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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의 방송, 제3부4편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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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머스 작성일22-05-26 06:31 조회3,06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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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욱 기자의 현대사로서의 5.18 : 제3부 4편 5.22 - 5.27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

https://youtu.be/juvjB67-C_4



 

이승만TV, 2022.5.25

 

0:00

[음악]

 

0:16

사실과 자유를 사랑하는 이승만TV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동욱 기잡니다. 오늘도 이동욱 기자의 현대사로서의 5.18, 제3부 5.18 통사 4편 5월22일부터 27일까지 오해와 곡절의 막장극 총정리 2편, 그게 5.18 통사의 마지막 절이 될 것 같습니다.

 

0:40

저번에 했던 내용에 이어서 오늘도 계속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먼저 저번에도 이런 그림을 제가 보여드렸었지요. 정보의 실패로 인해서 사실은 공수부대를 계속 투입하고 투입하고 했지만 그 아래에 있는 광주의 봄, 그 연합시위라 하는 마우스를 가지고 제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 당시까지 광주에 투입됐던 모든 군인들은 21,523명 정도 됩니다.

 

1:07

이걸 가지고 계산해 보면 이렇게 나오구요. 군은 처음에 이제 18일부터 21일까지는 시위대 해산 및 진압작전을 했다가 안 되니까 도로차단 및 외곽봉쇄 작전이라는 미명하에 철수를 한 거죠. 그리고 외곽봉쇄를 하고 가둬버린 겁니다. 그러면서 그 기간을 거쳐서 27일 새벽에 충정작전으로서 도청 진압을 해 버리죠. 그러면서 이제 광주 전체를 다시 원상 복구시킵니다.

 

1:40

이때 시위대는 대학생들은 서울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연습도 많이 하면서 오다가 진압군들 하고 아주 호되게 이제 부딪혔고 간 거구요. 무장 시위대가 그래서 이제 총기를 들었고, 그로 인해서 무장 시위대의 활동이 이제 상당히 많아집니다. 요 사이에 도로차단 및 외곽봉쇄 작전에서 참극들이 참 많이 벌어졌죠. 그죠?

 

2:06

또한 우리가 알아야 될 거는 5.18 사태수습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다는 거.. 뭐 이런 거 이제 가지고 다시 설명해 들어가겠습니다.

무장 시위대는 무기고를 털고 나와 가지고 그 다음부터 즉시 한 게 뭐냐면 자체 방어에요. 지역 방어고.. 그리고 기동순찰대를 만들고.. 그래서 치안을 유지하는 데 애를 씁니다. 만약에 내란 범죄자들이었다면 자신들이 기존에 있는 질서를 계속 파괴하는 쪽으로 갔을 겁니다.

 

2:40

근데 지금 현재 기록에 나와 있는 구술자료나 모든 자료들을 다 보면 5.18 당시의 광주지역에서 계엄군과 싸웠던 분들은 지향하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 질서였습니다. 다른 게 아니었어요. 이들이 나중에 이제 순찰대로 갔다가 타격 대로 갔다가 마지막에 끝까지 우리는 목숨 걸고 광주를 지킬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이제 계엄군이 들어올 때까지 총을 쥐고 있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기동타격대라는 이름이.. 이라고 이제 알려진 거죠.

 

3:13

이들이 결국은 이제 피해를 많이 보기도 하는데.. 이 무장 시위댑니다. 기무사.. 보안대서 그 당시에 보관하고 있던 자료.. 무장하고 젊은 청년의 신분을 조사하고 있는 시위대.. 그러니까 이 당시에 경찰의 역할을 전부 다 이 분들이 한 거예요.

차량도 이렇게 가지고 와서 나름대로 일련번호를 매기고 수첩의 그 장부에다가 이 차량의 10번의 번호는 누가 몰고 있고, 어느 소속이고 하는 것까지 자기들 나름대로 하고 그 당시 광주에서 구할 수 있는 방탄 재료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은 죄다 긁어 가지고 지금 보면 상당히 좀 험하죠. 그죠? 그 당시에는 여기에 있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한 행동이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4:04

이게 전투경찰들이 아니구요, 이게 무장 시위대들입니다. 왜 이렇게 전투 경찰들의 복장들이 많냐? 5월21일날 철수하기 시작하자 안병하국장이 전남 경찰들에게 해산명령을 내려요.

