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에 대한 정부보고서는 김대중-노무현-고건-박원순 등 친북좌익들에 의해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에 객관성이라는 형식적 요건을 상실하고 있다. 정부보고서의 표지부터가 붉은 색인 것이다. 정부보고서는 진상조사의 주안점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주민희생이라고 규정했다. 이와 아울러 정부보고서는 4·3 사건이 북한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온순하게 생업에 종사하던 제주도 양민을 미군정, 경찰, 서북청년단이 일방적으로 학대했기에 주민들이 이에 반발하고 항거했는데도 미군정이 무자비하게 학살-초토화했다는 것이 정부보고서의 핵심인 것이다.
북한의 박설영이 그의 논문 ‘제주도 인민의 4·3 봉기와 반미 애국투쟁의 강화’의 서두에서 밝힌 것이 차라리 4·3 사건의 성격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남조선 전지역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제주도에서도 미제침략자들과 우리 인민들 사이, 진보와 반동 사이의 모순대립이 첨예화되었다.”(130쪽) 좌파들의 조국인 북한에서도 인정하는 명백한 이데올로기 사건을 놓고 고건-박원순-강만길 등 좌파들이 미군정의 탄압에 대한 정당한 저항사건인 것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이 나라 좌익들이 얼마나 대한민국 모략에 혈안이 돼 있는지는 이들이 주월한국군을 양민학살자로 몰아간 데에 매우 잘 나타나 있다. 1999년에 한겨레21의 고경태 기자가 강정구와 한홍구를 동원하고, 구수정이라는 얼굴도 없는 여자를 베트남에 보내 “구수정 통신원”의 특종이라며 32만5천의 주월한국군을 모략했다. 양민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여 총 5천명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그들만의 주장이었다. 구수정이라는 여자 통신원은 “월남전”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정의했고, 미군, 한국군, 월남군 그리고 다른 6개 참전국들을 민족해방을 방해한 반역세력으로 몰았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희생당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미군보다 잔인했던 용병”으로 규정하고, 월남에서 “친절한 따이한”이라는 명성을 세웠던 주월한국군을 살인기계들이라고 못 박았다. 한계레21을 중심으로 벌인 저들의 모략과 모함의 일단을 보자.아래는 한겨레21 제273호(1999. 5. 6)에 실린 글이다.
“먹빛 얼굴을 하고 땅을 굽어보고 있던 하늘은 바람을 앞세워 나무의 머리채를 흔들었다. 빗방울은 제 몸을 차창에 던지며 투두둑 눈물을 떨군다…젖먹이까지 죽이고도 모자라 무덤조차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하늘도 눈이 멀던 그날에…아이들의 머리를 깨트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 넣었다…여성들은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가지 군화발로 짓밟았다…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켰다…한국군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에는 캔디나 케이크가 물려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었다. 아마도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한 곳으로 모으는 한 수단이었는 듯하다…어린이, 임산부, 70세 이상의 노인까지 50명을 한곳에 몰아넣고 죽였다…주민을 몰아넣고 기관총을 난사했다…주민들을 한 집에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난사한 후 죽은 자와 산 자를 통 채로 불태운다.”
필자는 육군 소위-대위 시절에 월남전에 44개월 동안 참전했다. 당시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은 “열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단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명령과 “한국군 장병 모두는 각자 외교관이 되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든 장병은 이 명령을 철저히 이행했다. 그래서 한국군은 주민들로부터 최고의 신뢰를 받았고, 그런 주민들의 제보로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가족과 떨어져 국가의 명에 따라 양민은 철저히 보호지원해 주면서 그 주민들의 제보를 가지고 공산주의자들과 싸운 참전용사들에 대해 이러한 악의적인 왜곡행위를 하는 존재들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다.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32만 5천의 주월한국군 출신들이 불과 몇 명의 골수좌익들에 의해 무려 2년 동안이나 꼼짝 없이 양민을 학살한 집단으로 매도당한 것이다. 이런 모함은 인터넷으로도 폭넓게 이루어졌고, 영문 번역을 통해 전 세계에 확산됐다. 이로 인해 파병했던 장병들은 부인과 자식들로부터도 싸늘한 대접을 받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필자를 포함한 3명의 우익들이 명동 은행회관에서 저들 4명과 공개토의를 했고, 필자는 그들에게“32만 5천명이 9년 동안 양민을 보는 대로 죽였다면 겨우 5천명 밖에 못 죽였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 당장 답을 해보라”하여저들의입을막은바있다 30년도 안 지난 월남참전 역사에 대해서도 이렇게 무지막지한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인데 하물며 60여 년 전에 발생한 제주사건에 대해서야 오죽하겠는가?
정부보고서는 4·3을 ‘통일운동’이라고 정당화 했다. 2008년 11월, 문근영의 외조부 류낙진이 문제가 됐을 때 좌익들과 좌경 매체들은 일제히 35여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비전향장기수 류낙진을 ‘통일운동가’라고 찬양들 했다. 이런 통일운동가가 키운 외손녀이기 때문에 여배우 문근영이 익명으로 8억 5천만 원을 기부할만큼 아름답게 컸다는 뉴스들을 쏟아냈다. 이런 좌파들처럼 노무현-고건-박원순 등 좌파들 역시 제주도 공비를 ‘무장한 통일운동가’라고 미화했다. 통일을 추구하는 남로당 세력 및 제주 무장폭동세력이, 통일을 반대하는 미군정과 이승만을 상대로 하여 투쟁한사건이 제주 4·3 사건이라는 것이다.
제주 폭동을 진압한 것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기로는 공비들이 더 악랄했다. 전쟁과 토벌에는 무기가 동원되고, 무기가 동원되는 충돌에는 반드시 억울한 희생자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양민이 많이 희생된 이유는 무장공비가 피아식별이 안 되는 양민을 방패로 삼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주도 폭도들은 민간인으로 위장을 했기 때문에 유니폼을 입은 토벌대로서는 누가 적이고 누가 순수한 민간인인지 피아식별 자체가 안 되었다. 무장공비들은 지금의 카다피처럼 민간인들을 방패로 하여 싸웠다.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더 많이 발생했던 것이다. 정부보고서는 이런 측면을 간과하거나 숨겼다.
4·3에 대한 정부보고서는 좌파가 집권했을 때, 좌파들이 주동이 되어 만든 것이기에 객관성이 없다. 그 책은 좌파들에만 읽혀야할 좌파들의 자위용 교과서일 뿐이다. 정부보고서가 말하는 4·3 사건의 본질과 성격은 북한 박설영이 쓴 위 논문의 아래 표현과 일치한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는 폭발적인 투쟁도 아니었으며 우연적인 폭동도 아니었다. 그것은 8.15후 새사회 건설과 나라의 자주적인 통일독립을 위하여 줄기차게 벌려온 제주도 인민들의 선행투쟁의 계승 발전이었으며 참을 수 없이 악랄해지는 적들의 식민지 파쑈통치와 민족분렬 책동을 반대하고 민주주의적 자유와 나라의 통일을 위한 정의의 반미애국투쟁이었다”
정부보고서를 작성한 주체들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정부보고서는 박설영 논문과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이라는 대남공작 역사책을 그대로 수용한 이적문서다. 그리고 이를 작성한 노무현-고건-박원순-박만길-김삼웅-양조훈-김종민 등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반란자들을 옹호한 반역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