소가 안가 맞습니까?
답: 안가가 맞습니다.
문: 브리핑을 할 때 차트도 들고 나갔고,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는 등의 세부 사실들은 기억을 하시면서 그보다 훨씬 기억이 잘 돼야 할 모임의 장소는 어째서 기억이 흐린가요?
답: 기억이 안 난다 한 적이 없습니다.
문: 증인은 많은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 당시 중정의 안가는 증거보존지역이라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전두환 사령관께서는 그 끔찍하고 재수 없는 안가는 쳐다보기도 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령관님은 조선일보사 뒤에 있는 정동 안가를 사용하셨습니다. 또한 궁정동 안가는 중앙정보부 재산이라 보안사가 사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안가 역시 증거본존지역으로 접근이 금지돼 있었습니다.
답: 아닙니다. 시해장소인 안가와 시해장소 옆에 있는 김재규가 사무실로 쓰던 안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문: 증인은 전두환 대통령을 받들어서 모든 임무를 불평 없이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고, 5.18특별법에 따라 수사가 시작될 당시 증인은 국회의원 출마를 앞두고 자세를 바꾼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역사 앞에 부끄럼 없는 일했다는 자부심에 대해 언젠가는 말씀해 주실 것으로 믿겠습니다. 증인께서 전역을 하시고 창당작업을 이종찬 당시 중앙정보부 총무국장과 함께 추진하신 것은 사실이지요?
답: 사실입니다.
문: 중간보고, 결과보고 모두 증인이 책임을 지고 했지요?
답: 보고를 했습니다.
문: 창당 작업은 성북동에 있는 보안사 안가에서 했지요?
답: 예
문: 거기에 제가 가본 적이 있나요?
답: 거기에 어떻게 오겠습니까?
문: 그런데 증인은 무슨 근거로 정당의 조직책 선정을 허화평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이 주도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나요?
답: 꼭 주관을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비서실장 보좌관실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이고 거기에서 하나씩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 장소를 제공한 것은 제가 했습니다만 창당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증인이 주도했고, 그 결과 민정당 사무총장까지 한 것이 아닙니까? 창당을 주도한 사람은 뒤로 빠지고 비서실장의 임무에 따라 장소를 마련해준 사람이 창당을 주도했다는 것은 이상한 주장이 아닌가요?
답: 주도라기보다는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피고인 유학성: 오늘 권정달의원과 이렇게 대하고 보니 기구한 운명에 처한 우리가 더욱 슬퍼집니다. 우선 권정달 의원이 안동에서 당선된 것을 축하합니다. 80년5월4일, 중앙정보부 안가에 군사령관, 참모차장, 육사교장,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 등을 일개 대령이 보안사령관의 하락도 없이 집합시킬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증인 권정달: 소집이 아니라 좀 오셨으면 좋겠다 하는 건의 형식으로 모이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문: 5.4는 일요일, 5.5는 어린이 날이었습니다. 나는 용인에서 3군사령관을 했습니다. 지휘관이 자기 지역을 뜰 때에는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얻어야 합니다. 나는 5월3,4,5일 어간에 서울에 간 일도 없지만 안가가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국수습방안이라는 것은 구속되기 하루 전에 검찰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검찰에서 저는 권정달 의원과 대질시켜달라 했지만 검찰은 안 해주었습니다.
답: 저는 형님과 함께 황영시, 차규헌 장군님 세 분이 참석하신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습니다.
문: 3군사령과, 참모차장, 육사교장 등의 고위 장성이 모여 있으면 당연히 보안사령관이 나와야지요. 그런데 대령이 이런 고위 장성들을 불러 의견을 모아가지고 그 결과를 보안사령관한테 보고를 한다? 이건 참으로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답: 저는 모임이 있었고 보고를 드렸다고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피고인 정호용: 증인은 수습방안을 마련해서 대통령에게 좋은 건의를 올려야 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지, 무슨 내란이다 또는 집권이다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것 아닙니까?
증인 권정달: 초기에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문: 권 증인은 검찰에 이것이 집권 시나리오다, 또는 이것이 내란음모다 이런 증언을 하셨나요?
답: 그런 일 없습니다.
문: 증인은 대체방안이라든지 창당이라든지 헌법개정이라든지 등등 여러 가지를 주도적으로 해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나하고 긴밀하게 의논을 한 적이 있나요?
