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임시위원단 추방을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2·7구국투쟁’
1948년의 한국 사회는 1월 8일 UN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요동치기 시작했다. 소련의 통치하에 있는 북한은 그야말로 벌집을 건드린 듯 들끓기 시작했다. 전 지역에 걸쳐 항의집회와 시위를 열었고, 이와 동시에 남한사회 전체에 노동계급을 전사로 하는 시위와 파업, 경찰서 습격 등 파괴활동이 이어졌다. 마치 9월 파업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이런 파업과 파괴활동은 2월 7일 절정에 이르렀다. 북한 자료에 의하면 이날 하루 동안에 전국적으로 26개 파출소가 습격당해 피해를 입고 무기 등을 피탈 당했다. 북한이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105쪽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투쟁에 나선 남조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원수들의 피비린 탄압을 불굴의 투지로 싸웠다. 2월 7일 이후 26일까지, 수많은 경찰지서가 녹아나고 악질경찰관, 악질관리, 반동분자 수십 명이 처단되었다. 26자루의 총과 481발의 탄약을 빼앗고, 61대의 기관차, 27개의 통신기구, 수많은 다리, 도로를 파괴하고, 83개소의 전신전화선을 끊어버렸다”
제주도의 1948년 역시 격랑의 해였다. 하지만 제주도의 2.7 구국투쟁은 내륙에 비해 강도가 아주 미미했다. 1948년 1월 22일, 제주도에서는 이른바 신촌리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남로당 제주도당 간부들이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인 5·10 선거 반대를 위한 2.7 폭동 준비를 위해 조천면 신촌리에 모였다. 그런데 남로당에서 전향한 김생민이 이 내용을 경찰에 신고하여 거기에 모였던 106명이 연행됐다. 그런데도 끈질긴 제주 남로당 간부들은 1월 26일 또 다시 2·7 폭동을 준비하기 위해 모였다. 이 모임도 신고되어 또 다른 115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졸지에 221명의 남로당 간부들이 연행된 것이다.
연행된 자들 중에는 남로당 제주도당 책임자 안세훈, 김유환, 김용관, 이좌구, 이덕구 등 간부들이 있었고, 김달삼과 조몽구는 연행 도중 도망쳤다. 조사 후 63명은 곧 훈방조치 됐고, 나머지 대부분은 1948년 3월말에야 모두 석방됐다. 미군정이 석방하라 한 것이다. 1월말부터 3월 말까지 제주남로당 대부분의 간부들이 구속돼 있었던 관계로 제주남로당은 육지에서와는 달리 2·7 폭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그들에게 전화위복이 되어 남로당 제주도당이 건재할 수 있었고, 이어서 제주 4·3폭동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제주남로당 주요 간부들이 구속돼 있는 동안에도 제주남로당은 1948년 2월 9일-11일에 걸쳐 6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삐라를 살포하고, 17건에 달하는 무장시위를 벌여 또 다른 290명이 연행됐다. 2월 29일에는 안덕면 사계리 마을 청년 이양호(25세)와 임창범(28세)이 5·10 선거 반대시위를 획책하던 도중 육지로부터 파견된 최(崔)안덕 지서 주임과 제주출신 오 순경이 마을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청년들을 동원하여 경찰의 카빈총을 빼앗고 죽음 직전에 이르기까지 마구 구타했다. 이 두 경찰은 마을 사람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경찰들은 이 일로 매우 화가 났다.
이에 경찰은 5·10선거 반대 시위자들을 연행하여 조사를 했고, 조사과정에서 조천중학교 2학년 김용철(21세)이 3월 6일에 고문으로 사망했다. 이어서 3월 14일에는 대정면 영락리 양은하(27세)가 모슬포 지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역시 고문으로 사망했다. 또 3월말에는 한림면 금릉리 박행구(22세)가 서청과 경찰관에게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총살을 당했다. 이로 인해 경찰과 남로당 사이에는 매우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상의 사건들은 남로당의 공격행위와 이에 대한 경찰의 반작용으로 이루어진 사건들이다. 공격은 언제나 남로당으로부터 시작됐다. 남로당의 공격행위는 3.1절 기념사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5·10 선거를 반대하는 차원에서 벌어진 것들이다. 그런데도 정부보고서 128쪽에는 1947년 3.1 사건 이후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여 명이 검속 되었다고 기술돼 있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3·1 발포사건 이후 미군정이 2,500여 명을 검거할 정도로 주민들을 난폭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4·3 항쟁(민중봉기)이 발발했다는 논리를 펴기 위한 것이다. 4·3 항쟁의 원인이 미군정의 탄압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부보고서가 주장한 2,500명은 맞는 수치 인가? 아니다. 실제 3·1 사건으로 검거된 인원은 500여 명뿐이다. 정부보고서에 1948년 4월 3일까지 검거된 수를 2,500명이라 한 것은 진상조사 위원들이 홍한표의 저서를 검증도 하지 않고 인용한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희극적인 것은 정부보고서 148쪽에 위 17건을 폭동이라고 규정한 점이다. 총 290명이 동원되어 6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삐라를 살포하고, 칼과 곤봉을 높이 들고 무장시위를 벌이며, 경찰관을 죽기 직전까지 구타하는 등의 17개 미니 사건들에 대해서는 ‘제주 남로당이 일으킨 폭동’ 이라고 규정한 진상조사위가 정작 4월 3일, 인민유격대가 총동원되어 전도적으로 벌인 대량 학살 만행에 대해서만은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좌익들의 한계인 것이다.
