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리 사건
4·3 왜곡에 앞장 선 정부보고서와 추미애 등 좌익들은 군경에 의한 무차별 대량학살론을 전개하기 위해 북촌리 사건을 아래와 같이 왜곡해서 내건다.
“이 사건은 제2연대 연대장 함병선 대령에 의해 저질러졌다. 1949. 1. 17 아침, 일부 군 병력이 이동하던 중 북촌마을 어귀에서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군인 2명이 사망했는데 2연대가 이에 대한 무분별한 보복으로 마을을 불태웠다. 2연대는 무장대와 내통한 빨갱이 가족을 찾아낸다며 주민 약 400명을 처형했다.”
좌익들과 정부보고서는 북촌리 사건을 위와 같이 정리해 놓고, 이 사건이 바로 토벌대가 저지른 대표적인 대량살상 사건이라 주장 한다. 정부보고서는 북촌리에서 400명이 처형됐다고 하고, 추미애는 300명 이라고 했다. 정부보고서가 추미애의 기록을 뻥튀기시킨 것이다.
제민일보 4·3 취재반이 쓴 “4·3은 말한다” 4권은 북촌리 부분을 이렇게 묘사했다.
“북촌리는 일제 때부터 자존심 강한 마을이었다. 해방 후에는 항일독립운동가 출신들이 주도한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똘똘 뭉쳐있었다. 북촌리는 1947년 8월 13일 경찰관에게 뭇매를 가한 소위 ‘8.13 사건’을 계기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948년 5월 16일에는 북촌 포구에 피항한 배를 조사하던 중 동승했던 경찰관 2명을 살해했다. 이 같은 사건이 벌어지면서 청년들은 수배를 받아 일찍부터 피신생활에 들어갔다. 입산시기도 다른 마을보다 빨랐다.”(435면 20줄-436면-437면 6줄).
“유지들은 산에도 협조하고 토벌대에게도 협조하는 소위 “양면작전”으로 마을을 보호했다”(437면 4줄). “입산한 북촌마을 청년들이 마을을 보호해 줬기 때문에 산 쪽으로부터의 습격은 없었다. 또 어른들은 산 쪽뿐만 아니라 토벌대에게도 협조하는 “양면작전”을 써 강경토벌전을 피했다.”
정부보고서의 발원처인 ‘4·3은 말한다’의 위 인용문들을 요약해 보면 북촌리 주민들은 거의 모두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좌익들이었고, 이들 중 희생당한 사람들은, 무고하게 사살된 것이 아니라 공산 유격대에 가담하거나 그 작전에 협조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북촌리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다른 마을에서 희생된 사람들 모두를 순수한 “양민”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제주도에서 이 사건을 지켜 본 사람들이 증언하는 북촌리 사건
1948년 5월 16일, 우도에서 제주도로 가던 범선이 풍랑을 맞아 북촌포구로 피항하자, 이 마을 출신 유격대 3명이 마을 주민 30여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우도 지서장 양태수 경사를 권총으로 사살해 바다로 던졌다. 동승했던 진남양 순경도 때려 죽였다. 이어서 유격대 7~8명이 승객 14명을 ‘선흘곶’ 유격대 연대본부로 납치해 5월 20일 저녁에 전원 사살하려는 순간 토벌대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때 생포한 유격대원의 안내로 군은 북촌마을 내에 있는 굴속에서 유격대원 7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권총을 휴대한 것으로 보아 지휘관급인 것으로 판명됐다. 이러한 일련의 누적된 상황들을 종합해 본 군은 당연히 북촌 마을이 유격대의 본거지요 전략촌이라는 판단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런 사건들이 누적되어 북촌의 대학살이 발생한 것이지 단지 2명의 병사가 기습을 받아 전사한 단순한 사건에 보복하기 위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필자가 조금 부연한다면 4·3사건이 발생한지 20여년이 지난 1970년을 전후하여 월남에서도 마을에 베트콩 진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월남 성장(도지사)의 허락을 받아 마을 사람들에게 마을로부터 나오라고 방송을 한 후 마을 전체를 폭격하여 잿더미로 만든 적이 많았다.
정부보고서와 추미애는 “무장유격대”에 소속되지 않은 제주도민 전체를 “양민”으로 보고 있다. 좌익사관을 견지한 제민일보 특별취재반이 펴낸 “4·3 은 말한다”에는 정부보고서와 추미애의 주장이 거짓임이 밝혀져 있다. 아래는 “4·3은 말한다”의 발췌문이다.
