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하늘도 알고 땅도 안다(배병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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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6 22:22 조회26,6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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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휴 선생님께서 운영하시고 직접 글을 쓰시는 경제풍월, 11월호가 막 나왔습니다. 1만부 이상의 엘리트들에게 읽히는 책입니다. 이번 11월호 266-271 쪽에는 ‘화려한 사기극 5.18’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배병휴 선생님께서는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 널리 읽혀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메모해 가면서 정독을 하시어 아래와 같이 지극 정성을 다하여 이 책을 소개하셨습니다. 1만 명 이상의 구독자들이 이 글을 읽으면 여론도 그만큼 확산될 것입니다. 이하 배병휴 선생님의 글입니다. 사진은 생략하였습니다.
북 특수부대 5.18 참가
하늘이 알고 땅도 안다
탈북자 15인 증언... 북에선 알려진 사실
‘5.18 공화국 영웅’과 내연녀 양심고백도
자유북한군인연합 발행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속에 15명의 증언이 나와있다. 북에서 직간접으로 체험한 북한 특수부대의 실체와 광주사태에 참가한 ‘공화국 영웅’들의 주변에서 들은 내용들이다. 증언자들은 어려운 고비를 거쳐 탈북하여 남한으로 귀환했지만 5.18사태에 “북한 특수부대가 참가했다는 사실을 증언해도 남한 사람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지적한다.
‘5.18 공화국 영웅’과의 내연관계
함남 금야군 고등중 교사 출신의 여 탈북자는 양심과 소신으로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마저 고백하며 특수부대의 만행을 소상히 기록했다. 어느 날 오빠가 “군당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라며 한쪽다리가 의족(義足)인 군당 대학모집과장(안창식)을 소개하여 꿈에 그리던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 졸업할 수 있었다. 증언자는 학부에서 최고의 영어실력으로 졸업, 3대 혁명소조로 활동하다 6년 만에 다시 안을 만나 동거하다 임신했다. 안은 15년이나 연상인 유부남이었지만 증언자는 은혜에 보답하는 정성에서 24세 처녀성을 바쳤다.
그러나 사생활이 들통나 불명예로 귀향하여 이웃 시골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며 둘째아이도 출산했다. 그 남자가 바로 5.18에 참가한 특수부대원으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안이었다. 안창식은 13세때, 1966년 국가보위부 첩보훈련소에 응모하여 어느 무인도에서 11년간 특수훈련을 받았다. 코 큰 미국인과 일본인, 남조선 출신으로 부터도 교육 받고 1977년 함남 덕성군 534 특수부대 타격대장(대위)으로 배치됐다.
북한은 1968년 1.21 청와대 습격기도가 실패한 후 124군 부대를 해산하고 70년대 들어 함남 덕성에 비밀부대를 창설하고 평북 정주에도 최정예 당원사단을 설치했다. 안창식의 타격대는 1979년 10.26사태 후 긴급 ‘폭풍명령’으로 신포시 앞 마양도 기지로 이동하여 11명이 잠수정에 올랐다. 밤낮 3일간 바다 밑으로 항해하여 전라도 해역에 이르러 “당과 수령과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자폭서에 서명하고 하선했다. 목포 해안가에는 사전에 파견된 공작원 7명이 안내를 위해 마중나와 있었다.
부마사태 참가자와 함께 광주침투
안내조 7명은 부마(釜馬)사태에도 참가했던 전력이 있었다. 그들은 안창식 팀의 임무수행을 위해 먼저 무기를 확보해야 한다면서 소조로 분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3월로 예정된 폭동계획의 연기지령이 내려왔다. 1980년 4월의 사북(舍北)사태 등이 조기진압됐기 때문이다. 예정된 지휘부 사무실에 가니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와 주체철학 서적 등이 비치되어 있고 남조선에서 자본주의로 생활한 자들이 김일성을 숭배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남조선 청년들과 호남사람들의 반 전두환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잠수함조 11명과 현지 공작원 7명 등 18명은 목포를 거점으로 광주사태가 끝날 때까지 수시로 북과 교신하고 지령을 받으며 암약했다. 아지트에 2명이 남아있고 나머지는 소조로 분산, 광주시에 침투하여 또 다른 북의 특수부대를 만나도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그들이 침투한 후 광주시는 비무장 시위가 무장폭동으로 격상되고 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잔인한 난도질이 벌어져 치안부재 상태를 이루었다. 교도소 습격과정에 한명이 복부 관통상을 입어 시위대가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 부상대원이 누워있는 침대 앞에서 30대 남조선 여자가 카메라로 촬영하다 안창식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표정이 굳어졌다.