해체..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그 당시 입고 있던 걸 다 벗고, 그 다음에 민가로 가서 사복을 빌려 입거나 훔쳐 입거나 하여간 그렇게 해서 민간인 복장으로 걸어서 외곽으로 다 빠져 나갔습니다. 그러니 그 경찰 장비가 다 남은 거죠. 그 경찰 장비들이 무장 시위대의 또다른 복장이 됐습니다.

 

4:45

이런 사진들을 보시면 차량 시위대라는 게 그때 뭘 하고 있었고, 왜 저렇게 하고 있었는지 좀 이해가 가실 겁니다. 이들은 다 뭐 북한군 아니거든요. 흠.. 이제 회수가 되는 총기들이죠. 24일이면 이제 총기 회수가 한참 되고 있을 땝니다. 광주사태 당시 관계 젊은 청년들이 무기를 트럭에 싣고 있는 장면.. 이게 이제 무기 회수를 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이제 모아가는 거죠.

21일 밤에 계엄군이 철수하고 나서 22일부터 수습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그러면서 이제 총기 회수에 앞장선 분들이 계십니다.

여기 타고 있는 사람들이 이른바 순찰대를 만들고 자신들이 차를 이렇게 몰면서 그 사회의 광주라는 이른바 해방구죠. 그죠? 해방구의 질서 유지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5:39

어 이것도 마찬가지죠. 계엄군이 물러 나가고 난 이 다음부터 매일 한 번씩 집회가 있었습니다. 광주 도청 앞에서... 집회가 있을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가지고 이제 뭐 그 개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광주 전체의 불행이 되어 버리니까.. 불행이 공동화 되어 버리니까 같이 나오는 거죠.

나와서 이제 그 집회를 해야 되는데 그때 그 집회를 잘 운영해 간 사람들은 역시 이것도 이제 운동권이었어요. 광주 지역의 전남대를 중심으로 해서 졸업생들이 주축이 돼 가지고 만들어졌던 극단 광대가 있었습니다.

 

6:23

마침 이것도 80년 1월달에 이제 결성이 됐는데, 이들이 이제 무대 연출이나 진행이나 이런 걸 잘 하니까 갑자기 저렇게 많은 군중들이 나오니까 저들을 잘 위로하고 거기서 위안 받고, 집행부에 의사전달을 잘 해줄 수 있는 뭐 그런 퍼포먼스를 진행하지요.

 

6:47

그때도 보면은 경비를 서는 사람들은 전부다 이런 사람들이죠. 무장시위대입니다. 누구로부터 누구를 지킬까요? 당연히 이들에게는 그 당시의 계엄군으로부터, 공수부대로부터 광주시민을 지키는 그런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전투경찰이 아니고 무장 시위대.. 어떻게 하느냐? 카빈총을 들고 있습니다. 이게 전투경찰일까요? 전투경찰은 무장을 5.18때 하지 않았습니다.

 

7:16

그러니 전후를 잘 보시면서 사진을 해석하시면 되겠고, 여기도 보면은 경찰 찦차가 그 위에 무장하고 서있는 시위대 해가지고 이렇게 나오죠.

장갑차를 타고 시가지를 누비고 있는 시위대 할 때도 이 장갑차.. 참 안타까운 건 아까 그 오인사격 있을 때도 보면은 조창구 중령을 포함해서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타고 송암동 효천역쪽으로 나타났는데 그걸 시민군으로 오인하고 로켓을 발사해서 그 안에 탑승했던 차정환 대위의 목숨을 가져가 버리게 된 건 공수부대 장갑차와 시민군이 몰았던 저 당시 도심형 장갑차는 엄연히 생긴 게 다르거든요. 캐터필러용이고, 도심형은 타이어형입니다. 그것만이라도 가르쳐 줬어도 되죠. 그죠?

