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빨갱이인지 모르는 캄캄한 상태에서 제주도 토벌군에 대한 물갈이가 필요했다. 대전에 있던 제2연대가 제주도로 투입됐다.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가 12월 29일 대전에서 제주도로 이동한 것이다. 이때의 공비는 1920년생인 이덕구의 지휘 하에 있었으며 상당수가 사살되고 귀순하여 그 수가 많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러한 이유로 제주도에 발령됐던 비상계엄령은 1개월 보름만인 12월 31일에 해제됐다. 하지만 이는 너무 성급한 조치였다.
제주도 공비는 1개 대대 이상이었으며 암암리에 조직을 확대-강화하고 있었다. 1949년 1월 1일 새벽 진눈깨비가 내리는 시각에 이덕구가 인솔하는 공비 주력이 오동리 화엄사에 주둔하던 제3대대를 포위 기습하였다. 교전 끝에 공비는 10여 구의 시체를 유기하고 도주했으며 제3대대 소속 7명이 전사했다. 제2연대장은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 1월 4일부터 항공기와 함정의 지원을 받아 토벌작전을 폈지만 지형 미숙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작전 중 연대장은 많은 주민들이 한라산 동굴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소탕작전보다는 선무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토벌작전을 하기 위해서는 산사람들의 근거지가 되는 산간마을을 그냥 둘 수 없었다. 함대령의 과감한 조치에 따라 산간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군이 마련해준 수용소로 내려와 살거나 아니면 산속으로 들어가 살아야만 했다. 함대령이 불쌍하게 보았던 사람들이 바로 산간마을에 살다가 공비들에 속아 멋모르고 산속으로 간 사람들이었다.
함대령은 이들을 불러 내리기 위해 갱생원(피난민집단수용소)을 설치하고 집중적인 선무활동을 벌였다. 1개월 사이에 1,500여 명이 산에서 내려와 갱생원으로 갔다. 이와 아울러 마을주민을 상대로 홍보했다. 읍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면민 대회를 개최하여 공비들의 만행을 소개했고, 새로 도입된 신무기들을 전시하여 공비 가족들로 하여금 공비들이 이런 신무기를 상대로 하여 싸우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리고 갱생원에는 많은 지원과 관심을 쏟았다. 이에 주민들은 군을 신뢰하게 되었고, 이에 비례하여 무장공비들과 산사람들도 줄을 이어 하산했다. 돌아선 주민들의 제보로 인해 2연대는 1월 13일, 남제주군 남원면 의귀리에서 공비 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