답: 별로 기억이 없습니다.
문: 시국을 타개하기 위해 증인은 보안사령관의 브레인 역할을 했기에 여기에 당연히 우리와 함께 기소되어 있어야 할 사람으로 압니다. 그런데 증인은 증인이 책임지고 한 일에 대해 구차한 방법으로 여러 사람들을 끌어들여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게 내 솔직한 생각입니다. 5.4일 경에 회동을 했다는 증인의 주장에 대해 관련자들 모두가 모인 사실이 없다하고, 비서실장도 연락한 바 없다고 하는데, 유독 증인 혼자서만 분명한 사실이라고 합니다. 인격모독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증인은 증인이 책임지고 했던 일을 모두 남이 했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 여기 계시는 분들께서는 당시 군 최고 지휘관들로서 군복을 입고 계셨으며 저 혼자만 군복을 벗고 창당을 주도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제가 어디에 앉아 있느냐(기소가 되었느냐, 안되었느냐)는 검찰과 재판부가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피고인 허삼수: 당시 선배인 증인이 후배들과 동격의 참모를 하시면서 인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은 것이 있었습니까?
증인 권정달: 답변 드리기 거북하지만 조금 그런 감이 있었습니다.
문: 정보처에서 처리하신 제반 사항은 결과적으로 정보처장의 책임이지요?
답: 정보처가 한 것은 정보처장의 책임이겠지요.
그 후 권정달은 국회의원 신분이 되어 1996년10월24일 제2심 제5회 공판정에 증인으로 불려나왔다.
변호인 이양우: 증인은 12.12사건 당시 보안사에 나와 26사단 포병사령과 이경희 대령, 수도기계화사단의 포병사령관 김도수 대령, 제2훈련소장 이필조 소장 등에 전화를 걸어 병력출동을 말려달라고 권유한 사실이 있지요?
권정달: 예
문: 그것은 보안사령관이 시켜서 한 일인가요?
답: 지시에 의해 한 것은 아닙니다.
문: 증인이 판단해서 한 것인가요?
답: 부대 간의 충돌이 있으면 안 되겠다 생각해서 스스로 한 것입니다.
문: 병력출동의 자제를 부탁하신 것은 군사반란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요?
답: 유혈극을 막아보자는 생각에서 한 일입니다.
문: 당시 증인은 정승화의 행동이 의혹을 살만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시니요?
답: 참모총장으로서 문제가 많이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 5.17에 대해 묻겠습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보안사는 정보처 산하에 언론반을 두고 계엄사의 언론검열 업무를 지원합니다. 이는 3공화국시절부터 죽 해오던 관행이 아니었나요?
답: 협조를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문: 그러면 언론반은 1980년에 처음 새로 만든 것이 아니고 비상계엄이 선포될 때마다 만드는 것이지요?
답: 정보처 2과에는 언론반이라는 게 원래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상재 반장이 와서 언론반이 더 강화됐다는 것입니다.
문: 신설한 것이 아니라 보강한 것이라 이 말입니까?
답: 예
문: 증인은 1995.5.23의 검찰조사에서는 “언론반을 보강한 것은 시국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보도검열을 강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수사가 다시 진행되자 1996.1.14.의 검찰조사 시에는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전두환 피고인이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한 것”이라고 진술을 바꾸었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가요?
답: 사실을 사실대로 펴놓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문: 전두환 피고인께서 증인에게 군부의 개혁에 반대하는 언론계의 동향을 제거하고 정국주도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나요?
답: 그런 지시는 없었습니다.
문: 이상재씨는 증인으로부터 명령을 받을 때 언론계 중진을 만나 안보중심의 시국관을 설명해주고 보도성향을 안정 위주로 유도하라는 지침을 받았다고 진술했는데요?
답: 시국이 안정되는 방향으로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문: 이상재가 작성한 이른바 K-공작계획은 이상재가 독자적으로 만든 것인가요, 아니면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한 것인가요.
답: 사령관님은 모르시고 그가 작성해가지고 제게 가져와서 보고했습니다.
문: K-공작 계획이라는 것은 이상재가 언론반장에 취임해 가지고 언론반의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업무계획에 불과하다고 하던데 맞는가요?
답: 사실입니다.
문: 증인은 이 K-공작계획서를 사령관에게 보고했나요?
