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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9,11연대의 공비토벌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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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5-11 16:13 조회16,4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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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연대 작전(1948.5.15-7.23)

                                                         


4월 4일, 경비대사령부는 수원에서 11연대를 새로 급하게 창설했다. 하지만 병력 모집이 어려워 연대본부와 1개 대대의 창설에 불과했다. 5월 6일, 김익렬 9연대 연대장이 김달삼과 벌인 의혹스러운 행위와 그 전날인 5월 5일 조병옥을 향해 휘두른 폭행으로 인해 극적으로 파면되고, 박진경이 새로 부임했다. 5월 15일, 국방경비대사령부는 11연대 본부 및 예하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이동시킴과 동시에 5연대(부산) 및 9연대(제주)로부터 1개 대대씩을 차출하여 11연대에 배속했다.


박진경 중령은 제주도 출신들로 구성됐던 9연대 연대본부를 해체하고, 경기도 출신들로 구성된 11연대 본부와  제주출신 1개 대대, 경기도 출신 1개 대대 그리고 부산 출신 1개 대대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박진경은 5월 6일 부임한 이래 공비와 주민을 분리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선무공작에 주력했다. 하지만 공비들이 이에 순응할 리 없었다. 따라서 11연대 작전은 적극적인 공비소탕으로 전환됐다. 김익렬의 행동에 불만을 가졌던 미군정 당국은 박진경 중령의 적극적인 지휘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6월 1일부로 그를 대령으로 진급시켰다.


공비두목 김달삼은 11연대가 김익렬이 이끄는 9연대와는 달리 적극적인 소탕작전을 펴자 문상길에게 박진경 연대장을 살해하도록 지령했다. 이에 문상길은 기회를 엿보다가 6월 18일, 연대장이 대령으로 진급한 데 따른 축하연이 있던 날 밤중에 그의 부하들을 시켜 살해했다. 이는 미군정당국에는 물론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지만 곧 한 하사관의 제보로 문상길 등 하사관 일당이 일망타진 되었다. 손선호 하사를 비롯하여 모두 8명의 하사관이 관련됐다.


이 때 오일균 소령은 그의 부하인 문상길 등이 박진경 연대장 살해범이었다는 데 대한 책임을 지고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전보됐다. 제주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인원은 대부분 공비를 따라 입산했다가 하산한 피란민이었으며 수용소장은 이들을 심사하여 분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오일균은 무고한 사람은 빨갱이로, 빨갱이들은 무고한 사람으로 분류했다. 죽어야 할 사람은 살리고, 살려야 할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오일균의 이러한 만행은 또 다른 제보에 인해 백일하에 드러났고, 그 일당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6월 21일, 박진경 대령의 뒤를 이어 최경록 중령이 11연대장에 부임됐다. 부연대장은 송요찬. 최중령은 주민과 공비를 분리하기 위해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했다. 공비 가족에게 사상적인 계몽을 실시하면서 재생의 길을 폭 넓게 열어주었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주민들이 조금씩 공비들과 분리되어 갔고, 물 잃은 고기 신세가 된 공비들은 점점 더 고립되어 산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부터 경찰주도의 작전은 국방경비대 주도의 작전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국경은 공비들의 주력이 위치한 내륙지역을, 경찰은 지원세력이 있는 해안지역 경비를 담당했다. 이렇게 되자 김달삼은 숨어서 장기전에 대비했고, 습격과 매복 활동은 중단됐다. 여기까지가 11연대 작전(5월 15일-7월 23일)이었다.

              

                         9연대 작전(1948.7.23-12.29) 