고재우에 의하면 ‘2·7 구국투쟁’ 이후 남로당 중앙당 간부들 즉 선전부장 강문석, 군사부장 이중업, 군사프락치 이재복(주 : 박정희를 포섭한 인물)과 전남도당 조창구, 이창욱 등 이른바 올구(ORG, 조직가)들이 대거 제주도로 건너 왔다. 이들은 남로당 제주도당을 극한투쟁을 할 수 있는 ‘구국투쟁위원회’로 개편했다. 위원장에 강규찬, 군사위원장에 김달삼이 지명되었다. 북한 박설영의 논문에는 이때부터 고농, 빈농, 어민들로 구, 면, 리 단위 ‘무장자위대’가 형성되었고, 4월 3일 이전에 8개 지구에 35개 유격근거지를 설치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4월 3일의 기습적 무장 반란 사건
제주 남로당이 5·10 선거 반대를 위해 4·3 폭동을 벌이기로 한 배경은 이렇다. 1월 하순, 221명이라는 많은 핵심 당원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조직 와해에 직면한 제주도당은 여러 차례에 걸쳐 회의를 거듭했다. 1948년 2월 20일경, 조천면 신촌리에서 제주 남로당 도당간부와 면당책임자 19명이 모였다.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이었다. 김달삼이 ‘이대로 있다가는 조직이 와해되어 상부에서 명령한 5·10 선거를 저지시킬 수 없다’며 무력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조몽구 등은 무력투쟁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무력투쟁 방침이 12: 7로 가결 되었다.
이에 따라 2월 25일경 제주도당을 구국투쟁위원회로 조직 개편했고 전남도당 올구 이씨는 즉시 전남도당과 중앙당을 방문하여 제주도당의 조치에 대해 결과보고를 했다. 중앙당의 명령을 받아든 올구 이씨는 3월 15일 제주도로 건너와 무장 반격을 실시할 것과 여기에 국방경비대를 최대한 동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남로당 중앙당이 제주 무장폭동을 직접 지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장폭동을 결행하자는 김달삼의 판단 근거는 세 가지였다.
1) 5·10 선거 반대를 위한 무력투쟁을 벌이면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전국에서 호응이 있을 것이다.
2) 국방경비대는 진압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3) 미군과 소련군이 곧 철수하면 북한의 김일성과 남로당의 박헌영의 세력이 강해지고 1949년에는 인민군이 38선을 넘을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 얼굴 없는 주동자들이 폭도들을 선동한 것 역시 이와 똑같았다. 광주에서 불을 지르면 전국에서 들고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미군이 계엄군으로부터 손을 뗄 것이고 그래서 곧 북한이 밀고 들어와 통일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30여 정의 총기와 적탄통,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그리고 죽창과 일본도 등으로 무장한 320여 명의 훈련된 무장병들과 각 부락에 심어놓은 민애청과 남로당원 수천 명을 동원하여 제주 전역 89개 오름에서 일제히 봉화불(횃불)을 올렸다. 이들은 일제히 총성을 울리고 인항가와 적기가를 부르고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취지의 격문을 뿌리며 잠자는 제주도 주민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12개의 경찰지서와 애국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해 가지고 일시에 습격하여 살인, 방화, 납치를 자행했다. 이것이 4월 3일의 폭거요 반란이었다.
북한의 박설영은 그의 논문 139쪽에 1948년 8월 20일자 로동신문을 인용하여 4월 3일, 하루에 경찰지서 2개소 방화, 경관 11명, 테러단원 11명, 악질반동 10여 명을 처단하고 5명의 반동분자에게 중상을 입히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고 기록했다.