답: 기억에 없습니다.
문: 증인은 전두환 피고인이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에게 중앙정부부장서리를 하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라고 진술한 사실이 있나요?
답: 기억이 안 납니다.
문: 증인은 대통령이 전두환 피고인을 중앙정부부장서리에 임명한 경위도 모르고 전두환 피고인이 총리를 만난 사실도 모르면서 어떻게 해서 전두환 피고인이 대통령과 총리를 찾아가서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해달라고 자청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답: 그건 제가 모르는 일입니다.
문: 그럼 조서가 잘못되어 있는 것인가요?
답: 중앙정보부장서리 임명에 대해서는 제가 모른다고 진술한 것으로 압니다.
문: 증인은 당일 조서에서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취임한 것은 돈이 필요하였고, 부총리급인 서리직을 겸직함으로써 각료급 대책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라고 진술했습니다. 이는 전두환 피고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인가요?
답: 제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권정달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
아래는 “월간 인물과 사상” 2004년 5월호에 실린 내용이다.
한국자유총연맹을 기억하는가? 1954년 결성된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을 모태로 박정희 시절 한국반공연맹을 거쳐 89년2월 창립된 한국자유총연맹은 말할 나위 없이 반공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자유총연맹은 반공이라는 두툼한 외투를 벗어던지고‘햇볕정책’의 적극 지지자로 돌아서더니, 최근에는 평화운동 사업과 빈곤퇴치 등 각종 시민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마디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변신인데, 이 중심에 2000년에 이어 2004년에도 연맹의 총재로 재선된 권정달이 있다.
193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권정달은 육사 15기로 79년 부마항쟁 당시 부산지구 보안부대장을 지냈으며, 이후 보안사 정보처장을 지냈다. 그는 12.12 당시 쿠데타 세력의 중추를 구성했던 하나회 출신이 아니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핵심 참모그룹에 합류해 신군부의 실세로 활동했다. 96년 김영삼 정부가 야심차게 시도했던‘역사바로세우기’과정에서 검찰에 출두한 그는, 자신이 전두환 집권에 공을 세운 보안사 간부 가운데 이학봉에 이어 두 번째 공신이었다고 증언했는데, 실제로 신군부의 정권 찬탈 과정에서 그의 활약은 빼어났다. 80년 5월 최규하가 중동 순방에 나선 와중에 계엄의 전국확대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설치 등을 담은 국내외 정세를 분석한 ‘극비보고서’와 ‘5ㆍ17 시국수습방안’ 등을 작성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는 국보위 내무분과위원장과 입법의회 의원 등을 거쳐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고 민정당 창당 작업을 주도했다. 그리고 민정당 초대 사무총장까지 지낼 만큼 5공 초창기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러다 82년 예기치 않게 터진, 단군 이래 최대의 금융사기 사건이라는 장영자ㆍ이철희 사건의 파편을 맞아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난 후, 85년에는 남북국회 수석대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런 그도 88년 노태우의 ‘전두환과의 차별화’ 과정에서 권력 핵심에서 밀려나 88년 13대 총선에서는 공천조차 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민정당 창당의 일등 공신으로 자신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정당에서 공천조차 받지 못하자 그가 심한 배신감을 느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위원으로 국제정치 등을 공부한 후, 14대 총선(1992)에서 재기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6공화국과 갈등을 빚으면서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1995년 5.18 특별법 제정으로 신군부의 12.12 쿠데타가 사법부의 도마 위에 오르면서 권정달이라는 이름 석 자는 세인들의 입길에 자주 올랐다. 당시 그는 검찰 수사에 대단히 협조적으로 나왔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5.17 시국수습방안과 국보위 설치 등에 관한 증언은 전두환의 정권 찬탈 음모의 구체적 전개과정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로 쓰였다. 전향적인 협조 때문이었을까? 그는 전두환과 노태우는 물론이고 장세동을 비롯한 신군부의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가운데서도 불기소 처분을 받아 옥살이를 면했다. 이 무렵 전두환이 느낀 배신감은 대단히 컸다고 하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꼴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96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이 해 12월 신한국당에 입당했던 그는 국민의정부 시절인 99년9월 새정치국민회의로 당적을 변경했다. 그가 반DJ 정서가 강한 대구경북 출신인데다 80년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한 신군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까닭에 그의 당적 변경은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물론 그의 당적 변경은 지역감정 해소라는 명분을 앞세운 김대중 정부의 동진정책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렇지만 정권이 무려 4차례나 바뀌는 동안 큰 탈 없이 권력 자기장 안에서 보신하며 권력의 양지만 쫓았던 그에게 ‘권력의 달인’이요 ‘처세의 달인’이란 달갑지 않은 비판이 따라붙는 것을 면할 순 없었다.
