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자료] 3.≪광주민주국≫의 출현 (예비역2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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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비역2 작성일10-02-02 01:04 조회17,07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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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분노 / 조선로동당출판사 편,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5.
3. ≪광주민주국≫의 출현
△ ≪총, 총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시내 중심거리에서만 벌어지던 시민들의 투쟁은 5월 19일에 들어와 광주시 전역에로 파급되였다.
5월 19일 오후 3시경이였다.
동명로와 산수3차로사이에서는 500여명의 군중과 ≪경찰기동중대≫사이에 일대접전이 시작되였다.
≪기동경찰대≫는 군중이 밀집된곳을 따라다니며 최루탄을 쏴대며 마구 탄압하였고 군중들은 그에 맞서서 투석전을 벌렸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두시간나마 격전을 벌리던 군중들은 드디여 ≪기동경찰대≫를 포위하고 마구 짓조겨댔다.
사면팔방에서 달려드는 군중의 기세에 눌리운 ≪기동경찰대≫는 골목골목으로 빠져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놈들이 도망친다! 붙잡아라!≫하고 다급히 소리지르며 골목길들을 봉쇄하였다.
끝내 27명의 ≪기동경찰대≫놈들이 봉기군중에게 붙잡혔다.
바로 이때 포위된 ≪기동경찰대≫를 빼내려고 ≪공정대≫놈들이 밀려왔다.
놈들은 군중들 앞에 밀려와 일렬로 진을 치고는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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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사격자세를 갖추었다. 그러는 가운데 ≪공정대≫장교 한놈이 뭐라고 소리치며 공포를 쏘았다.
삽시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러자 장교놈은 ≪해산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격하겠다≫고 을러메며 ≪공정대≫놈들을 향하여 ≪사격준비!≫하고 구령을 쳤다.
자칫하면 또 한차례의 피바다가 펼쳐질 위기일발의 직전이였다.
긴장한 침묵이 흐르는속에 ≪가만!≫하고 소리치며 봉기군중을 헤치고 나서는 한 청년이 있었다.
전남대학교 외국어대학 2학년생인 리동훈이였다.
동훈은 ≪공정대≫장교놈에게 다가가 ≪당신들은 지금 자기의 형제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당신들은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속이 편할것 같은가, 할 말이 있으면 총을 내리우라.≫고 침착한 어조로 말하였다.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지금 <기동경찰대원>27명을 억류하였다. 당신들이 총을 쏘면 바로 그 총알에 그들도 맞아죽을것이다. 당신들이 요구하는대로 억류된 <기동경찰대>원들을 내놓겠다. 그러되 체포해간 우리 동료들을 그만큼 석방하라. 그러면 그 가증스러운 최루가스차도 돌려주겠다.≫고 말하였다.
동훈의 말을 듣던 장교놈은 ≪네가 대표인가? 그렇다면 이야기 좀 해보자.≫고 하고는 옆에 서있는 놈에게 고개짓을 하였다. 순간 ≪공정대≫놈들이 동훈을 덮치였다.
이때 군중들이 ≪저놈들이 사람을 잡는다≫고 고함을 지르며 왁 하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놈들은 달려드는 군중을 향해 총을 마구 란사하였다.
수십명의 군중이 일시에 쓰러졌다. 그 다음부터 놈들은 군중들을 총검으로, 총탁으로 찌르고 치며 미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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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아쳤다.
동명로는 삽시에 군중들의 피와 시체로 뒤덮였다.
총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희생을 당한 것이다.
누군가가 군중들속에서 ≪총! 총!≫하고 피타게 절규하였다.
총!
총이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잡혀가는 동훈을 빼앗아내지 못했고 수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그 총이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놈들이 순진한 녀학생들의 옷을 벗겨놓고 갖은 희롱을 다하며 지어 젖가슴까지 도려내여 죽이고 배를 갈라 태를 치는 것을 보고도 저지시키지 못하였다.
총이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이 집단적으로 희생을 당한 실례는 너무도 많았다.
총!