4·3을 전후하여 무장유격대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이덕구가 사망했을 때 노획한 극비 상황일지인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일 것이다. 이 극비 보고서는 1948년 3월 15일부터 7월 24일까지 무려 4개월 10일간에 이르는 투쟁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을 보면 제주도 적화를 위한 무장 기습테러 행위가 3월 18일부터 시작되어 4월 3일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 5월 10일의 선거를 무력화시킬 때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격대의 상황일지에 의하면 4월 3일 하루에 경찰관 4명이 사살 당했고, 8명이 부상 당했으며 2명이 행방불명되었다. 민간인 8명이 사살됐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무장폭도 3명이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됐다. 유격대 상황일지에 나타난 유격대의 가해 현황은 충격적이다. 4월 3일부터 7월 24일까지 110일 동안 인민유격대는 31회에 걸쳐 지서를 습격했다. 경찰관 74명 및 경찰가족 7명을 살해하고 23명에 부상을 입혔다.우익 민간인 226명을 살해하고 22명을 납치해갔으며 28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120채의 가옥을 소각하고 940개소의 전선을 차단하고 170개소의 도로를 파괴했다.
피해상황을 숫자 표현만으로 보면 4·3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기 어렵다.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은 공비사령관이 직접 꼼꼼하게 기록해 놓은 상황일지다. 지면 관계상 8개 지역에 설치된 유격대 조직들이 벌인 습격상황을 모두 소개할 수 없기에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부분만 소개하도록 한다.
제주읍의 4월 3일(유격대 일지)
오전 2시를 기하여 삼양, 화북, 외도의 3개 지서를 일제 습격했다. 삼양지서에서는 경관 6명을 상대로 우군 16명이 99식 소총 1정, 다이너마이트 2발, 휘발유탄 4발을 보유하고 상호 접전하에 지서 정문까지 육박하여 유리창을 죽창으로 파괴했지만, 적의 발포가 극심한데다가 응원대가 올 것을 염려하여 퇴각했다. 상호간 피해는 없었다.
화북지서에서는 경관 5명을 상대로 아 부대 14명이 99식 소총 1정, 다이너마이트 4발, 휘발유탄 4발 나머지는 창을 가지고 4개 부대로 편성하여 습격했다. 처음에 전선 2개소를 절단하고 수류탄 1발 투척한 결과, 지서 내의 램프에 불이 붙어 지서가 전소됐다. 경관 1명이 도주하고, 급사(필자 주 : 심부름하는 급사) 1명이 즉사했다. 1개 분대는 경관 사택을 습격하여 경관 부부를 살해하고 카빈소총 1정을 압수했고, 1개 분대는 경관 사택을 습격하여 수류탄을 투척한 결과 경관 1명이 부상했다.
외도지서에서는 경관 6명을 상대로 아 부대 14명이 99식 소총 1정, 다이너마이트 3발, 휘발유탄 3발. 나머지는 창으로 습격하여 경관 1명을 숙청하고 즉시 퇴각했다. 돌아오던 중 노형리 부근에서 적 기동대와 부딪쳤으나 약 5분간 접전한 후 이를 격퇴시켰다.
애월면의 4월 3일(유격대 일지)
4월 3일 오전 2시, 구엄, 애월 양개 지서를 습격했다. 구엄지서에서는 개(경관) 9명을 상대로 아 부대 120명이 99식 소총 4정 다이너마이트 5발, 나머지는 죽창으로 습격했다. 숙청 대상 반동 1명당 아 부대원 5명씩 배치했고, 지서에는 약 40명을 배치했다. 처음에 지서를 향하여 다이너마이트를 투척하고 그 폭발음을 신호로 일제 습격하기로 하였으나, 애월지서 습격부대가 약속돼 있던 시각보다 약 30분 전에 습격한데다 구엄과 애월 간의 전선을 절단 하지 않아서 애월지서에서 구엄지서에 지원을 요청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사전 발각됐다. 지서 내부에는 개(경관) 3명과 향보단원 2-3명이 있었고 나머지 개(경관) 6명은 집에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를 투척하자 적은 지서 내에서 발사하기 시작했고, 우리 부대도 이에 응전하면서 일보 일보 전진해 나갔다. 이때 악질 개 송원화 집에 배치한 분대는 송원화를 붙잡아 단창으로 찔렀으나 단창을 빼자마자 송은 도주했다.
다른 분대는 반동 2명과 반동 가족 3명을 숙청하고 가옥 2호를 소각한 후 소학교에 집합하여 지서에서 울리는 사이렌을 들으면서 인항가(人抗歌)와 적기가(赤旗歌)를 고창하면서 지서 습격대를 지원하러 갔다. 지서 습격부대와 합류하여 새 공격으로 들어갔으나 약 30분 후 외도(外都) 지서의 기동대가 출동함에 퇴각했다. 우리 유격대 2명 희생됐다.
애월지서를 향해서는 아 부대 약 80명이 습격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던지고 지서장 송달호에게 경상을 입히고 퇴각했다.