 

8:05

또 하나 있습니다. 시민군이 기아자동차에서 끌고 나온 장갑차에는 무전기가 장착돼 있지 않아서 무전기 안테나가 없었어요. 대신에 공수부대가 몰고 다니는 장갑차는 교신을 해야 되기 때문에 교신용 무전 안테나가 있습니다.

외형의 차이만으로도 구분이 가능하는데 그걸 가리켜만 줬어도 그런 비극은 안 벌어졌을 텐데 저 당시의 군은 굉장히 좀 정보와 첩보의 구분을 무디게 한 것 같아요.

그냥 대충 장갑차 끌고 온다더라. 무조건 쏴라. 뭐 이렇게도 되버리거나, 나중에 아군이 다시 이 길을 통해서 오니 통과시켜 라든지 어떤 메시지가 없었죠. 안타깝죠. 이 분들이 이제 25일, 26일 때 최후까지 남겠다 하면서 이제 차를 타고 다니는.. 이때 이 주변에 여러분 그 표정을 한번 보시죠. 이 분들..

혐오나 공포나 그런 게 아니고, 또 다른 아이들은 어떤 선망 어린 눈빛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그러나 이 분들은 이제 어떤 결심을 하고 끝까지 가겠다는 거겠죠. 그죠?

 

9:17

그런 분들이 사태 끝나고 나면 이렇게 인제 군법, 계엄법이죠. 그죠? 군법정에 서게 됩니다. 그 당시에 광주 소요 사태로 인한 연행자 수가 2,577명, 전국적으로는 연행자 수가 2,699명, 다 합치면 5천명이 넘습니다. 광주지역에서만 이런 분들이 몽창 다 이제 상무대 영창으로 거기로 해가지고 가서 하루에 한 사람당 최소한 5번정도 신문을 받으러 가죠. 가면은 많은 이제 또 고초가 따르죠. 저 시대에 인권이라는 개념이 정말 없었던 시대였으니까 어쩌겠습니까. 그죠?

 

10:03

그런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걸 한번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광주의 범죄 통계를 한번 볼까요? 22일부터 26일까지 공권력이 부재했던 그 해방구 광주의 범죄 통계 한번 봅시다.

80년 당시 인구는요, 광주가 73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22일부터 26일간 사건 신고 접수가 약 30여건이 있었습니다.

 

10:34

이게 인제 도청에서 그 당시에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일종의 행정기구를 만들어요. 그리고 치안유지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만들고, 조사기 구도 만들고, 그래서 이제 범죄 연루자들은 데려와 가지고 신문도 하고 뭐 그랬던 거 같습니다.

근데 여기서 사건 신고는 30여건 있었는데, 그때마다 기동순찰대를 출동시켜서 사건 접수하고, 연행자 구속하고 했죠. 그 중에서 4건이 훗날 재판에 회부됩니다. 그 사태 후죠. 완전히 이제 범죄자로 판단을 해 가지고 구금시켰다가 계엄군한테 넘겨준 거에요. 5.18 저런 난리 때문에 발생한 사건도 아니고.. 그리고 단순 절도 사건이 3건입니다.

 

11:21

5일동안 4건이어서 하루 평균 0.8 건입니다. 이런 점도.. 큰 사건들이 없다는 말씀이에요. 근데 참고로 2017년도에 광주시 인구는 146만입니다. 거의 2배 정도죠. 2배네요. 근데 이때 5대 강력범죄 발생건수는 하루 평균 37건.. 지금 한 40건 되겠죠. 그죠? 인구 더 많아지고 하면..

그런데 해방 공간에서 광주는 하루 평균 0.8건이었다. 거의 없다고 봐도 돼죠. 그죠? 왜 이랬을까요.

 

11:58

제 생각입니다마는 도시가 뭐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도 마찬가지고.. 외부의 공동의 적이 생겼을 때 그래서 그 공동의 적과 대치해야 된다는 각성이 일탈이나 범죄행위를 줄여 준 게 아닌가? 상황이 그러지 않았나? 즉 그 당시 계엄군에 대한 공분, 사실은 자기 가족이 아닌 피해자들이 참 많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나섰잖아요. 그죠?