안창식이 대원들에게 “저 여자를 추적하여 카메라를 회수하고 처치하여 시신을 소각하라” 지시했다. 그녀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훈련 받은 대로 잔인하게 죽여버렸다, 아마도 그녀는 망월동 묘역에 신원 미상자의 한명으로 잠들고 있을런지 모른다. 안창식도 교전 중 무릎아래 관통상을 입어 대원 14명과 함께 동해안으로 이동, 북의 잠수정 편으로 철수했다. 11명 가운데 1명 사망, 4명 부상, 부마항쟁 참가팀 7명 가운데 3명이 행방불명되어 나중에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남조선을 내 집처럼 드나들어’
함북 무산군 도시건설사업소에 근무하던 제대군인 증언자는 2003년 2월 탈북, 중국서 2년간 도피생활하다 2005년 가을 남한으로 입국했다. 북에서 전가족이 3일간 굶어 특수부대 출신 친구와 함께 농장 탈곡장을 습격했다가 보위지도원에게 발각되어 그를 목 비틀어 죽이고 탈북했다. 중국 흑룡강성에서 2년 8개월간 숨어 지내다가 한족과 싸움판을 벌여 친구는 공안에 체포되어 북으로 압송되어 공개처형되고 증언자는 남으로 살아왔다.
증언자는 1982년 7월 공병국 산하 27건설여단에서 인민무력부 지하갱도 확장공사를 끝낸후 자강도 전천군 고인구 산골 미사일기지 공사장으로 가다가 5.18 공화국 영웅을 만났다. 기차속에서 소대원들과 영웅간 언쟁이 벌어진 사건이 확대되어 대대장 인솔하에 영웅의 집으로 보복차 찾아갔다가 21명이 사망하고 공화국 영웅도 도끼에 피살되는 참사로 발전했다.
결국 사건이 평양까지 보고되어 ‘선글라스 여인’이 직승기(헬리콥터)를 타고와 주모자들을 처형하고 대대를 해산하여 증언자도 불명예제대,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사죄하는 심정으로 죽은 영웅의 집을 방문하여 무덤에 절하고 묘비를 읽어보니 “공화국 2중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18 남조선 광주인민학살을 비롯하여 살아생전에 당과 수령 및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에 헌신하다 애석하게 전사했다”고 적혀 있었다.
증언자 일행이 고인의 노모에게 사죄했더니 장롱속에서 공책 1권을 내보이며 “죽은 아들 생각이 간절하니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깨알처럼 자필로 쓴 고인의 자서전은 어느 무인도에서의 특수훈련 15년과 남조선 공작 내용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남조선 국군포로의 인민군 편입, 대남첩보 훈련과 남파 및 공작대상 인물 등이 적혀 있었으며 ‘남조선을 내집처럼 드나들며’라는 대목도 있었다. 공작대상 인물편에는 친북성향의 문익환 목사도 올라 있었다.
광주봉기 영웅묘지 똑똑히 봤다
북한 항공사령부 소속 여성 고사포 중대장 출신은 사생결단으로 탈북하여 충청도에서 택시기사와 결혼했다. 남편은 조선족 여성과 결혼했었지만 아내가 몰래 도망하여 홀아비로 살고 있었다. 증언자는 남편과 함께 2006년 12월, 자유북한군인연합의 5.18관련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북한 7군단 10사 경보병부대 중대 정치지도원 최중현, 사회안전성 특수기동대 대위 김융화, 인민군 협주단 중위 김영순씨 등이 발표하고 임천용 회장이 5.18의 처참한 사진들을 공개했다.
증언자는 북에 있을때 총 정치국으로부터 정치교육자료로 광주 관련자료들을 받아 읽었기에 ‘북에서 듣고 알고 있던 사실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이날 기자회견은 노무현 정권이 여론화를 차단시켜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증언자는 2008년 12월 주일예배 후 목사님이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양심선언 관련 인터넷 프린트를 보여주어 양심상 가만히 있을수 없다고 생각했다.
증언자는 북에 있을때인 1968년, ‘박정희를 까러갔다가 죽은 영웅묘지’와 1980년 ‘광주봉기때 죽은 영웅 묘지’를 눈으로 똑똑히 봤다. 5.18당시 북한 공군사령부 산하 갈마 공군비행장에 미그 19, 21기의 특별정비와 비상출격대기 명령이 내렸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명령서 요지는 ①준 전시상태 돌입 ②저격, 경보병 여단은 남조선 후방 교란, 제2전선 작전준비 ③전투비행단은 선제 타격 ④해군 전투함대는 육상부대의 남조선 침투 보장 ⑤노동 적위대, 붉은 청년 근위대는 예비 전대연습 등이다.