“1948년 10월 25일 밤 대정면 모슬봉과 가시오름. 한림면 금오름 등지에서 일제히 봉화가 올랐다. 또 마을에서는 무장대 쪽에 가담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른바“왓샤 시위”가 벌어졌다. 무장대로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한 시위였지만 이는 출동명령만을 기다리던 9연대에게 토벌대상 지역을 선정해 준 격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봉화는 9연대 제3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모슬포의 모슬봉에서도 올라 군을 더욱 자극시켰다. 9연대는 봉화가 오른 대정면 신평리와 일과리, 그리고 한림면 금악리에 즉각 출동하여 젊은이들을 눈에 띄는 대로 붙잡아 모슬봉 서쪽 일제 때 만든 탄약고 터에서 집단 총살했다.”(70~71면)
“1948년 10월 29일 애월면 고성리에 진입한 토벌군은 우선 무장대 은신처를 찾았다. 곤한 잠에 빠져 있다가 불의의 기습을 받은 무장대는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무장유격대원 40여명에게 3,4일간 자기들 집에서 묵게 했다.”(84~85면)
“4·3 초기엔 무장대가 함덕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함덕지서는 번번이 무장대의 피습을 받았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 식량과 의복을 올려 보냈다. 그러나 1948년 여름께부터 군·경의 강경작전이 벌어지자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은신생활에 들어 갔다....주민들은 집에 숨어 지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밤에 몰래 내려온 무장대는 이제 곧 통일된다. 며칠 있으면 해방된다고 선전하며 여전히 기세를 올렸다...양정근씨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4·3전에 남로당과 민애청에 가입했었습니다. 당시 남자면 누구나 그랬습니다. 아니면 따돌림을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많은 젊은이들이 산으로 피했습니다. 80%이상이 산으로 올랐을 겁니다... 아버지 집 마굿간의 거름을 쌓아 두는 곳에 토굴을 만들어 숨었지요. 숨어 지내는 동안에도 토벌대가 세 번이나 가택수색을 했어요. 결국 나도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산으로 식량을 올려 보냈습니다. 당시 마을에는 군경원호회가 조직돼 있었는데 모금을 하면 반은 군·경 먹이는데 썼고 반은 산으로 올려보냈습니다.”(431~32면)
제주도 주민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장유격대”의 동조자 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집단 총살당한 주민들은 일부 오인되어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죽임을 자초한 행동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 모두를 무고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의 4·3 논문이 주장한 내용을 정부보고서가 반복해
정부보고서와 추미애의 주장은 대체로 1991년 북한의 박설영이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에 실은 논문 “제주도 인민의 4·3 봉기와 반미 애국투쟁의 강화”의 표현과 일치한다. 정부보고서의 역사관과 추미애 등 좌파들의 역사관과 북한의 역사관이 일치하는 것이다.
1948년 말까지 수많은 애국적 인민이 학살되고 200여 개의 부락이 소각되었다. 1949년에 들어와서 놈들의 학살만행은 더욱 악랄하게 감행되었다. 이해 2월초에만도 놈들은 남원면 남원, 위미, 의귀 등등 마을에서의 400여명 대학살만행과 조촌면 북촌리에서의 대중적 학살만행 그리고 구좌면 평대리에서 임신부를 끌어다 국부에 막대기를 찌르고 아랫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서 조리를 하는 등 야수적 만행들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이 시기 살인악당들의 인간 살육만행은 이밖에도 이르는 곳마다에서 감행되어 수많은 인민들을 학살하였다. 놈들의 살인 만행으로 하여 빚어진 손실은 1961년 4월 조선민주법률가협회를 비롯한 8개 단체가 폭로한 “전 세계에 고함”이라는 데서 밝힌 것처럼 남해의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서는 1948년부터 1950년 사이에 총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7만여 명이 학살당하였다. 당시 제주도 169개 리 중 80%인 130개리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세상에 알려진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몸 바쳐 싸운 애국적 인민들과 평화적 주민들의 선혈로 물들게 되었다.(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자료집 266페이지)
이제부터는 3인의 증언을 요약하여 정부보고서가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증언자 한수섭(1931)은 당시 오현중학 2년생으로 1949년 1월 17일 이른바 북촌리 학살이 이루어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살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고, 훗날 제주 경찰서장을 한 사람이다. 전정택(1925)은 당시 함덕지서 순경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1월 17일, 2연대 예하부대로 ‘북촌리에서 공비로부터 습격을 받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집단학살을 주도한 제3대대와 한 곳에 있었던 사람이다. 김덕선(1926)은 당시 제주 농업학교 4학년이었고, 1949년 5월 3일부터 제주경찰에 투신한 사람으로 당시 제주도 동쪽 작은 섬 ‘우도’포구에서 돗대가 3개 달린 큰 범선에 경찰과 함께 타고 제주항으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북촌항에 대피하였다가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사람이다.
이 세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북촌리 사건은 아래와 같다.
1949. 1. 17 북촌리 집단총살 사건의 뿌리는 1948. 6. 15 사건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북초등학교 사건의 뿌리는 1948년 6월 1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덕선은 제주농업학교 4학년으로 임시 휴교기간을 맞아 제주도 동쪽에 동떨어진 ‘우도’에 소재한 본가에 왔다가 개학한다는 연락을 받고 1948년 6월 15일, ‘우도’ 포구에서 돛대가 3개나 달린 큰 범선에 승선했다. 배는 우도지서장(경사 양태수), 인천출신 진순경, 이장 김용석, 순경 백하룡과 그의 처 김선심 및 장남, 등으로 구성된 일행 16명을 태우고 제주항으로 가기 위해 오전 10시 경에 출항했다. 북제주군 조천읍 북촌리 앞 해상에 이르자 풍랑을 만나 도저히 항해를 할 수 없었다.
이때 잠수기선 2척이 북촌항으로 입항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탄 배도 일기가 호전될 때까지 대피할 요량으로 포구에 배를 댔다. 배를 대자마자 건장한 청년 3명(편의상 갑,을,병으로 칭함)이 접근하여 이것저것 물었다. 배가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누가 탔느냐? 우리는 그들이 민보단인줄 착각하고 우도에서 왔고 제주로 가는 중이며, 이 배에는 우도지서장도 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들이 즉시 배를 좀 보아야 하겠다며 승선했다. 을과 병이 배 멀미로 누워있는 지서장 양태수와 진순경에게 순간적으로 접근했다. ‘을’은 지서장 옆에 놓아둔 카빈총 총구를 잡고, ‘병’은 진순경 옆에 놓아 두었던 44식 총을 잡아 빼려고 격투를 했다. 바로 이 순간 ‘갑’이 달려들어 권총으로 양경사와 진순경을 쏘았다. 양경사는 즉사하여 바다에 버려졌고, 진순경은 옆구리에 총을 맞고 몽둥이로 머리를 맞아 뇌가 노출될 상태에 이르렀다.