 

12:29

그것이 광주의 긍지가 되고 따라서 한국인의 긍지가 되는 그래서 세계가 모범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그런 이야기로 이제 정리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왜냐?

여기 보세요. 1977년에 뉴욕에서 번개가 쳐 가지고요. 한 26 시간, 만 하루 2시간 동안 정전이 생겼는데 그때 절도, 방화, 폭력 범죄자 체포된 게3,776 명입니다. 건수로 따져도 이게 2명 1개조로 해도 거의 뭐 1,700건 이런 부분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사진이 뭐냐면.. 계엄군이 물러나고 난 뒤에 해방구에서 시민들이 구휼미처럼 식량들을 이렇게 기부 받아서 모아 가지고 도청으로 가는.. 자립하는 거죠. 그죠? 저 사이에 약탈이 없었어요. 함께 나눠 먹는 거에요.

 

13:28

엄청나게 많은 부상자가 있으니까 그 다 그냥 헌혈하러 나오고, 근데 자꾸 여기다가 정치인들이 덧칠을 하고, 또 이상한 음모꾼들이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갖다 얹고, 그러면서 많이 좀 상하지 않았나 싶어요.

 

13:44

시청자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 사태 이후에 80년대의 대학가는 전부 광주 사태를 그때 항쟁이라고 했어요. 광주 민중 항쟁을 발판 삼아서 자신들의 입지를 넓혔습니다. 그때 전부다 막스레닌주의였어요. 계급론으로..

 

14:04

근데 지금 여러분 다시 들여다 보면 저 80년 5월달에 누가 저기에 막시스트가 있었습니까? 누가 친북주의자가 있었습니까? 누가 주체사상파가 있었어요? 전부 태극기를 사랑하고 태극기 아래서 모였는데..

근데 우리가 그걸 지키지 못하니까 막스레닌주의 저거를 가져가고 그 위에 또 다른 정치세력이 또 가져가고 그래서 망가져 가는 거 아니에요. 이 정신을 제대로 지켜야 된다는 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자 의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도 못하면 우리 후세들이 더 힘들어지는 거예요.

 

14:41

그래서 이제 사태수습대책위가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이제 학생수습대책위가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일반 수습대책위가 만들어지죠. 이 일반 수습대책위의 사진입니다.

여기에 보니까 23일쯤 된다고 보는데 지금 여기 저 전화받으시는 분 흐릿하게 보이지만.. 저 분이 광주지역에서 모든 분들로부터 이제 존경받았던 최한영 독립 투삽니다. 일제시대 때.. 굉장히 이제 많은 분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해서 이런 난리가 나니까 이제 비로소 저 분들이 나서기 시작하는 거예요.

 

15:21

나서서 의논하고 절차를 만들고 이른바 질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시는 거죠.

거기에 장휴동씨가 아마 이 분이라고 알고 있고, 그리고 여기에 조비오 신부는 안 보이는데, 이 분은 5.18조사를 하다 보니까 뭐 참 억울하게 됐구나 싶은데.. 지금 이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사전 명예훼손 걸렸습니다. 이제 두분 다 사자가 됐네요.

여기 앞에 있는 그 이종기 변호사라고.. 요 사진의 뒷 모습이 나온 이 분입니다. 굉장히 좀 리버럴한 분이세요. 73년도에 유신이 시작되고 서슬 퍼럴 때 공개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했다가 변호사 자격을 7년 동안 정지시킨 그런 나라에서 ㅎㅎ 저 분이 이제 생전에 버틴 거죠.

 

16:12

그러니 뭐 속으로 스트레스도 많이 다칠 거고 한데도 불구하고 곧이 곧대로 자기의 신념대로 살아가신 분인데 이 광주가 이 모양이 되니까 역시 마찬가지로 이제 내가 어른이니까 하고 나선 겁니다. 나서 가지고 올바른 길을 가야 된다 하는 생각을 갖고 계시는 데 그게 관념적인 올바름이 아니고 아주 지혜롭고 현명한 올바름인 거 같아요.

