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0월 하순,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당(다수당)이 대규모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러시아 로마노프왕조를 전복시키는 이른바 ‘피의 혁명’에 성공했다. 볼셰비키당은 성격상 지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민노당처럼 노동자-농민들을 감언이설로 속이고 그들을 영웅으로 추겨 올리면서 폭력전사화하여 사회를 전복하고 배운자와 가진자들을 숙청하는 폭력집단이었다. 이들은 ‘무산계급의 천국’을 만들겠다는 달콤한 말로 속여 전 세계의 노동자 농민 등 무산계급을 혁명의 전사로 나서게 함으로써 세계를 통일해 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실체를 모르는 무식한 무산계급과 몽상가처럼 이상만을 추구하는 사이비 지식인들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공산주의에 빠져들어 공산주의 전파의 매체 노릇을 했다.
1960년대의 대학가에 괴테를 읽고 브람스를 듣고, 아네모네를 보는 척해야 멋쟁이요 잘난 사람이라는 정서가 있었듯이 당시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논할 수 있고, 공산주의를 선전할 만한 용기를 가져야 지식인이고, 잘난 사람이라는 정서가 팽배했다. 그들은 공산주의가 ‘진보’한 사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스스로를 ‘진보’라고 자칭했다. 그들은 작은 마을들을 찾아다니면서 강연을 했고, 선교사들에 대항했으며, 종교는 미신이라고 강론했다. 미국과 일본 같은 나라들도 불어나는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골치를 앓았다. 이들 국가 역시 사회 곳곳에 파고든 공산주의자들을 검거하기 위해 실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1920~50년대에만 해도 미국 경찰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공산주의자들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 끌듯 질질 끌어내 차에 태워 갔다.
한국은 어떠했는가? 공산주의를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데 앞장 선 사람들은 주로 중국-소련-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가장 성공적으로 국내에 침투한 소련 공산당 밀사는 김재봉, 그는 안동출신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 내 공산당 결성의 밀명을 받고 잠입했다. 그가 남한에 와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조봉암, 이 두 사람이 조선공산당 창당의 원조가 됐다.
김재봉(1890-1944년)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했고, 1922년 11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한 후 1923년 조선일보 기자로 신분을 위장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위장한 그는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했고, 1925년 4월에는 조선공산당의 초대 책임비서에 추대됐다. 이 남한 공산화운동의 원조에게 노무현은 참으로 기막힌 조치를 취했다. 2005년, 이 김재봉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한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이 훈장은 박탈돼야 할 것이다.
남한 공산화의 뿌리
김재봉은 1925년 4월 17일 서울 중심가에 있는 유명한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비밀 발기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는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그리고 그 밖의 언론기관에 침투해 있던 이르쿠츠쿠파(필자주 : 1919년 당시 고려공산당은 상하이의 고려공산당과 연해주 이르쿠츠크의 고려공산당으로 양립)의 김재봉, 박헌영, 조봉암, 김단치, 임원근, 신일객, 신석우, 홍회식, 구연흠, 어수갑 등이 등장했다. 거의가 다 언론에 침투해 있던 자들이다. 지금도 언론들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무수한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인 4월 18일에 이들은 당명을 ‘조선공산당’으로 정했다. 여기에서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들로 구성된 6개의 기구가 발족됐다. 조직부장에 조동우, 선전부장에 김찬, 인사부장에 김약수, 노농부장에 정운해, 정치부장에 유진희, 조사부장에 주종건 이었다. 1925년 4월, 코민테른은 김재봉-박헌영이 만든 ‘조선공산당’을 유일한 코민테른 한국지부로 승인했다. 코민테른이란 Communist International 즉 국제공산당의 약자이며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립되어 당시 30개국에 걸쳐 35개의 공산당을 관장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한국 내의 공산주의 운동은 코민테른의 직접지도 하에 들어갔다. 이것이 한국 내 최초의 공산당인 제1차 ‘조선공산당’이었으며, 이 조선공산당은 후에 탄압을 받아 여러 차례 와해-재건의 과정을 거듭했다.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는 김재봉을 책임비서(당비서)로 선출했고, 그 예하에 ‘조선공산청년회’를 두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박헌영을 ‘조선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선출했다. 박헌영은 그 이전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상해 공산청년회’비서였다. 고려공산청년회의 발기모임은 1925년 4월 18일 서울 훈정동에 있는 박헌영의 집에서 가졌다.