한림면의 4월 3일(유격대 일지)
4월 3일 오전2시를 기하여 한림지서, 저지지서, 한림여관, 신창여관, 매립지여관 및 기타 반동들의 집을 향해 일제히 습격을 단행했다. 한림지서의 개(경관) 7명에 대하여 아 부대 15명 (99식 총 1정, 다이너마이트 12발, 가솔린탄 12발)을 배치했고, 한림여관의 개(경관) 7명에 대하여 아 부대 6명(99식총 3정, 군도 1본, 나머지 창)을, 신창여관의 서청(서북청년단) 7명에 대해여는 아 부대 15명 (99식 총 1정, 군도 1본, 나머지는 창)을, 각 경관급 반동 가택에는 나머지 31명 배치했다.
매립지 여관에서는 개 1명 및 대청 1명을 숙청했고, 신창여관에서는 서청 7명을 숙청했다. 한림여관에 숙박했든 기동대와도 접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이어 각지에서 투쟁을 전개한 결과 1명은 사택에서 숙청하고, 면장 1명과 독촉(獨促, 독립촉성회) 최고 간부 1명에게 각각 부상을 입혔고, 한림지서 습격부대 동무들은 다른 부대들이 적 기동대와 접전하는 총성에 놀라 전부 도피하는 바람에 소총수 1명만 남은 상태였기에 투쟁이 불가능했다.
저지지서 습격은 직전의 누설(푸로파카트의 발생)로 사전 중지 됐고, 전선절단 4개소, 도로파괴 2개소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전에 지정된 집합장소인 ‘미마루 동산’에 전원 집합한 후, 금악(今岳)에 이르기까지 무장 시위를 단행했다. 금악에서 반동이 소지한 일본도 1정을 압수하고 오전 9시 아지트에 귀환하자, 저지지서원 6명과 경찰 후원회원 25명이 금악을 습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수하고 즉시 출동하여 적을 격퇴시키고 후원회원 3명을 포로로 잡아 개전시킨 후에 석방했다.
아래는 제주읍 유격대가 제주읍을 상대로 한 일자별 상황일지다.
3월 18일 : 도련리의 악질 향보단을 습격하고 이를 해산시킴과 동시에 반동 가옥 3호를 완전 파괴하고, 반동 7명을 부상시켰다. 향보단이란 55세 이하의 청장년으로 조직된 경찰 보조단체를 말한다.
4월 1일 : 영림서원(營林署員) 2명을 포로로 잡고, 3일 후인 4일에 개전시킨 후 석방했다.
4월 3일 : 생략
4월 4일 밤에는 아군 30명으로 영평리 상동 대청 사무소를 습격하여 사무소를 완전 파괴하고, 문서 일체를 압수했다. 대청 동원부장 1명을 숙청하고, 반동 2명에게 중상을 주고 돌아오는 도중 월평리 거주 경관의 집을 습격하였으나 경관이 부재중임으로 가옥을 파괴한 후 가옥 약 4분지 1을 소각한 후 의류 다수를 약탈했다.
4월 8일에는 4인 1조로 이호리 대청 거두 1명을 숙청하고, 8인 1조로 삼양지서를 제2차 습격하였으나 사전 발각되어 퇴각했다.
4월 12일에는 4인 1조로서 오라리에 거주하는 악질경관 송원화 부친을 숙청한 후 동 가옥을 소각했다.
4월 14일에는 외도지서를 제2차 습격했다. 송칠 동무가 유도작전을 지도하다가 희생 당했다.
4월 16일에는 화북에서 우군 5명이 경관과 대청원에게 포위당했으나 권총으로 경관 1명을 즉사케 한 후 전원 무사히 탈출했다.
4월 18일에는 삼양지서를 제3차 습격했다. 경관 16명을 상대로 아 부대 22명이 총 6정을 가지고 습격하였으나 사전 발각되어 아 부대원 1명이 희생당했다.
4월 19일에는 외도지서를 제3차 습격하여 수류탄을 투척한 결과 경관 1명이 부상되고 지서가 반파되었다.
4월 20일에는 월평리에서 엿장사로 가장한 스파이 2명을 숙청했다.
4월 27일에는 리구장 집에서 경관이 식사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아 부대 16명이 이를 포위하였으나 경관(개)은 도주해 버리고 반동 구장 1명을 잡아다가 숙청했다.
4월 28일에는 노형리 2구에서 적 기동부대 22명과 아 부대 20명이 약 6시간 접전한 후 이를 격퇴시켰다. 경관(개) 3명이 부상당했고, 경관 모자 1개, 문서 다수, 카빈 탄창 2개, 카빈 탄환 9발, 백미 1두(斗)를 노획했다.
5월 1일에는 경관 7명, 반동 2명이 화북리 3구에 침입한 상태에서 아 부대원 20명이 포위하고 도주하는 경관들을 추격했지만 반동 1명만 숙청했다.