국방경비대사령부(이형근 사령관)는 제11연대의 연대본부 및 1개 대대를 토벌작전 2개월 만에 다시 수원으로 복귀시켰다. 그리고 그 대신 9연대를 재편성하여 1948년 7월 24일부로 연대장에 송요찬 중령을, 부연대장에 서종철 대위를 보임했다. 9연대는 제주도 색깔로 이루어진 9연대가 아니라 부산출신 1개 대대(5연대)와 대구출신 1개 대대(6연대) 그리고 제주 출신 1개 대대로 구성된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제주도 출신 국경은 빨갱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5연대 소속의 1개 대대는 제주읍에, 6연대 소속의 1개 대대는 성산포에, 9연대 출신 1개 대대는 모슬포에 주둔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경무부에서는 제주도에 증원됐던 경찰병력 2,000여명을 7월 18일을 기해 원대복귀 시켰다. 경무부와 국경이 동시에 이와 같이 느슨한 방향으로 조치를 취한 것은 아마도 당시 제주도 사태가 소강국면에 들어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소강상태의 기간에 남로당에는 매우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8월 21-25에 해주에서 인민대표자회의가 열린 것이다. 여기에는 남조선에서 선출된 1,080명의 대표자들이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제주도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각 시군별로 7-8명의 대표자를 뽑는 ‘지하선거’가 실시되었다. 제주도에서는 김달삼을 포함하여 제주도 대표자들 5명이 8월 2일, 북촌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거쳐 해주로 잠입했다. 김달삼, 안세훈, 강규찬, 고진희, 김주탁(화북리)이 함께 간 것이다. 실제 해주에 모인 남조선대표자들은 1,002명이었고, 이 중에서 선출된 360명의 대의원 중 제주 출신이 6명이나 되었다.


김달삼은 해주연설로 극찬을 받았다. 김달삼의 해주 연설문에는 4.3사건의 본질이 녹아있다. 이 연설문은 6.25전쟁에서 UN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노획한 문서로 미국의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 RG242, 북한노획문서19, 제주도]로 분류돼 있었던 것인데 후에 대한민국이 복사해온 것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2년에 펴낸 ‘4.3사건토벌작전사’에 부록#4로 수록돼 있다. 분량은 A4지 8매에 해당한다.


이 연설은 박헌영에 대한 적극적 지지인사로 시작됐다. “박헌영 선생이 남조선인민대표자를 뽑는 선거에 대한 보고를 하였는데 이에 대해 감동했다”는 찬사로 시작된 것이다. 이어서 제주도 인민들이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실들을 보고하겠다고 했다.


“30만 제주도 전인민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북조선인민공화국의 깃발 아래 조국의 완전한 자주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두가 똘똘 뭉쳐 미제를 몰아내고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등이 이끄는 반동들을 처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찰이 얼마나 잔인하게 주민을 살해했는지에 대한 몇 개의 예를 들었지만 이는 늘 그렇듯이 공산당들의 모략이요 과장이었다. 이러한 과장과 모략은 5.18광주폭동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4.3인민항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미 제국주의의 직접 지휘로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야만적 테러와 학살 그리고 파괴.약탈 속에서 신음하여 오던 제주도 인민들에게, 미국인들과 그 주구들이 조국의 분단을 공고화하고 남조선을 완전히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단독 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인민들의 분노와 증오가 어찌 폭발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단호히 일어서자고 부르짖으면서 제주도 인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총 궐기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주도 4.3인민항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인이며 이것이 제주도 인민군 즉 ‘산사람’들이 생기게 된 원인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미국과 이승만 김성수 이범석 등이 이끄는 주구들이 북조선 깃발 아래 뭉치지 않고, 남조선을 분리하여 북조선과는 별도의 단독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애국적인 제주도 인민들이 이에 반대하여 자주통일을 열망하자 미군정이 제주도 주민들을 무자비하고 무차별하게 학살하고 탄압했고, 이에 항거하여 제주도 인민들 전체가 똘똘 뭉쳐 통일투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드디어 4월 3일 오전 2시를 기하여 인민군 즉 ‘산사람’들은 총 궐기했습니다. 이날 인민의 일부이며 반동의 거점인 지서 20개소를 일제히 습격하여 악질경관 10명과 11명의 테러단 서청원 그리고 악질 반동 등 10명이 인민국의 애국정신에 불타는 정의의 총칼 앞에 제거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까지 경관 100여명, 반동 400여 명이 숙청되었습니다”


1949년 6월 7일, 이덕구가 경찰에 의해 사살됐을 때 그의 직속부하인 '양생돌'의 주머니로부터 나온 극비 메모인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는 12개 지서로 되어 있지만 해주 연설에서는 20개 지서로 부풀려져 있고, 전과도 부풀려 있다. 그리고 애국 청년 혼자서 10명에 이르는 경관들을 거뜬히 해치웠다는 등 무용담들도 몇 개 나열했다.


“리종유, 김태옥 김봉희 등의 동무들이 적의 흉탄에 쓰러졌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에게 부탁한 말이 있습니다. ‘동무들을 믿고 나는 안심하고 죽는다. 인민공화국 만세!’ 모두가 이렇게 죽어갔습니다.”