그 뒤 1981년 6월, 인민군 총정치국 선전부를 담당한 증언자의 아버지가 방문하여 5.·18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특수부대원 딸인 채영희 교환수를 눈물로 위로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증언자는 결론적으로 5.18은 전두환 신군부가 아닌 김정일이 공작, 조작한 사건이라고 강력 주장한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
함남 함흥시 2.8 비날론 연합기업소 사무원으로 근무했던 증언자는 2008년 10월 교회에서 이종윤 목사의 5.18관련 설교를 들었다. 이때 5.18관련 단체들이 ‘사과하라’고 항의 시위하자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목사님이 뭘 잘못했느냐”고 반박했다. 남조선 진압군은 M16으로 무장했는데 북의 특수군은 카빈 소총으로 민간인을 사살했고 장갑차를 탈취하여 진압군을 깔아뭉개어 5.18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특수부대원이 62명에 달한다.
증언자는 5.18에 참가했다 철수한 후 탈북하여 남한에 정착한 50대 인사가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씨가 피살된 사건을 보고 두려워 말 못하고 있지만 망월동 묘지의 신원 미상자들이 누구이겠는가 반문하더라고 전해준다. 증언자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을 밝힌 박행운 씨는 북한과 중국 국경세관에 근무했던 하사관 출신으로 자강도 강계 제1사범대 시절 5.18 영웅 이야기에 도취했었다. 영웅칭호 받은 특수부대원이 “광주에서 신호가 오면 전쟁하려 준비하고 있었지만 전두환 군부가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말하더라고 증언했다.
그는 남조선 침투 루트는 해상, 육상 등에 정교하게 조성되어 5.18전에 미리 다수가 남파되어 공작했으며 “장갑차 탈취와 무기고 습격은 61저격여단(대대장 이봉원) 등 우리가 한일”이라고 자랑하더라고 했다. 이봉원 대대장은 이 공로로 김일성의 ‘공화국 영웅’칭호 뿐만아니라 ‘일당백’ 칭호도 받고 태천 군관학교장으로 승진했다.
증언자는 5.18에 참가하여 최악명을 날린 부대는 534부대와 신천 복수여단이라고 밝히고 북에서 본 ‘심리전의 내막’ 영화에 따르면 남한 국군의 정신 취약성과 민주체제의 부작용이 뚜렷했다고 지적했다. 증언자는 1.21 청와대 기습,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등이 일반에게는 극비이나 북에서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며 5.18사태에 북한 특수부대가 참가한 것은 “산천초목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남한 ‘화려한 휴가’ 대한민국 조롱
북에서 공장 지배인으로 근무했던 70대 증언자는 경북 경주가 고향이나 일제시에 중국 길림성으로 이주하여 휴전직후 인민군으로 편입됐다. 증언자는 휴전후 어수선할 때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특수정찰 임무를 수행하다 군관학교 추천으로 인민무력부 정찰국 산하 집단군 특수정찰중대 해외파견대장, 3타격여단 정찰부장으로 근무하다 갱도건설 사고와 관련 제대했다.
제대할 때 ‘비밀엄수 서약’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공장 지배인으로 근무하면서 북한 TV로 5.18를 지켜봤다. 증언자는 북한체제에 철저하게 세뇌 받았지만 남한 내부에서 북한을 칭송하는 소리를 들으면 가련하게 여겨지더라고 했다. 또 “남한 곳곳에 북한의 비수가 꽂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5.18은 김정일과 DJ의 사건으로 신군부가 진압하지 않았다면 어찌 됐겠느냐고 반문했다.
북한 서해안 방어부대 중위로 근무한 증언자는 14년간 군복무 경험을 자세히 밝히며 5.18은 김정일의 공작이라고 단언한다. 함북 청진시에서 군인의 아내로 살았던 30대 주부는 2007년 남한으로 들어와 5.18사태에 일본등 해외의 북한 첩보조직이 주도면밀하게 개입했다고 증언했다. 조선작가동맹 소속 탈북자는 북한의 ‘님을 향한 교향시’는 5.18를 조작, 고발한 영화, 남한의 ‘화려한 휴가’는 대한민국을 조롱한 영화라고 지적했다.
이밖에도 증언록에는 김형직 사범대 학생, 3.13공장 지배인, 북한 농촌관리위 부위원장, 남포시 농촌경영위 지도원, 러시아 벌목공 출신 등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5.18 복면부대 정체 뭘까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는 마지막 대목에 ‘5.18 복면부대의 정체’ (김영택 동아일보 광주 주재 기자의 취재수첩)를 실었다. 계엄군이 철수하고 도청이 학생들 수중에 들어간 ‘광주 공화국’에 의문이 있다. 5월21일부터 등장한 복면한 자들이 과연 순수한 시위대일까. 학생들은 복면할 필요가 없다. 계엄군이나 경찰에 얼굴이 찍히는 것을 학생 시위대들은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복면한 자들은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차량으로 질주하며 수습대책위 회의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학생수습위 김종배 부위원장이 무기반납을 주장하자 안된다고 거부한 강경파도 복면한 자들이니 행여 그들이 불순세력은 아닐까. 기자는 복면부대가 날뛰면서 시위가 과격정치집회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를 규명해야만 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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