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오라리 사건의 진실(8)-오라리사건과 김익렬 연대장(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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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3-12-26 23:27 조회6,71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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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리 사건’의 진실
1. 오라리 사건의 창조
2. 오라리 사건의 발단
3. 민오름의 폭도들
4. 오라리 사건의 구성
5. 제주도의 메이데이
6. 오라리 사건의 반미주의
7. 오라리 사건과 양조훈 전문위원
8. 오라리 사건과 김익렬 중령.
9. 4.28평화협상과 오라리 사건
8. 오라리 사건과 김익렬 연대장
오라리 사건에는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다. 오라리 사건에서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단체가 떠나면 다른 집단이 진입하기를 반복하면서 교대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9연대장 김익렬도 등장한다. 우익청년단이 떠나는 것과 폭도들의 진입은 서로 확전을 기피하며 교대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폭도와 경찰의 교대에는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경찰 다음에 김익렬이 지휘하는 경비대가 마을로 진입하자 경찰은 서둘러 마을을 떠나버렸다.
군경 합동작전으로 민오름에 있는 폭도들의 토벌 작전을 펼칠 수도 있었고, 마을의 피해 상황을 합동으로 조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경비대를 이끌고 김익렬이 들어오자 경찰은 벌레 피하듯 부리나케 마을을 떠나버렸다. 김익렬 중령이 등장하자 경찰이 떠나버리는 이 장면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이 장면은 당시 경찰과 경비대 간에 알력과 갈등이 벌어지는 국내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라리 사건에서 보이는 경찰과 경비대의 갈등 장면은 제주4.3의 중요한 사건을 가름하는 단서가 들어 있기도 하다.
오라리 사건을 보고하는 경찰과 경비대의 진상은 서로 달랐다. 경비대는 우익의 소행으로 미군정에 보고했고, 경찰은 폭도의 소행으로 보고했다. 아마 두 집단의 보고가 달랐던 것은 오라리 사건을 보는 두 집단의 시각 차이이거나, 사건을 보고하면서 두 집단이 자기에게 유리한 면을 강조하여 보고한 측면도 있을 수 있다.
오라리에 경찰이 진입할 당시 오라리는 불타고 있었고 마을에는 폭도들이 있었다. 당연히 경찰로서는 폭도들에 의해 마을이 불 질러졌다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폭도들의 납치 살인에 대한 우익청년단의 보복으로 방화가 저질러졌기에 경찰은 원인을 제공한 폭도들의 소행으로 보고했을 수도 있다.
경비대는 오라리에서 사건의 총체적인 원인과 진상을 조사했다기보다는 우익청년단의 방화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그리고 쌍방이 죽이고 보복하는 사건에서 우익의 잘못만을 부각시켜 보고했다. 이런 보고는 김익렬이 상습적으로 했다고 보여 진다. 그랬기에 김익렬의 보고서는 미군정으로부터 묵살되었다. 김익렬의 보고서는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오라리 사건을 조사하여 경찰과 경비대가 올린 두 개의 보고서에서 경비대의 보고서가 무시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오라리 사건 4일 후인 5월 5일에는 딘 장군이 참석하는 최고수뇌회의가 열렸다. 최고수뇌회의에서 경무부장 조병옥과 9연대장 김익렬은 각자가 준비한 자료를 들이대며 치열하게 대립하며 난투극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김익렬의 보고는 묵살되고 조병옥의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최고수뇌회의 뒷날인 5월 6일 김익렬은 직위 해제되었다. 무엇인가 치명적인 김익렬의 실수나 약점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4.3에서 김익렬의 행적은 수상하기만 하다. 제주인민해방군에게 실탄을 제공하기도 했고, 그의 부하들은 나중에 박진경 연대장을 살해하고, 병사들은 탈영하여 인민해방군에 합류해 버린다. 폭도 진압에 출동을 요청해도 김익렬은 중립을 빙자하여 출동을 거부했고, 김달삼과는 협상을 빙자하여 수상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국전쟁사’ 1권에는 김익렬의 이런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경찰은 경비대의 진의를 타진해 보기로 하였다. 즉 반도들의 근거지를 차단하기 위해 산간에 접한 마을을 소각하였다. 주민들이 몰려와서 경찰이 마을에 불을 질렀다고 경비대에 신고하였다.(중략) 경찰 이야기는 반도들이 마을을 습격하여 방화 약탈하고 경찰이 교전하다가 희생자가 많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경찰이 경비대를 출동시키기 위한 계략에서 조작하였다는 것이 판명됨으로서 군경 간에는 더욱 불미한 간격이 조성되었다.”