그래가지고 저 분 하고 이 조비오 신부 두 분이서 최후에는 학생들에게 무기를 수거하러 다니십니다. 아무리 자네가 옳더라도 일단 살아야 되네. 총을 내놓게.. 그 길을 같이 간 사람이 조비오신부입.. 저도 이 분이 처음 인제 조사하다 알게 됐습니다. 근데 이제 이런 분들이 서로 정치적 입장이 대립되어 가지고 소송으로 이제 전두환 대통령과 조비오 신부님 어 치고받고 하셨는데.. 어쨌든 그렇습니다.

 

요기 아까 돌아선 사진인데.. 요 분이 누구냐? 힌츠패터라는 독일 특파원입니다. 기자죠. 여기 와서 5.18을 처음부터 끝까지 중간에 21일날에 나갔다가 23일날 다시 한국으로 들어 오죠. 일본에 가서 그동안 찍었던 필름을 일본에 가서 죄다 현상하고 23일날 다시 돌아왔죠.

이게 이제 도청 앞에서 아주머니들이 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아주머니들만 그랬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랬죠. 의사도 마찬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다 내놓고 서로 그냥 쓰라고 하면서 서로 도와주는.. 왜? 피해를 봤잖아요.

 

17:51

피해를 본 사람에 대한 그 도움의 손길.. 음 당연히 인간이 해야 된다 하는 생각.. 또 이 정치라는 게 얼마나 때로는 좀 흉악스러운 나쁜 것이라면 좋은 일을 해놓고도 좋게 안 보게 만들어 버리잖아요.

5.18에 저 분들에 대한 그 행위 자체가 민낯 그대로 들여다 보면 예쁜 마음들이 참 많은데, 이번에 이제 정치적으로 도배를 하고 폭도들로 내란 범죄자들로 보고 나면 뭐 이건 완전히 부패된 음식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연구를 더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18:32

이제 5월20일 첫날 사람들이 막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저기서 이제 보고회를 갖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이종기 변호사가 계엄사에 걸어가서 요구조건 제시하고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이제 보고회를 하고 뭐 그러는 거죠.

이 자리에서 이제 그 장유동씨라는 분이 우리 무조건 총 다 반납해야 되고 했을 때, 또 그걸 반대하고 나선 분이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김종배씨 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피 값을 그렇게 헐값에 넘길 수 있냐?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그러면서 죄없이 잡힌 우리 친구들 다 불러내야 되고 하여간 굉장히 정당한 이야기들 많이 했죠. 그리 뭘 실행되겠습니까만은.. 그런 일들이 벌어지면서 첫날 수습대책위원회의 보고회가 열어져 있는 그 분수대 옆에의 사진인 것 같습니다.

 

19:32

저 날 이후로 저 사람들이 저기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청 상무대에 안치돼 있는 관들을 이제 들고 나와서 합동장례식처럼 위령제를 지내고 그랬죠. 사진들이 이제 여러 개가 있네요. 아들을 집에 데려 가려고 이 아마 군부에서 찍었나 아니면 신문사가 찍었나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달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시대에 이 공간에서 활동했다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끝까지 섰던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ㅎ 다 엄마가 불러서 가고, 형이 잡아 당겨서 가고, 그래서 24, 25, 26 되면 다 꺾어지죠.

 

20:14

그 당시 시위대들이 몰고 다니던 차, 장갑차, 버스, 김대중 석방하라 이런 거.. 이때 보면은 이 유가족들이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을 때 이게 관들이에요. 그죠? 이제 도청앞 위령제를 할 땐데 관이 모잘라 가지고요. 요때부터 외곽으로도 못나가고 참 애를 많이 먹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 분들은 관이라도 있는데, 5월20일날 노동청 앞에서 차량에 압사당했던 전투경찰 네 분은 이때도 관이고 뭐고 그냥 한쪽에 방치되 버렸어요. 시신이 부패해서 변화해 간 과정들이 참 끔찍하게 된 거죠. 그죠? 반성해야 되는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21:02

다음 사진 볼까요. 이게 24일이면은 60구에서 한 70구, 80구까지 올라갔을 거에요. 왼쪽 사진은 행방불명 됐던 군인의 사진입니다. 그 시신으로 발견됐는데 이게 이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게 원래 저 분은 26일날 발견됐는데 여기 사진은 24일로 찍혀 있거든요. 뭐 하여간 그렇습니다.