“소년소녀들은 담배를 말아서 인민군에 보급하여, 또 수기 신호를 해서 적의 부락침입을 미연에 발견하여 알려주었고, 전투가 끝난 뒤 달려가서 적의 유기품들을 주워서 산에 보내고, 위문문을 써서 산으로 보내 인민군의 사기를 올려주었습니다. 부인들은 자진하여 산에 가서 인민군의 밥을 지어주며 쌀, 부식, 신발 등을 산으로 보냈습니다. 특히 여맹이 보내주는 위문품과 위문문은 산사람들의 유일한 오락이 되었습니다. 청년들은 모두가 자위대로써. . . ”


“이상과 같이 전 제주도 인민들의 적극적인 참가로써 전개된 제주도 투쟁은 드디어 5월 10일 남조선 단독선거를 완전히 실패케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 . 그러면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러한 승리를 가져오도록 하였겠습니까?”


“첫째로는 30만 제주도 전체 인민들이 불타는 조국애로써 강철같이 단결하여 미 제국주의와 그 주구 매국노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도배들의 남조선 분할 식민지 침략정책을 단호히 반대하고 조국통일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제주도 무장구국항쟁은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남조선 전체 인민들의 위대한 구국투쟁의 일환인 까닭입니다. 전국에서 투쟁이 있었기에 적들이 제주도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승리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민주조선 완전자주독립 만세!”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쓰탈린 대원수 만세!” 


좌파들은 4.3사건이 육지의 남로당과도 연결돼 있지 않았고, 소련과의 연결은 아예 없었으며, 오직 미제와 그 주구들과 청년단원들이 유독 제주도 주민을 업수이 여기고 탄압하였기에 자위수단으로 항거한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제주도 주민 전체가 미제를 몰아내고 김일성 체제로 통일하고 싶어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각이 다른 미제와 이승만의 주구들이 제주도 인민들의 한결같은 염원들을  탄압하는데서 일어선 ‘통일운동’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달삼의 해주 연설 내용을 보면 제주폭동은 소련과 연결돼 있고, 육지의 공산당 세력과 연결돼 있으며, 제주도만의 독립사건이 아니라 소련이 벌인 남조선 전체에 대한 적화통일 공작의 일환임을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남한에서는 7월 17일 헌법안을 공포했고, 7월 20일에는 초대대통령을 선출했으며,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건국행사를 치르는 등 국가적으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다.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인 안세훈, 김달삼을 포함한 주요 인물들이 제주도를 빠져 나간 후 공비들 역시 정비기간이 필요했고, 토벌을 맡은 9연대 역시 8월 한 달을 정비와 훈련 등으로 보낸 후 9월에 들어서면서 토벌작전을 수행했지만 공비에 대한 정보가 없이 토끼몰이 식으로 작전을 하다 보니 성과가 전혀 없었다. 특히 공비가족들은 물론 동조자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토벌대의 움직임을 탐지하여 이를 공비들에 연락해주고 있었기에 작전이 성공할 리 없었던 것이다. 


경험이 부족한 송요찬 연대장은 뒤늦게 깨달았다. “토벌작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비와 주민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는 농사짓는 주민들을 모두 하산시켜 피난민 수용소로 수용한 다음 계몽을 실시했다. 좌익분자들이 전향하면 그들 중 똑똑한 자들을 이용하여 동료 공비들에게 선무공작을 펴게 했다. 귀순한 공비들에게는 적극적인 생계대책과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이런 작전이 주효하여 9연대는 토벌작전에 중점을 두지 않고서도 수천 명의 하산 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축소-위축되어 가는 듯했던 공비들은 의외로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10월 1일, 소련혁명 기념일을 기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켜 경찰지서를 공격하고 전 도에 걸쳐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한 것이다. 이날 하루 동안 550여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깜짝 놀란 정부는 토벌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10월 11일부로 ‘제주도경비사’를 급조했다.