총이 없기 때문에 자유와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생존권마자 지켜내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만을 당하고있는것이였다.
봉기군중은 무장한 적은 무장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것을 피로써 체험하였다.
시민들은 드디여 ≪피를 피로 갚자면 총을 들어야 한다≫는 구호를 들었으며 무기획득을 위한 투쟁에 떨쳐나섰다.
5월 21일 광주고등학교와 숭일고등학교 학생들이 ≪학도호군단≫의 무기고를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것은 광주인민봉기과정에 봉기군중이 처음으로 벌린 무기탈취투쟁이였다.
군중들은 무기를 탈취한 그들을 열렬한 박수로 환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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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하는 군중에게 학생들은 로획한 무기를 높이 들고 ≪우리는 총에는 총으로 대항하는 길밖에 없기에 부득이 총을 쥐였다≫고 흥분하여 웨쳤다.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따르는 법이다.
압박의 힘이 클수록 반항하는 힘도 그만큼 강해지는 것이다.
이때부터 봉기군중은 무기르 획득하기 위해 놈들의 무기고들을 본격적으로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폭동군중은 괴뢰들의 군용차량공장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중들은 로획한 이 차량들을 타고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
600여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여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내였다.
200여명으로 무어진 다른 한 폭동집단은 시내의 ≪향토예비군≫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총들을 로획하였다. 그리고 ≪카톨릭쎈터≫앞에서는 괴뢰군 지방 ≪계엄군≫을 포위하고 놈들의 군용차와 여러대의 버스를 탈취하였다.
이리하여 무기탈취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4시 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빙총 2,240정, ≪엠-1≫보총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만 6,400여발이였고 장갑차가 4대, 군용차량이 400여대에 달하였으며 수백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개의 뢰관들도 획득하였다.
무기획득을 위한 봉기군중들의 투쟁은 이날 오후부터 광주의 주변지역에로 확대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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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군에 진출한 폭동군중은 괴뢰경찰서 ≪산포지서≫, ≪로안지서≫ 등 5개의 괴뢰경찰서들을 습격하고 놈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모조리 빼앗아내였다.
화순군에 진출한 봉기군중은 괴뢰경찰서의 역전무기고, ≪전투경찰중대무기고≫, ≪동면지서≫, ≪릉주지서≫, ≪향토예비군무기고≫들을 들이치고 수많은 무기들을 탈취하였다.
장성군, 강진군, 령광군, 승주군, 해남군에서도 무기탈취투쟁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에는 오전보다 더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리하여 오후에 이르러 봉기군중들은 일반상용무기들을 대체로 다 장만하였다.
이때 일부 외신들은 광주의 봉기군중이 남조선괴뢰들로부터 탈취한 무기로는 괴뢰군 2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무기탈취를 위한 투쟁은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 아니였다.
봉기군중은 때로는 치렬한 격전을 벌려야 하였고 수많은 희생도 당하였다.
그러나 봉기군중은 무기가 있어야 자신들을 지켜낼 수 있다는 피의 체험이 있었기에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놈들과 싸웠으며 끝내 무기를 탈취해내고야말았던것이다.
괴괴군 제179지원단의 무기고를 습격할 때의 일이다.
폭동군중이 무기로를 향해 밀려들자 보초놈들은 사격을 가하며 완강하게 저항하여나섰다.
그리하겨 무기고기습초기에 벌써 적지 않은 청년들이 희생되였다.
정면으로 밀고들어가면 막대한 희생을 낼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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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폭동군중은 정면에서 사격전을 벌리는 한편 몸이 빠른 청년들로 놈들의 배후를 기습하게 하였다.
정면의 폭동군중을 막는데 급급하던 놈들은 배후에서 불의에 달려들어 내려치는 청년들의 각목세례를 받고 모두 나가너부러졌다.
보초병들을 까눕힌 군중들이 무기고를 열어제끼는 순간이였다. 꺼꾸러졌던 보초 한놈이 정신을 차리고 무기고앞에 모인 군중들을 향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또 여러명의 폭동군중이 희생을 당하였다.