이게 이제 회수되는 무기들입니다. 대보면은 M1과 카빈이죠. 예비군 무기이기도 하고 그 당시에 학도호국단에서 고등학교에서도 저런 총들이 무기고에 있었으니까 그게 다 무장하고자 하는 시위대들에게는 목표가 됐고, 다 끌어 모았죠. 그랬다가 이제 반납하거나 뭐 어떻게 하자 하면서 이제 설치하는 겁니다.

 

 

21:54

이 총이 바로 켈리버.. 캘리버라는 게 구경인데요. 캘리버 50 총열이 뭐 되게 두껍죠. 좀 총알도 엄청 크죠. 캘리버 50하면은 0.5 인치라는 얘기입니다. 그 구경이 1.25미리 이 사람들이 저기서 이제 총기 사용법이나 뭐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지금 무기를 이렇게 모으고 있는 이쪽이 그 도청 지하실쪽이거든요. 별관..

여기서 이제 다이너마이트가 보관이 됐고 수류탄도 한 280여발이 보관됐고, 그래서 그 다이너마이트를 화순탄광에서 갖고 올 때 이미 조립을 해 갖고 가지고 왔는데, 그 걸 해체하고.. 그죠?

 

22:41

이 분이 아까 말씀드린 이종기 변호사십니다. 26일날 아침에 계엄군이 야금야금 들어오니까 이제 죽음의 행진이라고 해서 목숨 걸고 걸어가죠. 4키로.. 3키로 그 정도를 걸어갑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때 이제 조비오 신부나 이종기 변호사는 이런 분들이 계엄군들에게 들어오지 마라, 당신들 들어와서 비극이 터지니 들어오지 마라, 그래서 이제 정지시키는 그야말로 목숨 건 도박을 한 겁니다.

다행히 그 당시 뭐 계엄군도 좀 무작스럽고 뭐 잔혹한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 우리 이웃집 형제고 한데 그들도 이제 말이 통.. 말이 되니까 이야기 하면 또 잘 안 들어가겠다고 하는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23:26

그리고 27일 새벽 다시 시내를 장악하면서 계엄군이 점거를 하죠. 그 이후에 이렇게 잡혀 가던 모습입니다. 그 이종기 변호사 그 분은 시위를 한 것도 아니지만 역시 계엄법에 의해서 뒤에 손이 묶인 채 잡혀갑니다. 잡혀 가도 당당하게 자기 할 일을 자기가 이야기 하고 뭐 이 분은 이제 구류도 아니고 뭐 며칠 있다가 풀려날 수밖에 없죠. 그죠?

우리 시대가 저렇게 험하게 살아야 했던 시대였다 하는 걸 좀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24:00

이것도 인제 5월27일 마지막 날의 사진입니다. 위에서부터 보시면 시민궐기대회를 한다고 해서 다 모으고, 저게 이제 동원 문화가 아직 남아있어 그렇겠죠.

그 사태 수습하겠다고 나서는 이제 고등학생, 중학생 얘들이 이제 거리청소하는 데 앞장 서고, 뭐 헌혈하는데 앞장 서고 한 것은 사회의 복구에 많은 힘이 되어 준 겁니다.

 

24:28

그 밑에 보면은 앰블런스에 실려가는 부상자, 계엄군들이 있구요. 그 저것만 봐도 거의 전쟁터죠. 오른쪽이 이제 장갑차가 서있는 금남로 거리를 보면 말끔하지 않습니까? 그 날 새벽부터 거리청소를 쫙 되간 겁니다.

 

24:47

지금 보시는 사진들은 사진이 문학일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사진들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그 김영만 전동아일보 사진부기자셨는데, 지금은 아마 월간 사진예술 대표로 계실 거에요.

이 분이 그 5.18 당시에 뒤늦게 인제 그 취재하러 가셔서 그래서 한 3년찬가, 2년차 기자였는데 그 카메라를 들고 현장 끝까지 이렇게 추적해 들어가면서 그 프레임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어요.