포구에는 청장년층 남녀 30여 명이 모여 있었는데 이들은 우리 모두와 진순경을 하선하게 하여 밧줄로 결박하고, 총과 철창 등으로 무장한 청년 7~8명의 감시를 받으면서 2시간 정도 끌려갔다. 끌려간 곳은 밀림지대인 ‘선흘곶’이고 도착된 시각은 일몰 시각이었다. 이처럼 북촌리에는 공비 및 동조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공비연대와 직결돼 있었다.
산에 도착하자마자 진순경은 몽둥이로 맞아 숨졌고, 김덕선을 포함한 14명은 결박된 상태로 3~4일간 감금되었다가 공비 연대본부가 있는 곳으로 1시간 정도 이동했다. 매복해 있던 보초가 ‘석’하고 암호를 묻자 연행하는 자가 ‘탄’이라 확인하는 절차가 끝나자 우리는 곧 그자에게 인계됐다. 일행은 2시간 정도 그를 따라갔고, 도착한 곳은 그들의 연대본부 였다. 그들의 병력은 50~60명 정도였으며 그 중에는 국경출신이 있었는지 ‘국경동무’하고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우리들이 도망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결박을 풀어주었지만 감시는 삼엄했다. 1박을 하고 그 다음 날 저녁에 우리를 처단하여 북촌포구에서 발생한 사건을 ‘완전범죄’로 은닉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인근에서 토벌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경찰이 사찰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공비 1명을 생포했다. 그 공비는 우리를 연행했던 바로 그 공비였다. 취조한 결과 ‘우도에 사는 사람들이 북촌포구로부터 많이 잡혀왔는데 오늘 밤에 처단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던 강노반 중위가 토벌대를 인솔하고 긴급 출동하여 우리 일행 14명은 구사일생으로 구출됐다. 이 부대는 생포한 공비를 추궁하여 공비들의 은신처를 찾아냈다. 생포된 공비를 따라가 보니 북촌리 마을 안에 있는 한 가옥의 마당구석에서 돌로 교묘하게 위장된 굴의 입구를 찾아냈고, 그 곳에 은신해 있는 공비 7명을 생포했다. 그 중의 1명인 김진태는 배에서 내릴 때 김덕선의 우측 눈을 발로 차 바다에 떨어지게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2003년 6월 당시 “4·3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으로 신고돼 있었다. 김덕선은 그 굴을 지금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증언한다.
북촌리 사건은 좌익 및 정부보고서가 주장하듯이 단지 군인 수송차량이 북촌리를 지나다가 매복한 공비들의 기습을 받아 2명이 전사한 사건으로 촉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권총을 휴대할 만큼 지휘자급 공비들이 북촌마을에 있었을 정도로 북촌 마을은 공비의 마을이라는 인식이 토벌대와 주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북촌리는 ‘4·3은 말한다’가 밝힌 대로 마을 전체가 좌경화된 마을이었고, 그들의 끈질긴 반역행위들이 1월 17일 집단총살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극을 안았던 그 범선은 후에 4·3 주동자들이 해외로 도피하는데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폭도들은 그후 보복을 하지 않고 지나쳤는가? 유격대는 1949년 2월 4일 보복을 단단히 했다. 북촌마을 동쪽 일주도로에 매복해 있다가 제2연대 장병들의 무기수송차량을 기습하여 23명을 죽이고, 합덕지서 부원 하순경을 살해한 후 불에 태웠으며 민간인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99식 소총 150정을 탈취했다. 이들 사망자의 이름은 김영중의 “내가 보는 제주 4·3 사건” 94쪽에 확보돼있다. 정부보고서는 이들 모두를 외면했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집단 총살 사건
당시 함덕지서는 백주에 공비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전소되었다. 함덕지서는 부득이 함덕초등학교 교장관사로 이전했다. 그리고 총살사건을 주도한 2연대 소속의 제3대대는 바로 함덕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3대대 본부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대대장 정 대위, 부관 이 중위, 김 소위 등 소위 2명 등 장교는 불과 5명 이었다.
제3대대장은 북촌마을을 지나다가 공비들로부터 기습을 당해 2명의 부하를 잃게 되자, 평소부터 가져왔던 북촌리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이 한 순간에 폭발했다. 3대대는 즉시 북촌리 사람들을 북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한 군인이 나서서 마을 사람들이에 이렇게 말했다.
“폭도가 군을 습격하고 북촌마을로 도망쳤다. 교전 현장에 폭도가 버리고 간 것들에는 돼지고기 반찬이 있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폭도는 이 동네 사람이다. 부락을 포위하고 폭도를 색출할 것이다. 폭도는 자진해서 나와라.”
이렇게 여러 차례 말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에 그 군인은 “군인가족 나와라” “경찰가족 나와라” 명령하여 군인가족과 경찰가족을 일단 추려냈다. 그리고 나중에는 “민보단 가족 나와라” 이렇게 소리쳤다. ‘민보단’은 경찰을 돕는 청장년조직이었다. 이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우- 하고 몰려나갔다. 화가 난 군인은 이들에 발포하여 3명이 사망했다.