괴뢰도청을 탈취하이 위한 격전을 한창 벌릴때에는 죽어자빠진 괴뢰군의 시체에서 총을 벗기려던 5명의 어린이들이 ≪공정대≫놈들에게 붙잡혀 무참하게 참살당하기도 하였다.
실로 폭동군중이 획득한 무기들에는 못다싸우고 희생된 봉기자들의 피가 그대로 스며있었다.
무기를 탈취한 폭동군중은 희생당한 사람들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무장대오를 편성하였다.
고등학교학생들은 ≪돌격대≫, ≪특공대≫를 무었고 대학생들은 ≪전남지역학생총련맹≫의 지휘에 따라 대학별로 전투대오를 조직하였다.
무기를 틀어쥔 폭동군중은 이때부터 놈들과 정면으로 대결하여나섰으며 ≪도청≫, ≪시청≫, ≪검찰청≫, ≪법원≫, 방송국, 은행, ≪경찰서≫, 우체국 등 광주시내의 모든 괴뢰공공기관들을 무력으로 공격하였다.
폭동군중은 괴뢰경찰서들과 광주역부터 먼저 공격하고 그곳을 타고 앉았다.
서울에서 광주로 수송되여오는 다수의 ≪공정대≫놈들이 광주역을 리용하고 있으며 광주시내에서 괴뢰경찰서들을 하나의 기지로 리용하여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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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기 수천명의 ≪공정대≫놈들이 기차로 서울을 출발하여 광주로 향하였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던것이다.
폭동군중은 새벽에 광주역을 점령하고 서울로 떠려는 기관차 한대와 열한대의 객차를 파괴하고 광주역으로 들어오는 수십메터의 철길을 다 들어냈다.
뒤이어 그들은 ≪택양경찰서≫를 습격하고 점령하였으며 ≪전남검찰청≫과 ≪광주법원≫을 습격파괴하였다.
무장한 폭동군중의 격노한 흐름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광주를 휩쓸었다.
드디여 놈들은 광주시내에서 한걸음두걸음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시내 곳곳에서는 쫓겨가는 적들과 치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수세에 빠진 ≪공정대≫놈들은 ≪도청≫, ≪시청≫, ≪경찰국≫, ≪서부경찰서≫,≪광주교도소≫를 제외한 모든 공공건물들에서 퇴각하였다.
이날 오후1시 폭동군중은 드디여 괴뢰도청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폭동군중은 놈들의 퇴로를 완전히 막아버리고 서서히 육박해들어갔다.
사면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육박하는 폭동군중의 공격에 기겁을 한 ≪공정대≫놈들은 직승기를 동원하여 폭동군중에게 맹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폭동군중은 로획한 고사총을 건물옥상에 걸어놓고 놈들의 직승기에 사격을 퍼부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생사를 판가름하는 총격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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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놈들의 기세는 처음보다 절반이나 떨어졌다. 이러한 때 ≪도청≫을 지키던 ≪공정대≫놈들속에서 비상사건이 일어났다.
≪공정대≫놈들 속에 있던 전라남도출신의 한 병장이 그 비상사건의 주인공이였다.
5월 19일 광주에 증강되여올 때부터 그 병장은 ≪전라도놈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지껄인 전두환역적에 대해 매우 커다란 반감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광주에 도착하여 시민들을 닥치는대로 사살하는 ≪공정대≫원놈들을 보고는 치를 떨며 이를 갈았다.
≪도청≫방어전이 한창일 때였다.
≪도청≫뒤마당쪽에서 어린이들의 자지러진 비명소리가 총성을 뚫고 들려왔다.
다급한 속에서도 ≪도청≫안에 웬 아이들이 있는가싶어 뒤마당으로 돌아가던 병장은 젖먹던 밸까지 울컥 올라오도록 분격할 참상을 목격하였다. 다른 ≪공정대≫원놈들이 어린아이 다섯명을 잡아놓고 차례로 찔러죽이는것이였다.
어린아이들이 죽은 ≪공정대≫놈들의 무기를 ≪탈취≫하려 했다는것이다.