5월 3일~7일까지에는 동, 서 각 지구에 아 부대 각각 1개 대대씩 주둔하면서 1개 대대는 본부 근무했다. 노형리에서 엿장사로 가장한 스파이 2명 숙청하고, 오라리 2구에서 반동 3명을 숙청하고, 오라리 2구에서 적 기동부대 약 30명과 20분간 접전 후 적의 다른 부대에 포위당해서 퇴각했다. 상호간 희생은 없었다. 월평리에서 4월 4일 소각하다가 남은 경관집을 완전 소각했다.
5월 6일에는 서 대대가 산으로 가던 도중 적 기동대 약 30명과 조우하여 약 8시간 동안 접전 후 이를 격퇴했고, 이 과정에서 경관 2명이 즉사했고, 우리 대원도 2명이 희생됐다. 5월 7일에는 화북리의 반동분자 4명, 삼양리 2구의 반동분자 2명, 삼양리 3구의 반동분자 2명, 도련리 1구의 반동분자 2명 계 15명의 반동분자를 숙청했다. 죽성리에서 반동분자 3명을 숙청했다.
5월 8일에는 삼양리로부터 화북에 이르기까지의 전선을 완전 절단했다. 아침에는 죽성의 반동 거두의 가옥 4호를 소각하고, 반동분자 11명을 숙청했다. “고다시” 반동의 집 2호를 소각하고, 반동의 가족 2명을 숙청했다. 아라리 1구의 반동 가옥 2호를 소각하고, 반동 가족 2명을 숙청했다.
5월 9일에는 농교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적에게 위협을 주었다.
5월 10일에는 도두리의 반동 4명을 숙청했다. 읍사무소(투표장소)에 수류탄 2발을 투척하여 투표를 방해했다.
5월 15일에는 오현중학교에 수류탄 1발을 투척했다.
5월 18일에는 화북리의 반동 1명을 숙청했다.
5월 25일 2시, 특무대원 3명이 단선 을지구 당선자(필자주 : 당시 북제주군 갑·을선거구 선거는 유효투표수 미달로 무효가 되고 1949년에 재선거가 실시되었음) 한림면 출신 양병직의 아지트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대원 1명이 검거됐다.
6월 14일에는 표선의 반동 1명을 회천에서 숙청했다.
7월 9일에는 월평리에서 엿장수로 가장한 스파이 2명을 숙청했고, 반동분자 31명을 숙청했다.
이상의 제주읍 합계는 다음과 같다. 지서 습격 수 7회, 지서 소각수 1, 지서 파괴수 1, 경관 사망 5명, 경관 부상 5명, 경관(개) 가족 사망 3명, 반동분자 숙청 66명, 반동분자 가족 숙청 4명, 반동 부상 9명, 경관가옥 소각 2호, 반동가옥 소각9호, 반동 가옥 파괴 3호.
무기노획에 대해서는 카빈소총 1정. 탄창 2개, 탄환 9발 전선 전단 349개소, 도로파괴 140개소, 교량파괴 1개소.
아군 피해로는 대원 3명이 전사했다.
제주도 인민군이 벌이는 일방적인 테러 행위에 대해 미군정이 토벌을 결심한 시점은 5·10 선거가 파탄 난 시점이었다. 5·10 선거가 파탄나자 5월 15일,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전격 투입했고, 대규모 지원 경찰 및 청년단을 투입했다. 미군정 주도의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면서부터 제주도는 쌍방 간의 전투장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좌익들은 그 책임이 미군정에 있다하고, 객관적 사실들은 그 책임이 제주도 남로당과 인민유격대의 끝없는 테러행위와 반란행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정부보고서가 본 5·10선거 방해작전
정부보고서의 206~210쪽을 보면 제주 4·3 폭도들의 선거사무소 피습현황이 나열돼 있다. 선거방해 행위는 4월 18일부터 5월 10일까지 지속됐다. 특히 선거 당일인 5월 10일의 방해책동은 대단했다.
4월 18일 새벽 제주읍 도평리 투표소 피습당해 선거기록을 빼앗김.
4월 19일 조천면 신촌리 투표소가 피습, 화재로 선거기록 소실.
4월 21일~22일 이호리 선거사무소 피습, 선거기록 탈취.
4월 21일~22일 내포리 선거사무소 피습, 선거기록 탈취.
4월 21일 동일리 선거사무소 피습, 선거기록 탈취.
4월 21일 모슬포 면사무소 피습.
4월 22일 대정 선거사무소 피습 위원장을 죽이고 선거기록 탈취.
4월 30일 새벽 대정면 신평리 선거관리위원 피살.
5월 1일 제주읍 도평리에서 마을 선거관리위원장 피살.