군은 나머지 사람들을 1열에 10명씩 4열종대로 세웠다. 이렇게 1차로 40명, 2차로 40명을 운동장 서쪽 밭으로 데려가서 사살했다. 그리고 또 다른 40명을 밭으로 데려가 막 사살하려는 순간 대대부관 이 중위가 차량을 타고 달려와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3대대 부관 이 중위가 제주시에 있는 2연대 본부에서 열린 참모회의에 가 회의를 하는 도중 함병선 연대장이 집단총살 소식을 듣고 이 중위에게 “당장 가서 중지시켜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정부보고서의 주장과 정 반대인 것이다.
북촌리 희생자는 400명이 아니라 잘 해야 120명
별도로 분리된 군,경,민보단 가족은 현장에서 방면되지 않고, 몇차례 나누어 함덕 대대본부로 이송됐다. 증언자 한수섭도 여기에 포함되어 대대본부로 이송됐다. 일부는 방면되었지만 30여 명은 여러 날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당시 군에 협조했던 북촌사람이 앞에 나서서 평소 자기와 감정이 안 좋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수사관에게 “저것들 전부 빨갱이들이다”라고 무고하여 그 다음날 30명 정도가 총살되었다. 또한 군은 부락경비를 서는 과정에서 공비와 내통하여 경비를 제대로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3~4명을 더 사살했다.
따라서 한수섭이 그날(1.17) 처음부터 북국민학교에서부터 죽 지켜본 바에 의하면 당시 제3대대에 의해 사살된 사람은 120명선을 넘지 않는다. 북국민학교에서 40명씩 두 차례 80명, 주민 집결과정에서 초소근무를 태만히 했거나 내통한 혐의가 있다는 사람들, 민보단장을 포함하여 4-5명, 민보단 가족 분리과정에서 3명, 함덕 대대본부에서 무고된 사람 30여 명이 전부였다. 400명 집단학살설은 1991년 북한의 박설영이 가장 먼저 주장했다. 그리고 정부보고서가 이 북한의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주장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북촌리는 1·17 사건 이후에도 공비촌
이 엄청난 사건을 치른 북촌리는 그 후 깨끗하게 정리되었는가? 당시 경찰출신 전정택에 의하면 그렇지가 않다. 북촌리 사건 발생 18일 후인 2월 4일, 제2연대 병력이 무기를 싣고 북촌리 동쪽 일주로에서 또 공비들의 기습을 받아 전멸 당했다. 함덕지서에 근무하는 부원하 순경이 전사했고, 민간인 운전수 1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비들은 총을 모두 가져갔고, 전사한 군인들 및 부원화 순경의 옷을 모두 벗겨 갔고 시신은 불태워 버렸다. 북촌리에서는 1월 17일 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또 후에도 공비들의 소굴이었다는 생각을 굳히게 하는 사건들이 이토록 생생하게 이어진 것이다.
함병선 대령이 집단 총살사건의 원흉이다?
정부보고서는 1·17 북촌리 대향학살 사건을 함병선과 이승만과 미군정이 주도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들이 북촌리 사건의 원흉이라고 지목하며 책임을 묻고 있지만 이는 허구다.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선-선무 후-토벌’전략으로 한라산 공비를 사실상 전멸시킨 주인공이었다. 제주도민들은 2연대의 공적을 높이 찬양하고 기리기 위해 서귀포에 ‘함병선 대령의 공덕비’를 건립했고, 1949년 7월 7일은 도민 전체의 이름으로 한라산에 ‘평정비’를건립했다. 그런데 정부보고서와 좌파들은 함병선 대령을 무차별한 양민학살자로 매도한 것이다.
오라리 사건
1948년 5월 1일에 발생한 오라리 사건은 참으로 하찮은 사건이다. 김익렬도 하찮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하찮은 두 개의 존재가 좌익들에는 매우 중요했다. 좌익들이 쓴 책과 정부보고서에는 이 두 존재가 왜곡돼 있고, 크게 부각돼 있다. 4·3 폭동사건를 조작하고 모함하기 위해 이 두 개의 존재를 매우 귀한 소재로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여러 자료들과 증언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오라리 사건은 이렇다.
제주읍 남동쪽 2㎞ 지점에 오라리 마을이 있다. 오라리 마을은 5개 마을로 되어 있고 주민은 600여 호 3,0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일제 때부터 좌익 활동을 했던 고사규, 박기만, 오팽윤, 송삼백, 이순정 등이 있어 주민들에게 영향을 주어 좌익사상이 강했다. 1948년 4월 29일 폭도들은 오라리 연미마을 대청 부단장 고석종과 대청단장 박두인을 끌고 가서 민오름 나무에 묶었다. 1948년 4월 30일 대청단원 부인인 강공부(23세), 임갑생(23세) 등이 폭도들에게 끌려 가 민오름 나무에 묶였으나 임갑생은 기적적으로 끈을 풀고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살았다.
경찰이 신고를 받고 민오름을 뒤지자 임신부 강공부는 죽어 있었고, 폭도들이 박두인과 고석종은 다른 곳으로 끌고 가서 죽였다. 5월 1일 오전 9시 전날 폭도들에게 비참하게 죽은 임신부 강공부의 장례식이 있었고, 여기에는 대청과 서청원 30여 명이 참석하였다. 장례식을 마친 청년들이 폭도로 인정되는 집 6세대 12채에 불을 지른 후 제주읍으로 갔다.