 

25:23

지금도 이 사진을 보시면 자기 형뻘 되는 군인들 앞에서 뒷짐을 지면서 고개를 숙인 저 소년의 생각, 저 표정에는 아마 슬픔과 분노, 그리고 억울함 뭐 이런 게 다 섞여져 있는 더군다나 이 반대편에 서있는 군인들의 표정을 보면 뭐라고 야단을 치면서도 왠지 눈빛에는 애정이 담겨있는 그런 사진이죠.

 

25:52

다음 사진 한번 볼까요? 야 이것도 참 절묘한 시간인데 탁 찍은 겁니다. 그저 전차가 지나가는 데 아침 거기에 대학생 집결소라고 해서 페인트로 칠을 해놓은 곳입니다. 아마 저 부근에서 대학생들이 모일 수 있도록 집회를 열면서 집회 주체가 저걸 해야 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 대학생들을 향한 전차의 포신 참 상징적이죠. 그죠?

군부의 무력이 그 대학생들에 대한 압박을 해가는 그런 장면.. 오랫동안 생각하게 하고.. 이런 장면은 그 김영만 사진부기자는 못 들어가는 곳까지 이렇게 끝까지 들어가서 이 사진들을 건져냈습니다.

 

26:44

저기 손이 뒤로 묶여져 있는 저 줄들이 그 당시에 쓰던 전기줄이에요. 얇은 철사나 마찬가진데 그래서 뒤로 묶어서 사람들을 저렇게 눕혀 놨습니다. 저 때 시위 가담자부터서 연행 광주 사건 관련해서 연행자가 2,599명이네요. 참 적잖은 사람들이 잡혀 갔습니다.

 

27:08

이 사진도 저는 참.. 오월이 되면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사진 중에 하나입니다. 저 아이의 눈빛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하는 그 질문들을 던지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 뒤에 통곡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배경 삼아서 또 그 멀리 펼쳐져 있는 비켜가는 구름들 사이로 한편으로는 무상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의미 있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저 아이의 눈빛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런 사진입니다

 

27:44

마지막 사진이 이 사진입니다. 5.18 마지막 날 진압이 끝나고 나서 이제 사회가 복구될 때 찍었던 사진인데 5.27일이죠. 그죠? 저 유리창에 총탄이 뚫고 들어간 흔적.. 그리고 간판이 떨어져 가지고 누군가가 주서서 무심코 올려 놓는 바람에 뒤집혀져 있는 공중전화라는 저 글자.. 깊게 패인 주름과 그 눈빛 사이로 뭐 희망 차거나 밝거나 그런 게 아니죠. 그죠? 이 한 장의 사진에 참 많은 게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28:23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5.18이라는 그 역사적 사건 아래는 이렇게 많은 분들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5.18 광주사태라고 하는 5.18민주화운동이 된 이 사건이 발생한 지 벌써 42년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역사 혹은 무조건 비판하는 역사를 역사로 알고 온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2개의 갈라지고 대립하는 진영의 안목에 갇혀서 이 역사를 배운 거 아닌가?

대한민국은 반공 입국으로 태어나 2년도 안돼서 3년간 또 공산주의자들과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와중에 고착된 이 반공주의에만 갇혀서 반공 사관으로만 역사를 배우면 자꾸 골치 아프게 되는 거예요. 이러다 보니까 전투 현장이 담긴 사건을 볼 때면 무의식 중에 어느 한 편을 들어야 속이 시원한 것 처럼...

 

29:22

계엄군 편을 들든.. 시민군 편을 들든.. 양쪽 다를 볼 수 있는 그런 시각에 훈련이 되어 본 적이 없는 거죠. 늘 우리는 북한군과 우리 싸웠다. 당연히 북한군 나쁜 놈이죠. 늘 이렇게 흑과 백으로 본 거 아니에요?

2차대전 영화를 봐도 어릴 때 저는 기억이 납니다. 외국영화를 보면 누가 우리 편이냐? 우리 편이 어느 쪽이냐를 알고 제가 영화를 볼려고 하는 그것처럼 아직도 우리가 그 유아기의 수준.. 그러니까 잠재해 있는 거 아닌가?