고려공산청년회의 제1차 집행위원회는 박헌영을 청년회의 의장으로 선출하고 집행위원회의 위원들을 6개의 요직에 배치했다. 이 회의에서 박헌영은 조봉암을 콤소몰(Komsomol)에 파견할 대표로 선출했고, 조봉암은 1925년 4월 말 즉시 모스크바로 떠났다. 콤소몰 이란 소련 ‘공산주의 청년동맹’을 말한다. 공산당 지도하에 청년들에게 공산주의 교육을 실시하는 공산당원 양성단체인 것이다. 조봉암과 박헌영은 그해 10월, 21명의 한국 학생들을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즉 일명 모스크바공산대학에 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 공산당에 뛰어든 사람들 중에는 맹목적 혈기에 날뛰던 불한당들이 많았다. 고려공산청년회의 선전부장 신철수는 조선공산당 창립 수일 후에 세력 확장을 위해 서울에서 열린 전조선노동자대회에 청년회 당원 수명을 이끌고 나가 적기를 흔들고 “조선공산당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가 즉시 체포됐다. 이어서 이른바 ‘신의주사건’이 터졌다. 1925년 11월 22일, 서울에서 상해로 파견된 두명의 당원이 신의주에서 일본인 경찰 간부와 그 일행인 변호사들을 심하게 구타하여 때려눕힌 후, 영웅심을 주체하지 못해 옷소매 안에서 적기를 꺼내 흔들며 “조선 공산주의 만세!”라고 외쳤다. 그리고 곧장 체포되었다. 여기에서 그만 박헌영이 상해에 있는 여운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처럼 사이비 지식인들의 감언이설에 놀아난 존재들은 일자무식의 하류 건달들이었다.
이에 따라 대규모의 수사가 이어졌으며, 그 결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들인 김재봉, 김약수, 주종건, 임원근을 포함한 30여 명의 주요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를 면한 간부들이 있었다. 조동우와 조봉암은 모스크바에 사절로 나가 있었고, 김찬, 김단야, 최원택 등은 상해로 도주했다. 김재봉은 첫 소탕에서는 잡히지 않았지만 1925년 12월 19일에 체포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조선공산당의 결성 및 와해의 역사였던 것이다.
위와 같은 국제공산주의 물결에 따라 일본과 만주, 러시아 등에 나가 있던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서클에 가담했고 스스로 세포(러시아 말로 야체이카)가 되어 서울과 자기 고향을 오가며 공산주의를 확산시켰다. 1921년 1월 27일에는 맑스-레닌사상을 신봉하는 ‘서울청년회’가 결성되었고, 1926년 4월 17일에는 박헌영 주도로 제2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가 즉시 와해됐다.
1926년 12월 6일, 제3차로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지만 이 역시 1928년 전국에 걸친 검거 선풍으로 와해됐다. 1928년 2월 27일, 제4차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지만 그 해 4~8월 사이에 진행된 검거 선풍으로 또 와해됐다. 이처럼 공산주의는 1920년대에 서울을 중심으로 들어왔고, 이는 여지 없이 제주도를 포함한 각 지방에도 파급 확산되었지만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적과 탄압을 받아 1932년 이후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야학 등 각종 위장행위를 통해 지하에서 여운형과 박헌영을 신화적 인물로 선전 선동하면서 1930년대의 남한 사회를 지하로부터 붉게 물들였다.
제주도 공산화의 뿌리
이러한 바람은 제주도에도 불어 닥쳤다. 그리고 그 어느 지방 보다도 제주도가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심각하게 적화됐다. 제주도에는 조천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을 나온 김명식이 있었다. 그는 1921년 1월 27일 서울에서 마르크스-레닌(M.L)사상 단체인 ‘서울청년회’를 탄생시킨 주역 중의 한 사람이다. 그로부터 2개월여 후인 4월, 김명식은, 제주도에서 서울로 유학하여 공부하던 김택수, 김민화, 홍양명, 한상호, 송종현 등을 포섭하여 제주도로 보냈다. 이들은 제주도로 귀향하자마자 ‘서울청년회’제주도 버전으로 ‘반역자 구락부’라는 것을 결성했다.