멀리 떨어진 오름에서 폭도들이 연미마을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5월 1일 12시가 지나 20여 명이 연미마을에 도착하고 보니 대청 청년들은 없고 집 12채가 불타고 있었다. 그러자 폭도들은 순경 김규찬 어머니를 아들이 순경이라는 이유로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 일을 신고 받은 경찰 2개 소대가 연미마을에 도착하여 폭도 들에게 총을 쏘자 폭도들이 도망을 쳤다. 그런데 고무생(41세)이라는 여자가 경찰이 정지하라고 고함을 치는 데도 도망치자 경찰은 총을 쏘아 사살했다.
모략을 목적으로 김달삼이 기획한 5·3 사건
5월 3일 15:00시 경, 한라산에 입산하여 고생을 하고 있던 주민 200~300명 정도가 귀순해 오겠다는 반가운 연락을 해왔다. 미 고문관 드루스 중위가 미군 병사 2명과 9연대 병사 7명을 대동하고 이들 하산주민들을 제주비행장을 향해 인솔하고 있었다. 이 때 정체불명의 무장대 50여 명이 갑자기 나타나 기관총과 카빈총을 난사했다. 몇 명의 귀순자들이 사망했고, 나머지는 모두 산으로 도망을 쳤다. 이 때 미군이 반격에 나서 무장대 5명을 사살하고 몇 명의 부상자를 생포했다.
미군에 생포된 자들 중 한 사람은 자기가 제주경찰서 소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미군이 제주 경찰서에 신원을 확인한 결과 그 자의 말은 거짓이었다. 이 자는 경찰에 있다가 입산한 공비로 경찰과 국경 사이를 이간시키기 위해 폭도들이 연극 차원에서 이용한 자였다. 200~300명을 하산시킨 것은 머리 좋은 김달삼이 미군과 경찰 사이를 이간질시키기 위해 꾸민 고도의 모략극이었던 것이다.
김익렬과 ‘김익렬 유고’의 정체
위와 같이 사건치고는 비교적 단순 간단한 두 사건을 놓고 좌익들은 이 사건들이 마치 큰 사건들이나 되는 것처럼 분칠을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김익렬이 미군정의 위임을 받고 1948년 4월 28일, 김달삼과 평화회담을 했고, 그 자리에서 쌍방이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합의를 했는데 미군이 오라리 방화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하고 5월 3일 200~300명의 산사람들이 귀순하는 것을 경찰이 무장대로 위장하여 귀순자들을 습격함으로서 김익렬-김달삼 사이에 맺은 4·28 평화협상이 파괴됐다는 것이다. 김달삼과 김익렬은 평화의 전기를 마련했는데 미군과 경찰이 평화를 깨기 위해 두 개의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김달삼-김익렬은 훌륭한 사람들이고 미군과 경찰이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기 위해 위 2개의 사건을 왜곡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4·28 평화협상을 가공해낸 것이다. 과연 4·28 평화협상은 사실로 존재한 것인가? 그리고 김익렬이 그토록 위대한 인물이었던가?
4·3 사건에 대한 정통역사를 좌익역사로 뒤집은 결정적 근거는 4·3 당시 27세의 애송이 중령이었던 김익렬이었다. 지금으로 말 하자면 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중위의 나이였고, 배움도 지금에 비하면 일천했다. 논리에 비해 훈련되지 못했기에 김익렬은 뻥이 심했다. 당시 육군에는 3명의 포(대포:김익렬, 중포: 홍순용 소포: 신대성)가 있었는데 그들 중 가장 뻥이 심한 사람이 김익렬이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행동거지가 수상한 ‘빨갱이’로 통했다. 그런데 좌익들은 그가 1988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난 다음에서부터 그를 최상의 박애주의자요 평화주의자였던 것으로 각색하기 시작했다.
김익렬의 뻥은 채명신 회고록에 잘 묘사돼 있다. 채명신이 9연대에 도착해 가진 신고식에서 김익렬은 신임장교들을 세워놓고 이런 연설을 했다.
“내가 지프를 전속력으로 내 달리는데 가까운 보리밭에서 꿩이 날아가는 기라. 그래서 권총 한 방을 쐈더니 두 마리가 떨어 진거야. 운전병더러 주워 오라고 해서 갖고 오는데 개굴창을 건너 커브를 돌아올 때 웬 놈들이 바윗돌로 길을 막아 놓은 거야. 폭도들이 그랬구나 하고 차를 세우니까 과연 폭도 4~5명이 총을 들고 돌담 뒤에서 나타나는 기라. 모두가 눈이 새빨개져 가지구 나를 노리며 다가오더라구. 요 자식들, 밤잠도 못 자고 활동하누나 싶어 불쌍한 생각이 왈칵 들더군. 그래서 꿩 두 마리를 건네 주면서 가서 삶아 먹고 기운차리라 했지.”
위 연설은 김익렬이 얼마나 뻥이 심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좌우익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웅변해 준다. 실제로 김익렬 휘하에 있었던 채명신은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그리고 김익렬이 매우 수상한 사람이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김익렬은 사단장 시절 국회의원들에게 이런 뻥을 쳤다고 한다.