이 기막힌 광경을 목격한 병장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살인마이기로서니 어린아이들까지 저렇게 무참하게 찔러죽여야 하는가.
만약 저 어린것들이 제동생이라면 결코 저렇게 무참하게 살육하지는 못할것이다.
짐승만도 못한 저런 자식들속에 끼여있다는것자체가 죄악이다.)
이렇게 생각한 병장은 ≪공정대≫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이 일시에 생겨나고 격분이 솟구쳐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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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가 바보였다, 내가 바보였어!≫하고 소리치면서 쥐고있던 총으로 ≪공정대≫놈들을 마구 쏴갈겼다.
다섯놈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그리고 병장자신도 자총하고말았다.
이 사건이 터지자 ≪공정대≫원들속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환각제를 먹은 상태여서 모두가 짐승처럼 보이는 판국에 언제 누가 자기에게 총구를 돌려댈지 알수 없는것이였다. ≪공정대≫놈들은 봉기군중을 경계하는것보다 자기의 패거리들을 더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때 봉기군중의 공격이 더욱 세차졌다. 봉기군중은 휘발유를 가득 실은 소방차에 불을 달아 ≪도청≫정문으로 몰아넣기도 하였다.
≪공정대≫놈들에게는 봉기군중을 막아낼 힘이 더는 없었다.
드디여 놈들은 직승기로 문건들과 ≪공정대≫들을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8시경에 봉기군중은 괴뢰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도청≫이 봉기군중의 수중에 장악되였다는 소식이 ≪시청≫과 괴뢰경찰국, ≪서부경찰서≫를 기키던 놈들에게 전해지자 그놈들도 저마끔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봉기군중은 치렬한 격전 끝에 밤11시경에 괴뢰군 ≪공정대≫와 지방≪계엄군≫, 괴뢰기동경찰대를 광주시내에서 교외에로 완전히 내몰았다.
이것은 봉기군중이 달성한 큰 승리였다.
이 승리는 80만 시민이 합심하여 무장한 적을 무장으로 대항한 결과에 이룩된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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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수호의 무기
32살난 마산무용학교 녀교원 전옥주는 본가가 있는 광주에 왔다가 동생들이 참살당하는데 분격하여 봉기에 참가하였다.
그는 초기에 봉기군중에게 돌을 날라다주고 물을 떠다주었으나 어쩐지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한것 같지 않았다.
무엇을 하면 더 잘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 궁리하던 전옥주는 방송원을 하면 군중에게 더 큰 힘을 주고 놈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겨줄 수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하여 전옥주는 방송원이 될것을 자원하여 나섰다.
마산에 어린 자식들을 두고있는 어머니였지만 광주사람들, 아니 동족이 무참하게 살육당하는데 언제 자식들 생각을 하랴 하면서 봉기자대렬속에 뛰여든 그였다.
전옥주는 확성기를 설치한 군용차를 타고다니면서 열정적인 선동구호로 봉기군중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시민들이여! 모두가 궐기하자! 전두환악당은 광주시민들을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라! 공정대의 만행을!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인두겁을 쓴 짐승의 무리이다!≫
≪우리의 항거는 정의적이며 파쑈폭력에 대한 민주의 폭력이다.
정의와 민주는 반드시 승리한다!
시민들이여!
모두가 궐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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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기하여 전두환살인악귀를 타도하자!≫
그는 이렇게 웨치며 광주시내의 큰 길들과 골목들을 누비였고 멀리 교외에까지 진출하였다.
전옥주가 격동적인 방송을 하며 거리를 지나갈 때면 풋낯이나 알고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생소한 사람들도 ≪우리 옥주≫, ≪옥주선생≫, ≪마산의 녀선생≫이라고 하며 총쥔 손을 높이 들어 반갑게 인사하였다.
그럴때면 전옥주도 비록 처음보는 얼굴들이였지만 서로가 통하는 마음들이여서 웃으며 손짓하며 반겨주었다.
5월 20일밤.
전옥주는 봉기군중을 향하여 ≪중대발표≫를 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시민여러분!