5월 5일 화북리 선거관리위원장 피살.
5월 3일 조천면 조천리 선거관리위원들 전원 사퇴.
5월 5일부터 폭도들은 주민들을 산으로 안내, 선거에 참여치 못하게 함.
5월 10일 중문면 투표소 기습당함.
“ 성산면 투표소 60명(폭도: 필자 주) 집단에 의해 방화.
“ 제주읍 다이나마이트 2개 폭발.
“ 제주공항 300여 명(폭도 : 필자 주) 총격전.
“ 표선면 투표소 기습, 2명 피살, 투표용지 파손.
“ 구좌면 송달리 투표소 피습, 2명 피살, 1명 부상, 가옥 7채 불.
“ 조천면 14곳 투표소 제 기능 못함.
“ 조천면 북촌리 투표소 불에 탐.
“ 표선면 가시리 투표소 피습, 이장과 학교장 피살.
“ 성산면 투표소 피습, 4명 피살.
제주도 3개 선거구 총유권자 85,517명 중 53,690명 62.8%가 참여함. 남제주군 선거구는 86.6%가 참여하여 무소속 오용국이 당선되었으나 북제주군 갑구는 43%, 북제주군 을구 46.5%로 2개 선거구가 무효가 되었다. 북한과 인민유격대를 편드는 정부보고서 역시 인민유격대의 선거방해 행위와 폭력테러 행위들을 고스란히 인정한 것이다.
UN 한국임시위원단이 본 5·10 방해 작전
UN 한국임시위원단 보고서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방해 책동이 있었지만,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선거가 비교적 조용히 그리고 능률적으로 진행되었다. 5월 8일에서 10일간의 선거 주말 동안 57건의 습격이 있었다. 2월 7일부터 5월 14일까지 선거종사자들과 후보자 17명이 살해됐고, 65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관과 그 가족 56명이 살해됐고, 142명이 부상을 입었다. 반면 공산주의자들과 폭도들 261명이 살해됐고, 123명이 부상을 입었다.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방해책동에 의해 주민들이 투표를 하지 못해 국회의원을 2명씩이나 뽑지 못한 곳은 오직 제주도 뿐이다. 4월 18일부터 5월 10일까지 무려 3주 동안이나 거의 매일 투표소를 기습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선거관리요원들을 살해하고 선거인 명부를 몽땅 탈취하여 불태우고 제주도민을 산으로 끌고 가 투표를 하지 못하게 하고 공무원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을 놓고 정부보고서는 이 모든 행위가 미군정과 경찰과 서북청년단들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민중항쟁이라고 규정했다. 대한민국 정부보고서가 아니라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보고서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남로당 기관지가 본 5·10 방해 작전
1948년 5월 20일 전후로 발간된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 92-94호에는 4·3 투쟁에 대한 기사와 함께 5·10 ‘망국단선 분쇄투쟁’ 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있다. 대략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당일에는 비가 내렸다. 제주도의 애국적 인민들은 투표소로 가지 않고 인민자위대가 있는 산악으로 올라왔다. 갈대를 엮어 임시 지붕을 만들고 그 밑에서 1,000명 또는 400명 단위로 비를피하고 있었다. 연기가 나는 모든 곳에는 모두 인민들이 집결돼 있었다.
경찰서와 재판소 등 놈들의 권력기관들이 모여 있는 ‘성내’를 빼놓고는 완전히 투표를 보이코트하였다. 투표소들은 수류탄으로 폭파되었고 반동들은 숙청됐다. 전도에 걸쳐 공포와 전율이 극도에 달했고, 인민들은 무서워서 감히 투표장에 나설 수 없었다. 경찰이 투표를 하라고 하면 인민들은“우리가 투표하면 매국노라 인민재판으로 맞아 죽는데 누가 하겠느냐‘며 받아쳤다. 감히투표상자를 나를 인민도 없었다.
동리 사람들은 남녀노유가 곤봉을 들고 나와 투표함을 가져온 자에게 들이댔다. “아무리 돈벌이라 하지만 나라 파는 그릇을 짊어지고 다니는 놈이 어디 있느냐”며 질타하여 쫓아버렸다. 투표 상자를 지고 가던 서청원 단원들은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 국경들이 나서서 투표를 강요했다. 인민들은 “우리는 못 나간다”했고, 국경은 “안 나가면 쏜다”는 행패를 부렸다. “쏘아도 나갈 수없다”, “그러면 몰살당해도 원망마라”이에 숨어 있던 인민들이 모두 가슴을 풀어 제키고 쏠래면 쏘아라 하며 들이 댔다. 국경들은 이 기개에 기가 죽어 돌아갔다. 이에 인민들은“인민공화국만세!”를 불렀고 이 소리는 고을을 메아리 쳤다.