“멸치를 뻥튀기 기계에 넣고 튀기면 동태가 됩니다. 병사들 부식은 문제 없습니다. 성냥개비를 뻥튀기면 장작이 됩니다. 의원님들께서는 병사들에 대한 월동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1949년 5월 4일은 6·25 전쟁 1년 여 전이었다. 인민군이 개성 송학산을 무단 점령했다. 이 고지를 되찾기 위해 박격포탄을 메고 고지를 오르다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육탄 10용사가 있다. 국가는 매년 이들을 추모해 왔고, 이들의 이름으로 상도 제정해 주고 있다. 그런데 1964년 5월 김익렬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 거짓말을 하여 국방부 전쟁역사를 48년 동안이나 뒤집었다. ‘육탄 10용사는 장렬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포로가 되어 북한에 갔고, 김익렬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을 때 그들이 북한에서 꽃다발을 받은 사진도 보았다’고 뻥을 쳤다. 그 후 전사는 왜곡돼 왔고 2011년에야 뻥이었음이 들통났다.
좌익들이 역사왜곡에 사용한 유일한 근거는 이런 뻥쟁이 김익렬이 썼다는 ‘유고’다. 죽기 전에 남겼다는 원고지인 것이다. 그가 쓴 유고는 얼마만큼의 객관적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그가 쓴 원고일까? 아니면 그의 필체를 빌려 누군가가 창작해낸 것일까?
김익렬은 ‘제주도 공비에 대한 토벌임무를 부여받은 제9연대’ 연대장이었지만, 적장과 내통한데다 토벌에 미온적이었으며 적장에 병력과 총과 실탄을 대준 빨갱이요, 그의 아버지와 함께 ‘좌익‘인 것으로 의심받아 1948년 5월 5일부로 해임됐다. 4월 3일 폭동이 발생한지 불과 32일 만에 해임된 것이다. 그는 4·3에 대해 불과 32일 동안의 경험을 가진 27세의 풋내기 청년에 불과했다. 32일 동안 겪은 4·3에 대해 그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 후 김익렬은 아주 요행이도 당시의 정체를 속이고 젊은 나이로 출세하다가 1969년에 중장으로 예편했다. 제주도 제민일보에 의하면 그는 예편 직후부터 죽기 전인 1988년 12월까지 근 20년에 걸쳐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4·3에 대한 원고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겨우 200자 원고지 346매, 일반 책자로는 70쪽 정도의 분량이었다. “역사적사명감”에 불타서 4·3 역사를 조명했다면 20년 가까운 세월에는 역사책을 하나 쓰거나 자서전을 썼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남긴 것은 그냥 얇은 원고지 뭉치 하나 였다.
뻥이 심했던 김익렬, 적장과 내통을 했고, 적장에게 병기와 인력을 대준 김익렬, 4·3에 대해 겨우 32일 간의 경험을 가졌던 김익렬이 썼다는 원고지를 놓고 제민일보는 이 “김익렬만이 4·3 초기의 미군정의 역사를 밝히는 최고의 인물이며, 그가 남긴 원고지만이 4·28 평화협상을 증언하는 유일한 자료”라고 추켜세웠다. 그리고 이 김익렬의 유고가 제민일보가 발행한 ‘4·3은 말한다’의 핵심이었고, ‘4·3은 말한다’는 다시 정부보고서의 원조가 됐다. 이 간단한 사실로도 고건, 박원순, 강민길, 김원웅 등 골수 좌익들이 정부의 이름을 걸고 만든 정부보고서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좌파들의 장난감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도 남을 것이다. 실제로 고건은 한총련의 원조 신진회를 만들어 4·19를 주도한 사람이며, 2006년 8월 24일, 용산기지 공원화 선포식에 참석해서 참으로 나쁜 말을 했다.
“용산 민족공원 예정부지는 124년전 임오군란을 빌미로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일본군, 미군 주둔에 이르기까지 1세기 이상 외국군이 주둔해 오던 곳이다. 한 세기 넘어 지속되어 온 오욕과 굴절의 역사를 바로 잡고 민족의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하여, 이 부지를 세계적인 명소 수준의 민족공원으로 조성하는 일을 힘써 추진해 온 것이다.”
좌익이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박원순은 또 누구인가? 19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했고, 2002년엔 아름다운 재단과 아름다운 가게를, 2006년에는 희망제작소를 세워 사람들도 모으고 돈도 모았다. 그는 재벌들을 개혁해야 한다며 약점을 찾아내 수억-수십억 원의 돈을 기부금 조로 받았고, 그의 부인으로 하여금 브로커 회사를 만들어 대기업들로부터 수 많은 건설사업을 따 가도록 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국보법폐지에 앞장섰고,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좌경·좌익을 배제하는 국가는 극우 독재정권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폈다. 2003년 8월 7일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 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추진위)에 천정배, 강정구, 최병모(민변 회장) 등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곽동의(한통련 의장), 이수자(윤이상 부인), 송두율 등 해외 빨갱이들을 “해외 민주인사”로 부르며 이들의 귀국을 추진하는 한편 “반국가단체 한민통·한통련 합법화” “용공조작 도구인 국가보안법 즉각 폐지”를 주장했다. 2002년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의 합법화 운동도 전개했다.
박원순은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판결한 ‘한국청년단체협의회’(한청)를 적극 변호했다. 그의 변호 논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빨갛다.
“북한이 꼭 같이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해서 모든 주장이 이적행위가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미군 범죄가 창궐하고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군 철수 주장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한청과 그 간부들이 실질적으로 국가안보를 위해한 어떤 행동을 한 것은 없다.”
그는 노무현의 발언과 똑같이 대한민국의 정체성도 부정했다. 노무현의 발언과 일치한다.