래인 <도청>앞에서 중대한 행사가 있게 됩니다.
자유의 광주, 민주의 광주에 일떠세울 광주민주국의 대표들을 선거합니다!≫
≪시민여러분!
모두가 <도청> 앞 광장으로 모입시다.
모여서 우리의 대표기관을 선출합시다.≫
전옥주는 온밤 광주시내와 주변군들을 돌아다니며 이렇게 웨쳤다.
전옥주의 이 방송은 사라들을 몹시 흥분시켰다.
듣는 사람마다 가슴이 뭉클해하였고 방송을 하는 전옥주자신도 무한히 격동되였다.
≪격동의 광주≫, ≪민주의 광주≫를 상징하는 ≪광주민주국≫!
광주의 봉기자들이 이 시각을 얼마나 기다리고 또 기다려 왔던가!
그리고 이 기쁨의 순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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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피를 흘렸던가.
≪자유의 광주≫를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희생된 영령들도 이날만은 기쁨을 금치 못할것이였다.
그렇다.
자유의 광주, 민주의 광주를 일떠세우기 위해 광주시민들은 수많은 희생을 당하였고 그들이 흘린 피는 바다를 이루었다.
자유와 민주의 정권을 위해 그들은 파쑈폭압의 험난한 가시덤불길도 마다하지 않고 꿋꿋이 싸워왔으며 수많은 학우들과 벗들을 혈전의 길에서 잃었다.
그야말로 ≪광주민주국≫은 열혈시민들이 흘린 피의 대가이며 정의와 애국에 불타는 인민대중의 간고한 투쟁의 고귀한 열매였다.
그러므로 광주에 자유의 민주의 대표기관 - ≪광주민주국≫의 대표들을 선출한다는 소식을 듣는 사람들마다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소식을 전하는 방송원 또한 격동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기쁨의 소식을 알려주는 방송원이나 그 소식을 듣는 시민들이나 모두가 다같이 격정의 눈물을 뿌리였고 기쁨으로 가슴설레였다.
비록 남녘땅 전역은 아니더라도 자그마한 광주에서나마 자유의 정권, 민주의 정권을 세운다고 생각하니 그들의 마음인들 어찌 설레이지 않을 수 있으랴!
5월 21일!
이날 새벽4시부터 봉기군중들이 ≪도청≫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시내 곳곳에서 모여들고 마산, 화순, 목포, 강진, 담양, 승주 등 전라남도의 각 군들에서도 자동차로, 도보로 밀려왔다.
≪도청≫앞 광장에는 군중이 밀집되다 못해 금남로 일대에 차넘치였고 금남로와 대봉로, 금남로와 충장로를 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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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하는 길복판에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부 외국통신들은 이때 모인 군중이 30만을 헤아린다고 전하였다.
하지만 이날에 모인 군중은 그보다 더 많았다.
≪광주민주국≫의 선포를 알리는 식은 간단하였다.
각계각층 대표들의 의견들이 제기되고 그에 따라 ≪광주민주국≫의 림시명칭이 결정되였다.
≪광주민주국≫의 림시명칭은 ≪민주투쟁위원회≫였다.
≪민주투쟁위원회≫가 곧 자유와 민주의 완벽한 정권은 아니였다.
그것은 진정한 자유, 민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한 과도적인 ≪주권적 대표기관≫이였다.
모두가 반동의 야만적인 폭력에 정의의 폭력으로, 조직적인 폭력으로 맞서자면 봉기군중을 단합시키는 중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치하게 강조하였다.
시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도, 부상자들을 치료하는데서도, 도시의 질서를 바로잡는데서도 통일적인 조직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다 토로하였다.
≪민주투쟁위원회≫, 이것은 바로 봉기군중, 아니 전체 광주시민들을 위한 대표기관이였다.
동시에 그것은 봉기군의 통일적인 지휘기구로 무력과 작전을 통솔하는 군사령부였고 파쑈통치체제의 무덤우에 민주의 체제, 인민대중의 진정한 자유의 체제를 세우고 주민생활의 안정을 보호하는 민주정권의 새싹이였다.