 

29:57

물론 6.25와 같은 경우에 그러한 시각이 실지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5.18의 경우는 그게 아니다 이거죠. 우리끼리 싸운 거에요. 또 우리끼리 다퉜던 거다. 어느 한 편을 들면서 사건을 들여다 보면 결국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는 확증 편향에 빠져서 정말 놓쳐서 안 되는 것을 놓치고, 인식도 비틀리게 된다. 이거죠. 그러면 우린 조심해야 된다.

 

30:24

5.18같은 사건은 양쪽 다 우리의 이웃이고, 형제요,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정말 아픈 마음으로 들여다 보아야 제대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도 대한민국을 거부하거나 반대하지 않았고, 양쪽 모두 애국심으로 몸을 던져 가지고 만들어졌던 사건 아니겠습니까? 그 희생이 지향하는 바는 보다 나은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한 염원이었죠.

그 당시 시민군이든 계엄군이든 그 당시에 부끄럽지 않았던 그 정신 그 오늘날 대한민국의 거대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그때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기 때문이죠.

5.18의 피가 7년 뒤엔 6.10항쟁을 거치면서 무혈혁명으로 민주화를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제 고인이 되셨지만 전두환 대통령도 역사 앞에서 국가의 수반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 했고.. 그죠?

 

31:23

게다가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뒤에 여러 사람을 어떻게 이 5.18 가지고 옥고를 치르면서도 단 한 번도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그 당시 군사력, 군대 이런 걸 가지고, 저항한 적이 없죠. 오히려 종교로 승화시킬려고 애썼습니다.

 

31:41

저는 그런 면에서 보면, 저 분을 다시 봐야 되는 거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는 정적이었지만 김대중 전대통령도 그 분이 재임 시절엔 자기 자신을 사형수로 만들었던 내란음모 주도한 자로 만들었던 전두환 전대통령을 도 사면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5.18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던 전두환과 김대중 두 분은 아마 저 하늘에서나마 오늘의 대한민국을 내려다 보시면서 서로 덕담을 나누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32:15

지금 민주주의의 역사가 장대한 서양에서의 어떤 나라도 우리처럼 단 한번 딱 9박10일간의 치열한 충돌만으로 25년 지속된 군정에서 민정으로 화합하며 변화시킨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는 산업화 뿐 아니라, 민주화도 속성으로 지금 성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5.18은 우리에게 아주 자랑스러운 역사인 것입니다.

 

32:45

우리가 감싸 안아야 할 역사, 우리가 자랑스러워 해야 할 역사가 되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사건의 민 낯 그대로의 역사를 들여다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실이 자유를 지킵니다. 자유 대한민국의 두 전직 대통령이 남겨준 5.18과 관계된 거대한 족적에 담겼던 그 침묵의 그늘을 덜어내서 우리가 후세에게 아주 자랑스러운 우리 현대사를 전해주는 역사적 사명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기도 합니다.

 

이것으로 5.18 통사를 마치고, 다음 시간부터는 5.18 후사로서, 어떻게 해서 보상 체계가 만들어졌고, 민주화운동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러면서 이것이 현실 정치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그래서 오늘날 5.18로 인해서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누구나는 에필로그로 대망의 막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이 올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34:01

[음악]

 

댓글목록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이동욱기자는 5.18에 대하여 공부를 해야할것 같습니다.
친북좌익 자가 업었다니 바로 호남의영웅!김대중 무리들이
김일성의 하수인에 불과한 간첩이 아니엇던가!

시위대들이 원하는것이 헌법정신이라고하는데
광주공공기관을 불태우고 파출소까지습격하여
과격한시위를하여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자들이
헌법정신을위하고 광주시민을 위해서인가!

경찰4명은 관이없어서 시신을 방치했다고하나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던가!경찰의 시신을 방치한것은
무장세력들의 적이었기에  고의적으로 방치한것이다.
관이 부족했다면 경찰4명 먼저 관에다 모셔야 했으며
시위대보다 공직자인 경찰분들을 대우했어야 옳았다.

이동욱기자는 5.18의 핵심! 장갑차주인공은 운운하지않으니
모르는것인지.고의적으로 빼버린것인지 의문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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