“해방과 동시에 당연히 처단되었어야 할 친일부역자들이 오히려 새로운 해방조국의 권력을 장악하고 그 아래에서 독립운동가 들이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시련과 고난을 당해야 했던 것이 바로 웃지 못 할 우리과거의 솔직한 모습이었다. 친일파가 득세한 세상에서 독립운동가와 그 유족들은 마치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독립운동 경력은 불온한 전력이 되어야 했다”(노무현)
정부보고서는 결국 이런 골수 좌익들이 만든 좌익서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김익렬의 원고는 서울의 어느 한 초라한 집에 보관돼 있었다. 이것을 바다 건너 제주도에 있는 한 작은 신문사인 제민일보가 냄새를 맡고 미망인을 설득하여 입수했다고 한다. 서로가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제민일보는 1989년 8월에 이 원고를 가져가 8월 15일부터 9월 23일까지 1개월 여에 걸쳐 연재했다. 1989년 8월 제민일보의 수중으로 들어간 이 원고는 그해 말 안에 또 다른 좌파 출판사인 ‘한길사’로 건너가 월간지 ‘사회와 사상’ 1990년 1월호에 실렸다. 이 1월호 월간지가 곧장 북으로 넘어가 1991년 초 박설영 논문이 나왔다. 이 박설영 논문의 핵심은 김익렬이 이룩해 놓은 4·28 평화협상을 미군정이 깼다는 것이다. 미군정에 4·3의 책임을 씌우는 논문인 것이다.
일단 북한에서 4·3 역사 논문이 나오자 남한의 좌익들은 일사분란하게 북이 쓴 역사책의 줄기들을 지휘서신 정도로 받아들여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제민일보가 북한의 논문에 살을 많이 붙여 1994년에 5권짜리 ‘4·3은 말한다’라는 대하실록(?)을 냈다. 책의 분량이 많은 것은 미군정과 군경으로부터 피해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증언들을 있는 대로 다 실었기 때문이고, 이 증언들은 한결같이 ‘미군정과 경찰과 군의 만행과 잔악상’을 고발하는 것들이었다. 반면 그 많은 증언들 중에 군과 경찰과 경찰 가족, 청년단, 지역유지, 공무원들이 당했던 그야말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사례들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이 ‘4·3은 말한다’라는 책과 이를 베껴 쓴 정부보고서가 김익렬 유고를 하늘같이 내걸면서 4·28 평화협상이라는 유령의 시나리오를 창조했다. 그러나 김익렬 유고에 4·28 평화협상은 없었다. 4·28 평화협상은 제민일보가 가공해낸 소설일 뿐이다. 제민일보가 가공해낸 4·28 평화협상 시나리오는 이렇다.
“김익렬이 군정 당국의 위임을 받아 목숨을 걸고 4월 28일, 한라산 속 김달삼 사령부 본부에 들어가 미군정 측과 유격대가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하는 평화협상을 맺었는데 미군정이 경찰을 배후 조종하여 ‘오라리’마을에 불을 지르고 이어서 투항하여 하산하는 200여 명의 산사람들을 향해 총기를 발사함으로서 김익렬이 어렵게 이룩해 놓은 평화의 기틀을 파괴했다.”
미군정이 이런 비겁한 짓만 하지 않았어도 제주도에는 4월 28일부터 평화가 찾아왔을 것이고, 따라서 그 이후에 발생한 엄청난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제주도 희생의 책임을 전적으로 미군정에 뒤집어 씌우려는 모략인 것이다. 남한의 좌익들과 북한이 짜 맞춘 듯이 가공해낸 4·28 평화협상의 근거는 오직 김익렬의 유고다. 그런데 정작 김익렬의 유고에는 4·28 평화협상이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다. 그냥 김익렬 유고에 4·28 평화협상이 들어 있다고 사람들을 속인 것이다. ‘유고에 없는 말’을 ‘유고에 있는 말’이라며 속인 것이다! 김익렬은 1948년 8월 6, 7, 8일에 걸쳐 부산국제신문에 기고를 연재했다. 이 기고에는 김달삼과 ‘회담’을 했는데 그 날짜가 4월 30일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유고에는 “휴전 4일째 되는 5월 1일”이라는 표현이 있다. 4월 27일에 평화회담을 했다는 것이다. 4월말로부터 3개월이 된 시점에서 3개월 후에 신문에 기고한 내용과 40년 후에 혼자서 원고지에 썼다는 내용이 사뭇 다른 것이다. 1948년의 기고문에는 ‘평화회담’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1994년에 제민일보의 특별취재반이 편집한 ‘4·3은 말한다’의 ‘책머리에’는 이런 글이 있다.
“심지어 4·3의 실상을 연구한 미국 학자마저 전후 점령군에 대하여 제주도에서와 같은 격렬한 대중적 저항이 분출된 일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없었다…한마디로 4·3은 미군정 아래서 우리 민족이 안고 있던 집약적 모순이 빚어낸 역사적인 사건이다…이 사건을 제대로 보려면 한민족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미군정의 실책, 그리고 제주도의 항쟁 역사 등이 종합적으로 해석돼야 한다…제민일보는 미군정과 일부 극우세력이 조작해낸 사건의 시말을 추적보도하고 있다.”