≪민주투쟁위원회≫는 행정부와 외무부, 기획부와 통보부, 작전상황실과 기동타격대 그리고 대변인실 등의 10개의 부서를 두었고 매개 부서와 책임자들은 ≪민주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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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위원회≫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조선대학교 무역과 3학년생이였던 김종배가 위원장으로 선거되였다.
그는 적에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정신과 강의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였다.
그리고 그는 리론과 현실에 대한 리해가 깊었고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고상한 정신도덕적풍모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전남지역학생총련맹≫의 중요한 핵심이였고 조선대학교학생위원회 위원장이였다.
봉기자들은 그가 ≪민주투쟁위원회≫를 군중의 의도에 맞게 이끌고 나가리라고 확신하였고 위원자이 된 그를 열렬한 박수로 환영하였다.
행정부위원장에는 조선대학교 공과대학 2학년생이였던 허귀정이 선출되였고 ≪보성기업≫ 요업과장이였던 정상룡이 외무부위원장으로 추천되였다.
그리고 ≪기독교청년회≫ 종교인 김영철이 기획부장으로, 골재운반차 운전선 박남선이 상황실장으로, 가구공 윤석주가 기동타격대장으로, 회사원 김준봉이 치안부장으로 선출되였다.
이들 모두는 광주시민, 아니 온 전라남도 인민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였다.
그들모두는 그만치 인밍들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한몸바쳐싸워온 열렬한 애국자들이였다.
조직된 ≪민주투쟁위원회≫는 첫 사업으로 무장부대들을 편성하는데 바쳤다.
기동타격대장 윤석주의 제안에 따라 무장한 ≪시민군≫을 ≪특별경계부대≫, ≪결사대≫,≪돌격대≫, ≪특공대≫와 여러개의 기동타격부대들로 편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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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개 부대들에는 군사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책임자로 임명되였다.
그들은 무장을 쥔 군중에게 초보적인 군사훈련부터 실시하였다. 총을 쥐고있으나 쏠줄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고장퇴치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초보적인 무기상학과 간단한 구조작용원리학습을 진행하고 어느 정도 총다루기에 숙력된후 광주공원에서 무기수여식을 진행하였다.
기동타격대는 ≪민주투쟁위원회≫의 무장력이였으며 각계각층 인민대중의 리익을 옹호하는 시민의 참다운 무장력이였다.
≪민주투쟁위원회≫의 조치에 따라 기동타격대는 시내의 주요 건물들과 지점들에 배치되여 적의 기습을 물리치는 방차재의 역할을 하였으며 필요한 때에는 적들을 주동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들은 또한 장갑차를 타고다니며 거리를 순찰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부 무장대는 첫 군사활동으로 ≪계엄군≫의 본부가 있는 송정리에서 멀지않은 ≪삼양다이야회사≫를 습격방화함으로써 놈들을 당황망조케 하였다.
다른 무장 부대들은 시외에 진출하여 무기를 계속 탈취하였으며 그것이 광주에 도착하는 차제로 새로운 무장부대들을 조직하였다.
일부 부대들은 화순, 승주 등에 진출하여 무기들을 탈취하였으며 그것을 광주시내로 가져다가 지원동과 광주공원에서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민주투쟁위원회≫는 광주시를 무력으로 보위하고 강화하는데 큰 힘을 넣었다.
≪민주투쟁위원회≫의 통일적인 지휘에 따라 기관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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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무장한 ≪특별경계부대≫들이 시내의 고층건물들과 주요지점들에 배치되여 적기의 란동을 견제하고 ≪공정대≫의 교란작전을 감시파탄시키는 투쟁을 하였다.
치안부대에서도 해방된 광주에 질서를 세우며 광주로 숨어들어오는 ≪공정대≫의 정탐들과 시안에서 준동하는 밀정들을 적발처형하고 주민생활의 안정을 보장하기위한 면밀한 사업을 펴나갔다.