2000년 12월26일, 그는 권노갑의 지원을 받아 양순직의 뒤를 이어 한국자유총연맹의 8대 총재로 선출됐다. 이후, 그는 반공과 이념 위주였던 자유총연맹의 고유한 색깔을 탈색하며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나서는 것은 물론이고, 비록 조건부였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개정돼야 할 것”이라며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입장을 취하고 나서, 반공정신으로 똘똘 뭉친 과거의 동지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자유총연맹의 변신은 남북화해 시대에 발맞춘 것이기도 했지만‘재정 위기’에서 비롯된 측면도 컸다. 97년까지 매년 정부로부터 27억 원 가량을 지원받았던 자유총연맹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이 끊겨 재정난에 허덕였다. 그러니까 반공과 이념 대신 자유와 인권, 민주와 평화 등을 표방하며 평화운동 사업과 빈곤퇴치, 자원봉사활동 등 각종 시민운동을 단체의 존립을 위한 출구로 삼은 것이다. 자유총연맹은 2002년 7월 23일, 유엔경제사회이사회가 부여하는 NGO 회원 자격을 획득하기도 했다. 자유총연맹은 2002년 11월 2일, 재정난을 해소하고 안정적인 수익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전력의 자회사로 한 해 순익이 무려 80억 원에 이르는 알짜 기업으로 알려진 한전산업개발을 인수했는데, 재밌는 것은 이 과정에서 과거 이념적 형제였던 한나라당과 적잖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 구조적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없는 이유
1983년 김영삼은 민주화의 화신이 되었고, 그의 인기는 90% 이상으로 치솟았다. 신바람이 난 김영삼은 민주화 세력에 영합하기 위해 “12.12는 쿠데타적 사건이나 역사적 평가는 후대에 맡긴다”는 말을 했다. 이에 따라 정동념 패와 정승화 패들이 고소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통령의 말에 따라 검찰은 1995년 7월 18일에 “12.12는 군사반란이지만 성공한 쿠데타이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는 수사결과를 냈다.
그런데 여기에 이변이 생겼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이 노태우 비자금을 폭로했다. 이에 제발이 저린 김대중이 "나는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정치 고수였다. 이 말로 공은 김영삼에게로 안전하게 넘어갔다. 탄압받는 김대중에게 20억이 갔다면 김영삼에겐 얼마나 큰 돈이 갔겠는가? 여론의 칼날이 김영삼에게 집중됐다. 다급한 나머지 정치 9단이라는 김영삼은 국면전환을 위해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넣으라고 했다. 국민의 관심이 김영삼에서 두 전직 대통령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일단 감옥에 넣은 다음부터 판검사들은 두 전직 대통령들에게 무조건 죄를 씌워야만 하는 짐을 지게 됐다. 유죄를 예단하고 잡아 넣은 것이다.
합리적으로는 죄를 씌울 방법이 없었다. 그리서 온갖 억지가 판결에 동원된 것이다. 없는 죄를 새로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소급입법을 금지한 헌법'을 유린하는 특별법이 제정됐고, 재판과정에서 온갖 무리수가 동원됐다. 판결문에 나타난 대부분의 주요 범죄사실들은 증거도 없고 증언도 없이 작성됐다. 관심법 재판과 인민재판으로 조작된 것이다. 그래서 지나던 소가 웃을 만한 코미디 판시들이 즐비하게 널려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코미디 판사들을 설득력 있게 정리해야 할 것이다.
예비역 장군들까지도 "이미 재판에서 땅땅 친 것인데 다시 문제삼아 어쩌자는 거야?" 이런 말들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재판이 얼마나 엉터리로 이루어 졌는지, 그 코믹한 부분들을 부각해야 할 것이다. 법절차 상으로 보나 수사기록에 나타난 사실들을 보나 필자는 1980년의 판결은 옳은 것이고, 1997년의 판결은 그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0.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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