그 동안 발간돼 있는 미군정 보고서들과 정통 보수들이 펴낸 책들의 내용을 뒤집겠다는 의지가 강력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민일보가 가공해낸 김익렬 모조품은 북한의 박설영이 쓴 논문과 그 방향이 정확히 일치한다. ‘4·3은 말한다’를 편집한 제민일보 특별취재반은 한 마디로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이 있지도 않았던 4·28 평화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해 김익렬을 이용했고, 이용하기 위해 뻥이 심한 ‘중령 빨갱이’ 김익렬을 평화주의자의 심볼이요, 박애주의자인 것으로 각색한 것이다.
이 책의 제2권 111~176쪽에는 4·28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사건이 소설처럼 그려져 있지만 이는 모든 사건을 한결같이 미군정과 경찰이 음모한 사건이라는 식으로 몰고 갔다. 한 마디로 인민유격대 즉 무장폭력대를 미화하고 정당화한 책이다. 그 다음에 나온 책은 2002년 11월 16일에 강준만이 내놓은 “한국현대사 산책”이다. 이 책 역시 북한 논문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2003년 12월 15일에 발간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정부보고서)는 바로 이 “4·3은 말한다”를 베껴 쓴 것이다. 이 4개의 책 중 가장 먼저 나온 책은 북한 책(1991)이다. 이후 남한에서 발간된 3가지의 책들은 다 북한 논문을 정당화시켜 주는 방향으로 역사를 각색하고 왜곡했다. 정부보고서와 “4·3은 말한다”는 모두 양조훈과 김종민이 주도해 썼다.
남한 좌익들이 북한 자료를 베껴 쓰는 행위는 5·18 역사 쓰기에서도 나타나 있다. 5·18 역사책은 북한이 먼저 썼다. 조국통일사가 1982년 3월 20일에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이라는 역사책을 냈다. 이어서 1985년에 조선노동당 출판사가 ‘광주의 분노’를 내놨다. 남한의 5·18역사책은 1985년에 황석영이 처음썼다. “어둠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도서출판 풀빛). 그런데 이 황석영의 책은 계엄군과 미국과 국가를 모략-저주하면서 적화통일을 선동하는 책이다. 그 내용들을 보면 수많은 현장들에서 시시각각으로 전개된 상황들이 마치 현장에서 눈으로 보듯이 실감나게 표현돼 있다. 그런데 앞뒤를 보면 자가당착이 많고, 사실들 역시 수사기록과 정 반대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황석영의 책은 북한의 5·18 역사책을 거의 그대로 베껴 쓴 것이었다. 하다못해 차량번호까지 일치하도록 베껴 썼다.
남한이 2007년에 개봉한 5·18 영화 ‘화려한 휴가’는 북한이 1991년에 개봉한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거의 다 베꼈다. 한마디로 남한에서 좌익들이 발간하는 역사책은 북한이 내놓은 역사책을 판박이 한 것들이었다. 영화제목 ‘화려한 휴가’는 황석영의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고, 실제로 공수부대에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은 없었다. 북한과 좌익들이 가짜로 만들어 뒤집어 씌운 것이다. 이때 ‘김영삼이 주도하는 여론몰이에 주눅 든 군과 공수부대’에는 입이 없었고, 오직 386주사파들을 포함한 좌익세력과 전라남도 사람들의 입만 있었다. 온갖 언론들이 사실과는 전혀 다른 모함들을 했고, 모함이 심하면 심할수록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4·3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뻥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1989~91년 사이 황석영과 윤이상이 김일성에게 갔다. 황석영은 북한의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시나리오를 써주고 25만 달러의 거금을 받았고, 윤이상은 그 영화에 ‘님을 위한 행진곡’ 등의 배경음악을 작곡해 넣었고 그 대가로 15층짜리 ‘윤이상음악당’을 선사 받았다. 그런데 지금 윤이상의 고향 통영에는 또 다른 ‘윤이상음악당’이 세워져 있다.
김익렬의 신화가 허구라는 증거들은 매우 많다. 그런데 그 많은 증거들을 다 열거할 필요가 없어졌다. 단 한방이면 이런 사기를 끝장내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1995년 8월 15일에 발간된 ‘한라산은 알고 있다’라는 작은 책이다. 1995년에 나온 이 책은 당시 지서주임으로 있었던 문창송씨가 이덕구를 사살할 때 그의 수하 ‘양생돌’의 주머니에서 빼앗은 유격대 상황일지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를 그대로 전재한 책이다. 이 유격대 상황일지는 제민일보가 1994년에 ‘4·3은 말한다’를 내기 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책이었다. 이 귀중한 유격대 상황일지가 ‘4·3은 말한다’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4·3은 말한다’에는 매우중요한 부분들이 사실과 다르게 왜곡돼 있다. 2003년에 정부가 내놓은 ‘정부보고서’는 이 상황일지의 내용을 다루긴 했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 정도로 가볍게 터치했다.
그러나 이 상황일지에는 그렇게 가볍게 터치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 있다. 이 상황일지 하나가 ‘김익렬을 이용한 좌익들의 모든 굿 놀이 판’을 한 순간에 뒤엎고도 남는다. 이 유격대 상황일지는 1948년 3월 15일부터 7월 24일까지 무려 4개월 10일간에 이르는 투쟁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김달삼이 이끌던 유격대의 활동을 낱낱이 기록한 것이다. 이 일지에는 아래와 같은 매우중요한 기록이 있다.
“4월 중순, 문(文)소위로부터 99식총 4정, 오일균 대대장으로부터 카빙 탄환 1,600발, 김익렬 연대장으로부터 카빈 탄환 15발을 각각 공급 받았다.”
제주도 경찰서들과 경찰 및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