치안부대는 또한 봉기군이 리용하는 ≪도청≫, ≪시청≫, ≪경찰국≫, 방송국, 신문사 등의 공공건물들과 주요 공장들에 대한 경비를 조직하였으며 사람들의 무질서한 출입을 단속하기도 하였다.
≪민주투쟁위원회≫는 광주시안의 전화와 무선통신지휘체계도 통일적으로 장악하여 모든 정보들이 ≪민주투쟁위원회≫에 제때에 집결되게 하고 ≪민주투쟁위원회≫의 지시가 즉시에 해당장소에서 집행되도록 하였다.
≪민주투쟁위원회≫는 대중정치선전사업도 활발히 벌려나갔다.
≪민주투쟁위원회≫는 방송과 신문발간을 통한 선전사업을 정력적으로 벌렸고 가두방송, 대벽보, 선언문, 삐라, 노래, 가두선전, 합동장례식과 같은 여러 가지의 형식과 방법으로 선전사업들을 진행하였다.
그 내용들은 모두가 전두환파쑈악당의 귀축같은 살육만행과 집권야욕을 낱낱이 폭로하는 것으로 일관되였고 봉기군중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고 투쟁목표와 방도들을 제시하여 주는 것들이였다.
광주봉기자들은 18일부터 26일까지 신문 ≪민주회보≫를 9개호나 발행하였다.
신문에서는 광주인민봉기의 정당성을 론증하고 적들의 살육만행과 그에 분격한 시민들의 절규를 실었으며 전두환괴뢰도당의 간교한 회유기만술책의 정체를 폭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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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봉기군중의 앞으로의 활동목표와 수행방도들을 제시하는 지시문들을 실었다.
신문 ≪민주회보≫의 매호들은 전두환파쑈악당과 끝까지 싸워나갈 결의와 봉기군중들의 격노한 웨침들로 끝을 맺었다.
삐라도 수많이 찍어내어 시내중심가에 매일같이 뿌렸다.
≪계엄군을 타도하자!≫, ≪김대중을 석방하라!≫, ≪계엄령을 철폐하고 구속자들을 석방하라!≫, ≪공정대는 전두환의 명령에 따라 전라도사람들의 씨를 말리러 왔다고 말하고 있다. 모두가 일어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하는 것들이 삐라의 기본적인 내용들이였다.
≪민주투쟁위원회≫가 자기의 기능을 원만히 수행하는데 만족한 봉기군중들은 ≪민주투쟁위원회≫를 ≪광주민주국의 림시정부≫라고 자랑스럽게 불렀다.
이에 대하여 일본 도꾜대학의 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시위를 계속하던 광주의 학생, 시민들은 권력 앞에 맞서 나섰다.
전두환일파의 사병이 된 공정부대의 잔학은 이들에게 무기를 잡게 하였으며 마침내 광주봉기는 잠시나마 자유광주, 광주민주국을 산생시켰다.
이 수일간 남조선 전역에서 공포의 강권탄압이 광란하였지만 광주에서만은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
정부를 비판할 자유, 시위를 할 자유가 완전히 있었던 것이다.
탄생한 자유의 공간은, 혁명승리의 려명은 남조선 전지역에서 실현시켜야 할 새로운 질서의 본보기였다.≫(일본잡지 ≪세까이≫ 1980년 7월호)
≪민주투쟁위원회≫는 ≪광주민주국≫을 일떠세운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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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로 하여금 그 성과를 도안의 시, 군들로 확대하여 나가도록 투쟁을 조직 지휘하였다.
이에 따라 봉기군은 목포시를 중요공격대상으로 삼았다.
21일 오후2시반경에 6대의 고속뻐스와 2대의 승용차를 탄 봉기군중은 목포시로 진출하였다.
봉기군중은 목포에 도착하는 즉시로 대중선동사업을 힘있게 벌렸다.
≪목포시민여러분!
광주는 해방되였다.
자유, 민주의 광주가 태여났다.
악마의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의 정권을 세웠다.
시민여러분!
일어나라! 궐기하라!