‘한국 전쟁사’에는 폭도가 침입했다고 신고해도 출동하지 않던 경비대가 경찰이 마을에 불을 질렀다는 신고에는 출동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여기에서 경찰은 경비대에 거짓 신고를 하고 출동 행위를 감시하고 있었다. 경비대의 이적행위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반대로 경비대는 경찰의 오점만을 골라 뒷조사를 하고 있었다. 오라리 사건에서 폭도들의 납치 살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방화에 대해서만 조사하는 경비대의 모습은 이런 상황을 웅변하고 있었다.
오라리 사건에서도 김익렬의 출동은 폭도를 잡으려고 출동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윤락의 증언에 따르면 경비대가 출동한 것은 폭도들이 휴전협상을 깼기 때문에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고 했지만, 이것은 거짓말일 확률이 높다. 폭도 출현은 경비대 출동의 원인이 아니었다고 보여 진다.
경비대가 오라리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30분경이었고, 경비대가 오라리 방화 사건을 인지한 것은 오후 2시경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 준비 시간을 감안하여 2시 30분경에 경비대를 출발하였다고 하더라도 경비대는 2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2시간은 축지법을 쓰지 않는 이상 대정의 경비대에서 출발하여 오라리에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간이다.
당시 대정에서 제주읍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의 일주도로 뿐이었다. 폭도 출현 신고를 받고 제주읍의 경찰이 출동하여 오라리에 도착하는 데에는 1시간이 걸렸다. 대정에서 제주읍까지는 직선으로 대략 60여km, 제주읍의 경찰서에서 오라리까지는 대략 3km. 더욱이 경비대는 대정에서 출발하여 제주읍의 본부에 들러 다시 오라리로 왔다. 당시의 도로는 구불거렸고 전부 자갈길이었다.
48년 4월 2일, 김익렬이 대정을 향하여 제주읍을 출발한 것은 점심 때였다. 꿩 사냥을 하면서 가기는 했지만 절반 지점인 한림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날이 저물었다. 당시 제주도의 도로는 포장도로가 전무했고 열악했다. 이것은 속도를 느리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주도로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17년이었고, 포장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가 출현한 1961년부터였다.
그리고 48년 4월의 일주도로는 폭도들의 습격으로 도로가 절단되고 교량이 파괴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절단되는 도로와 비포장의 자갈길을 달려 대정에서 제주읍에 들러 다시 오라리로 두 시간 만에 도착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지금 4차선의 쭉 뻗은 도로를 달려도 제주와 대정은 1시간 30여분이 걸리는 거리이다.
그렇다면 김익렬은 언제 출동한 것일까. 김익렬은 폭도 출현을 신고 받고 출동한 것이 아니라, 우익청년단의 방화 정보를 접하게 된 오전 11시 전후가 김익렬의 출동 시간으로 보면 될 것이다. ‘한국 전쟁사’에 기록된 김익렬의 행적 대로 김익렬은 폭도 출현에 출동한 것이 아니라 우익의 출현에 출동한 것이었다. 거꾸로 행동하는 김익렬의 모습이 오라리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김익렬과 경비대는 오라리에서 경찰의 비행만을 조사했다. ‘한국전쟁사’에 나타난 김익렬의 모습과 오라리에서의 김익렬의 모습은 같은 모습이었다. 오라리 사건은 경찰과 미군이 김익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구심을 확인하는 날이었다. 경찰은 이날 김익렬의 이적행위에 대하여 ‘확인사살’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김익렬이 도착했을 때 경찰은 이미 목적 달성을 했다는 듯 미련 없이 떠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오라리 방화자에 대한 경찰의 비호와 우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라리 사건은 김익렬을 잡기 위한 경찰의 함정수사였다고 볼 수 있다.
오라리 사건에서 확증을 굳힌 경찰은 4일 후에 벌어지는 최고수뇌회에서 김익렬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게 된다. 최고수뇌회의에서 조병옥은 김익렬을 가리키며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있소”라며 일갈한다. 최고수뇌회의 참석자들도 김익렬에게 공산주의자라며 욕을 했다는 장면도 등장한다. 오라리 사건의 김익렬을 이해하면 김익렬 유고에 등장하는 이해 못할 부분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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