제주도경비사는 송요찬이 이끄는 9연대에 경찰 및 해군함정을 추가한 일종의 합동군이었고, 사령관에는 5여단 여단장이었던 김상겸 대령을 임명했다. 한편으로는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수에 있는 14연대 예하 1개 대대를 추가 투입하여 토벌작전을 전격적으로 강화하려 했다. 그런데 제주도로 떠나야 할 시각인 10월 19일 20:00시에 여수 주둔의 14연대는 반란군이 되고 말았다. 남로당 요원인 연대 인사계 지창수 등이 이른바 여수-순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여수 14연대는 김상겸 대령이 지휘하는 5여단 소속이었다. 따라서 김상겸 대령은  이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었고, 송요찬 중령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송요찬은 대대별로 지역을 할당해 주고 각 대대의 책임 하에 경비와 토벌임무를 수행케 했다. 하지만 국방경비대 내에 깊이 심어 놓은 남로당 세포조직들이 번번이 작전 정보를 공비에 누설하는 바람에 작전 성과를 내지 못했다. 더구나 공비들은 여순반란에 고무되어 더욱 적극적으로 준동했고, 이에 국방경비사령부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또 다른 14연대가 나타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해군과 합동으로 또 있을지 모르는 외부세력의 침투에 대비하여 해안봉쇄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제9연대는 엄청난 수확을 거뒀다. 연대장은 은밀히 일부 병력 즉 이근양 중위가 지휘하는 제5중대를 여-순 반란군으로 위장시켜 조천지구에 상륙시키는 작전을 계획했다. 분명히 이 위장된 반란군의 상륙을 환영하고 안내하는 공비들이 있을 것이라는 데 착안을 둔 계략이었다.


그런데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이미 연대 하사관 1명이 공비 측 세포에게 이 극비의 작전계획을 알려주는 것을 우연히 도청하게 되었다. 연대장은 교환수를 체포하여 세포조직 80명을 일거에 검거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위장된 반란군을 제주도에 상륙시키면 이를 환영하러 나가는 좌익세력이 분명 있을 것이고, 상륙장소에 좌익세력이 나타나면 이를 일망타진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 대신 우연하게 엿들은 통신첩보에 의해 8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세포조직을 일망타진한 것이다. 이는 국방경비대에 얼마나 많은 공산 세포들이 암약했는가에 대한 살 떨리는 증거인 것이다.   


80명이라는 세포를 잃은 남로당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이다. 이에 분노한 무장공비들은 1948년 11월이 되면서 만행과 습격을 가일층 강화했다. 강준만의 ‘현대사산책’과 정부부고서는 똑같이 이렇게 주장했다.


“1948년 11월 중순으로부터 1949년 3월까지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4.3사건 전개과정에서 가장 참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됐고,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글자 그대로 ‘초토화’됐다.”


그러나 당시 정부측 자료들에는 그 반대로 기록돼 있다.


“무장 공비들은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고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도주했으며, 토벌대를 유인하여 격멸하는 수법으로 많은 피해를 입혔다. 11월 2일에는 한림에 주둔하고 있던 제2대대 6중대가 공비로부터 습격을 받고 교전하던 중 이들의 유인에 빠져 14명이 전사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연대는 5중대를 출동시켜 공비의 집결지를 습격하여 100여명을 사살했다. 11월3일, 경찰토벌대가 중문면 아두운마루에서 공비와 접적하여 3명을 사살하고 8명의 피해를 입었다. 11월6-7일에는 공비들이 감히 서귀포를 모두 점령하려고 기도했지만 저지당했고, 11월 7일에는 남로당에 침투한 첩보요원의 제보로 남로당 지하조직 일부를 일망타진했다.”


제주도 공비들의 대담한 공세가 이어지자 정부는 11월 17일, 제주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데도 공비들의 만행은 계속됐다. 12월 28일에는 공비 100여명이 남원면 위미마을을 습격하여 월동을 위해 마련해둔 식량과 의류를 약탈한 뒤 마을 전체에 불을 질렀다. 이 급보를 접한 경찰토벌대는 그들을 추격하여 76명을 생포하고 7명을 사살했다. 이런 것을 놓고 정부보고서와 강준만은 무장대와 제주도 주민은 가만 있었는데 국가가 일방적으로 주민들과 마을들을 초토화했다고 모함하는 것이다. 


공비의 준동이 지속되자 육군본부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제주도 토박이 연대인 9연대를 대전으로 이동시키고, 대전에 있던 2연대를 제주도에 파견한 것이다. 이렇게 모두를 바꾸지 않고서는 9연대에 잠입해 있는 남로당 세포들을 발본색원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9연대에서 한번에 80명이나 되는 세포를 색출해 냈다는 것은 9연대에 더 많은 남로당 세포가 있을 수 있다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2011.5.1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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