우리 함께 독재의 아성을 짓부시고 자유의 목포, 민조의 목포를 일떠세우자!≫
그렇지 않아도 전두환괴뢰도당의 파쑈적폭압책동을 반대하는 시위투쟁을 벌려오던 목포시민들은 광주에서 온 봉기군의 이 격동적인 호소에 즉시 호응하여 투쟁의 길에 떨쳐나섰다.
목포에서는 처음 2만여명의 군중이 궐기하였고 그날 저녁9시에는 3만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괴뢰목포경찰서와 여러개의 파출소들을 습격 파괴하였고 괴뢰시청을 비롯한 행정관료기관들과 어용방송국을 점령하였다.
폭동에 궐기한 군중들의 기세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갔다.
5월 22일 새벽 목포시에서 봉기에 참가한 군중은 10여만명으로 확대되였다.
폭동군중의 격노한 기세에 질겁한 목포시안의 괴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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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경비정을 타고 황황히 도망치고 말았다.
이날 봉기군은 목포에 도사리고 있던 ≪지방계엄군≫도 완전히 제압하였다.
령광군에서도 군내 인민들이 5월 21일밤을 기해 일제히 폭동에 궐기하였다.
봉기군은 군대의 모든 ≪경찰지서≫들과 ≪파출소≫들을 습격파괴하였고 22일 오후에는 령광군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라주군에서는 22일 봉기자들이 군 ≪경찰서≫와 ≪라주지서≫, ≪파출소≫들을 습격파괴하고 괴뢰군청을 점거하였다.
같은날 담양군과 화순군에서는 괴뢰경찰서들과 ≪파출소≫들을 비롯한 괴뢰관공서들을 기습파괴하는 봉기가 있었다.
특히 화순탄광로동자들은 봉기의 맨앞장에서 괴뢰경찰서 ≪릉주지서≫, ≪역전파출소≫, ≪향토예비군≫무기고를 습격하여 많은 무기와 탄약을 로획하였다.
5월 21일 밤 12시 완도군에 도착한 광주의 봉기군중들은 그곳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괴뢰군청와 ≪경찰지서≫를 습격파괴하였고 ≪항동파출소≫, ≪대촌지서≫, ≪비아지서≫ 등 괴뢰경찰들의 소굴들을 기습하여 파괴하거나 소각하여 버렸다. 그리고 잇달아 ≪향토예비군 중대본부≫를 습격하여 괴뢰전투경찰대놈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완도군을 완전히 해방하였다.
승승장구하는 그 기세로 봉기군은 해남군으로 진출하였다.
21일 저녁 이곳 해남군에 도착한 광주봉기군중의 한 대오는 구두선동사업을 맹렬히 벌려 군내인민들을 폭동에 궐기시켰으며 그들과 함께 계곡면 ≪경찰서≫를 들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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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명으로 구성된 봉기군중의 다른 한 대오는 려수 방면으로도 진출하여 괴뢰경찰서와 ≪파출소≫를 여러개나 공격하여 파괴하여 버렸고 수많은 무기와 탄약을 로획하였다.
전두환살인악당을 반대하는 전라남도내 인민들의 봉기는 승주군, 보성군, 령암군, 함평군, 광양군, 영산포, 장흥군에서 잇달아 일어났으며 이 도의 26개 시, 군 가운데서 17개 시, 군이 봉기에 합세하고 도내 괴뢰통치체제는 거의 마비상태에 빠졌다.
이렇게 되자 전두환 일당은 전라남도의 괴뢰도청을 전라북도 리리시에 옮겨놓고 괴뢰내무부가 전라남도의 행정전반을 담당한다는 통고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는 세계의 여론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였다.
광주시가 봉기군에 의하여 점거된후부터 괴뢰도청이란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괴뢰내무부 역시 전라남도의 행정에 대해 손을 써본 적이 없었다.
5월 22일 전라남도의 광범한 지역은 봉기군에 의하여 완전히 장악되였다.
≪광주민주국≫이야말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전대미문의 악랄한 파쑈폭압마아에 포위된 속에서 과감하게 일떠선 참다운 민주정권의 맹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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