남로당 본부가 직접 밝힌 5·10 선거 방해 폭동이 위와 같은데도 고건과 박원순 등이 작성한『정부보고서』에는 5·10 선거 방해 책동이 군경의 탄압에 반발하여 일어선 정당한 봉기와 민중 항쟁이었다고 기록돼 있는 것이다.
북한이 본 5·10 방해 작전
북한의 박설영은 력사과학 론문집 147~150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남로당 기관지 내용과 대동소이 하다.
남북련석회의 결정과 호소문에 적극 호응한 제주도인민들은 거기에서 제시된 숭고한 과업을 관철하기 위하여, 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하여 투쟁에 과감히 돌입하였다. 선거 날을 며칠 앞두고 약 5만 명의 제주도인민들은 한나산(필자 주 : 한라산의 북한식 표기)에 올라가 집단적으로 투표참가를 거부하였다.
단독선거가 감행되는 5월 10일 새벽에 제주도인민들은 총과 수류탄, 칼과 몽둥이, 휘발유병, 낫과 망치를 들고 원쑤들을 향하여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봉기한 군중은 제주읍의 투표장으로 되었던 관청과 세무서, 신한공사 출장소 등을 습격 파괴하였다.
청년학생들은 어깨를 걸고 단선결사반대를 소리 높이 웨치면서 시위를 단행하였으며 농민들은 적 ‘토벌대’의 준동을 저지시킬 목적으로 도처에서 교량과 통신선을 파괴하고 중요 도로에는 바위돌을 쌓아놓거나 웅뎅이를 파서 적들의 기동을 차단하였다. 5월 10일 오전 9시에는 조천면에서 봉화투쟁이 벌어지고 군중들의 함성시위가 일어났다. 조천-함덕 간 도로를 위시하여 각지 도로는 시위 군중에 의하여 차단되었다. 함덕에서는 9일 밤부터 밤을 새워 봉화가 올랐는데 이것을 신호로 전도민이 봉기하였다.”(로동신문 1948.5.12)
유격대는 한나산에서 일제히 내려와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반동을 처단하는 투쟁을 벌였다. 유격대는 이날 외도, 고산, 무름, 삼양. 세화, 도리, 화순, 남원, 위미, 아라, 중문 등지의 수많은 경찰지서, 출장소들을 습격파괴하고 악질경관들을 처단하였으며 감금된 인민들을 구출하였다. 삼양경찰지서 습격에 참가한 60여명의 봉기자들은 견고하게 구축한 화점을 과감하게 까부시고 악질경관 3명을 처단하였으며 급보를 받고 달려오는 적 응원대를 불의에 포위 습격하여 수십 명을 살상하고 무기를 비롯한 많은 장비들을 로획하였다. 봉기자들은 또한 평대, 안덕, 조천의 선거사무소를 습격하고 불태워 버렸으며 국방경비대의 병영과 반동들의 소굴을 습격하였다.
인민들의 이러한 거세찬 투쟁의 불길은 적지 않은 반동지배층 내에 동요와 분렬을 조성시켰으며 일부 선거위원장, 선거위원들은 선거사업을 포기하고 인민의 편으로 넘어왔다. 이리하여 제주도에서 5·10 단선은 완전히 파탄되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 유피통신은 “제주도에서는 치렬한 전투가 벌어져 선거관리의 반수는 사임하여 버렸다. 그리하여 선거가 불가능하게 되여 6월 23일로 연기되였다”고 비명을 올렸다. 당시 제주도 선거위원장이란 놈은 중앙선거위원회에 선거 성적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1948년 5월 22일 로동신문은 이렇게 썼다.
“북제주의 134개 투표구 중 투표함을 거둔 것이 겨우 64개, 그중 62개의 투표함에는 몇 표씩밖에 들어있지 않으며 2개의 투표함은 빈통이었다 남제주에서도 71개의 투표소에는 전혀 투표가되지 않았다”
노동당이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119~122쪽에는 이런 표현들이 있다.
봉기자들은 적군 와해공작을 진공적으로 벌였다. 국방경비대에 침투하여 5·10 단선의 매국적 본질을 해설 선전하였으며, 애국자들과 인민을 테러 학살하는 데 가담하지 말라, 인민들과 함께 반미구국투쟁에 궐기하라로 호소했다. …4월 27일에는 국방경비대의 한 개 중대 100여 명 군인들이 련대장을 처단하고 애국의거를 단행함으로써…적들도 놈들대로 ‘선거’놀음을 기어이 성사시켜 보려고 ‘5·10 토벌공세’를 준비하였으며, 증강된 미군부대외에 1,500여명의 무장경찰, 3,000여 명의 국방경비대, 수천명의 무장테러단과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은 적들의 토벌공세를 맞받아 주도권을 틀어잡고 4월말~5월초부터는 유격대의 무장투쟁, 대중의 폭동과 시위 등 각종 형태의 투쟁을 밀접히 결합시키면서 ‘선거자등록의거부’. ‘선거자명부의 탈취’, 선거사무소의 습격과 파괴, 경찰과 반동의 처단 등의 투쟁을 벌여 나갔다. 5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인민유격대는 적에 대한 기습작전을 더욱 맹렬하게 벌렸는데(주 : 이는 저들이 주장하는 4·28 평화협상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내용임). 5월 7일, 애월면 장전과 수산 사이에서 있었던 전투, 5월 8일의 도순, 하순 상, 하 가리전투 등은 대표적인 전투들이었다.