제주도 ‘반역자 구락부’는 1925년 5월 11일 ‘제주신인회’로 탈 바꿈했다. 당시 서울의 보성전문, 경성고보, 휘문고보 등에 재학 중 이거나 졸업했던 고경흠, 김시용, 강창보, 김정노 등이 제주도로 귀향하여 오대진, 윤석원, 송종현 등을 포섭했다. 그리고 반역자 구락부를 ‘제주신인회’로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다. 하지만 불과 며칠 만에 곧바로 일본 경찰에 발각됨으로써 핵심간부들은 금고 5월에 처해졌고 조직은 와해됐다.
서울에서 제3차 공산당이 와해된 지 1년만인 1927년 8월, 제주도에서는 ‘제3차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가 결성됐다. 야체이카란 세포를 뜻하는 러시아말이다. ‘제3차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는 제주야체이카 대표 송종현이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김재명의 지시를 받고 제주도로 와서 위 강창보, 한상호, 김택수, 윤석원, 김정노, 오대진, 신재흥, 이익우, 김한정 등을 이끌고 결성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며칠 견디지 못하고 주동자들이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징역 1~3년의 형에 처해지면서 와해됐다.
1928년 2월 27일, ‘제4차 조선공산당’이 서울에서 재건 되었다가 그해 8월에 검거 선풍으로 와해됐다. 그 후 만 3년이 지난 1931년 5월 16일, 제주도에서 ‘제4차 조선공산당야체이카’가 재건 됐다. ‘제3차 조선공산당야체이카’ 멤버들이 형기를 마치고 귀환한후 강창보가 중심이 되어 제주도 전체 규모의 ‘제4차 조선공산당야체이카’를 결성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불과 8개월 만인 1931년 1월 구좌면 하도리의 해녀시위사건으로 인해 그 배후 조직이 탄로나 그해 3월, 제주 전역에 걸쳐 100여 명이 체포되어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길게는 5년 짧게는 6월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형기를 마치고 나온 이들에게는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계속된 감시를 받았고, 그 결과 이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공산주의란 한번 물들면 이토록 세탁이 안 되는 것이다.
하도리 해녀시위사건이란 해녀들이 캐낸 어류들에 대해 해녀조합 측이 싼 값에 후려치는 데에서 발생했다. 해녀조합에서 정한 지정판매일인 1월 12일은 세화리 장날이었다. 아울러 이날은 제주도사 겸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의 조합장이었던 다구치(田口禎熹)가 새로 부임한 뒤 순시를 위해 구좌면을 통과하는 날이었다. 이에 구좌면 하도리, 세화리, 종달리, 연평리, 정의면(현 성산읍) 오조리, 시흥리 등의 해녀들이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고, 이 기회에 제주도사에게 요구 조건을 제시하기로 결의했다. 이런 종류의 연합 조직이 결성되는 배경에는 반드시 공산주의자들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1월 12일 장날이 되자 세화경찰서 주재소 동쪽 네거리에 종달리, 오조리 해녀 300여 명과 하도리 해녀 300여 명, 세화리 해녀 40여 명 등 640여 명이 일시에 모여들었다. 해녀들은 호미와 창을 휘두르고, 만세를 부르며 세화장터로 향했다. 해녀들은 세화장터에 모여든 군중들과 더불어 집회를 열었다. 각 마을 해녀 대표들이 항쟁의 의지를 다지는 연설을 차례로 했다. 시위대에 놀란 제주도사 일행은 구좌면 순시를 포기하고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시위대가 차에 탄 제주도사를 에워싸면서 호미와 창을 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라고 외치며 달려 들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제주도사는 해녀들과의 대화에 응하기로 했다. 해녀 측에서는 지정판매 반대, 해녀조합비 면제, 제주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상인 배척 등의 항일적 성격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직접 제주도사와 담판을 벌였다.
마침내 해녀들은 5일 이내에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해결해 주겠다는 제주도사(島司)의 약속을 받아냈지만 일경(일본경찰)은 그 배후에 야체이카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후 일경은 전국적으로 공산당에 대한 검거작업을 진행했다. 지상 활동으로서는 일경의 눈을 속일 수 없다고 판단한 공산당 당원들은 일제히 지하로 파고들어 야학 등 위장활동을 통해 그들의 조직을 암암리에 넓혀가고 있다가 해방을 맞게 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수법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다.
2014.12.3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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