인민들은 낮에는 “벼락데모”, 밤에는 “횃불시위”를 벌렸고, 5월 8,9일에 가서는 여러 공장, 기업소의 로동자 사무원과 적 통치기관의 하급관리에 이르기까지 파업과 태업으로 선거를 반대하는 립장을 표현하였다.
선거 날을 며칠 앞두고 약 5만명의 인민들이 한나산에 올라가 집단적으로 투표참가를 거부하였다…봉기자들의 맹렬한 습격에 의하여 많은 선거구들에서는 투표함마저 비치하지 못하였으며 선거자 명부는 거의가 탈취당하였다. 단독선거가 감행되는 5월 10일 새벽에 제주도 인민들은 총과 수류탄, 칼과 몽둥이, 휘발류병, 낫과 망치, 돌과 삐라를 안고 원쑤들을 향하여 총 공격을 시작하였다….
유격대는 한나산에서 일제히 내려와 경찰지서 습격과 반동을 처단하는 투쟁을 벌렸다. 이날 외도, 고산, 무릉, 삼양, 세화, 도리, 화순, 남원, 위미, 아라, 중문, 함덕 등지의 수많은 경찰지서, 출장소들을 습격 파괴하고, 악질 경관들을 처단하였으며, 감금된 인민들을 구출하였다…악질경찰관 3명을 처단하였으며, 급보를 받고 달려오는 적 응원부대를 불의 습격으로 포위하여 수십 명을 살상하고 많은 무기와 장비들을 로획하였다. 봉기자들은 또한 평택, 안덕, 조천의 선거사무소를 습격하고, 불태워 버렸으며 국방경비대의 병영과 반동들의 소굴을 습격하였다….
이리하여 제주도에서의 5·10 단선은 완전히 파탄되었다. 미군정장관 띤 놈도 제주도의 선거무효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 인민봉기는 유격투쟁과 각종형태의 투쟁이 결합된 새로운 특징을 지닌 반미구국투쟁이었으며 전체 도민의 30만 중 24만 명이 궐기한 대중적이고 전인민적인 항쟁이었다.
이 책의 124쪽에는 전국적인 5·10 반대 투쟁을 이렇게 묘사했다.
서울에서는 종로를 비롯한 주요 거리에서 노동자, 청년학생, 시민들이 삐라를 뿌리고 시위를 했다. 5월 10일에는 을지로 6가 선거장, 공덕동, 내자동 장충동 1가 제1투표소, 중구 제8투표소 등 수많은 투표소가 파괴되었고, 인천, 개성, 양평, 광주, 수원, 구원, 평택, 시흥, 이천, 용인, 포천, 파주, 고양, 김포 등 오안의 지방농민들이 경찰지서와 선거장들을 기습 파괴했다. 대구를 비롯하여 거창, 영주, 예천, 안동, 영양, 문경, 상주, 김천, 선산, 달성, 의성, 청송, 군위. 칠곡, 경산, 청도, 경주, 포항 그리고 경상남도의 통영, 함양, 합천, 산청, 진주, 마산, 동래, 부산 등의 애국적 인민들이 경찰지서, 선거장, 관공서들을 파괴했다.
전라북도 부안, 옥사, 옥구, 전주, 군산, 이리 완주, 김제, 정읍, 고창, 임실, 남원, 순창, 진안, 무주, 장수 등과 전라남도의 광주, 목포, 여수, 장흥, 순천, 화순, 광산, 장성, 함평, 나주, 영광, 보성, 담양, 구례, 곡성 등, 충남에서는 대전, 홍성, 예산, 천안, 서산, 당진, 보령, 청양, 논산, 금산 등, 충북에서는 청주, 충주, 음성, 영동 등지, 그리고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지역에서 선거 방해를 위한 파괴와 살상 활동이 이어졌다.
북한이 지휘한 5·10 선거 저지 투쟁과 폭력테러 행위들을 북한 스스로가 위와 같이 적나라하게 인정했는데도 남한 좌익들은 5·10 선거 저지를 위한 반정부 폭동을 민중(인민)항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