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장군과 운명적으로 만나다 (이순자 자서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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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달래1 작성일22-09-26 15:56 조회2,308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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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장군과 운명으로 만나다
1961년 5월 16일
충격적인 뉴스가 새벽을 숨차게 두드렸다. 5.16 군사혁명이었다. 혁명이 일어났다는 뉴스에 대한국민들의 반응은 경악과 동요, 그 자체였다. 그때까지 혁명을 주도했다는 박정희 장군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고, 일반적인
인물평 외엔 들은 애기도 별로 없었다. 다만 박 장군의 부관을 지낸 동기생 손영길 대위로부터 박 장군의
성품이 대쪽 같다는 이야기를 들어 막연히 훌륭한 군의 대선배라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한 동네 이웃이었던 육사동기 이동남 대위로부터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던 날, 육군대위 계급에 불과한 남편은 군사혁명을 주도한 박정희 장군과의 면담을 결심하고 대담하게도 육군본부로 찾아갔다. 그리고는 박 장군을 만나자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고 한다. “저는
혁명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제가 시도하려고 하는 것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로
하여금 혁명지지를 위한 시가행진을 하도록 주선해보는 것입니다."
젊은 장교의 패기라고 하기엔 너무도 당돌하고 대담한 행동이다. 나는 지금도 대위 계급의 그분이 서슬이 시퍼렇던 혁명주체인 박정희 장군 앞에서 혁명에 대해 그런 엄청난 발언을 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눈앞이 아찔해지고 만다. 거사 이틀 후인 5월 18일, 남편은 직접 '5.16 혁명지지를 위한 육사생도들의 시가행진'을 주도했다. 육사의 모든 생도는 물론 교수와 훈육관들까지 참여한 대규모 혁명지지 행진이었다. 행진대열은 동대문에서 출발해 시청 앞 광장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시청 앞 광장에서 혁명지지 선언문 낭독과 함께 혁명기념식이 거행되었다. 박 장군은 물론 혁명주체 주요세력이 모두 참석한 기념식이었다.
군 엘리트의 산실인 육사생도들의 시가행진을 통한 단호한 혁명지지 표명은 결과적으로 혁명 직후 불확실하던 군과 사회의 분위기를 급격히 혁명지지 쪽으로 몰아주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었다. 돌연한 혁명에 동요하고 있던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도대체 남편은 무슨 생각으로 혁명 다음날 혁명주역을 만나고 그 다음날엔 혁명지지 행진까지 주도했던 것일까. 그 미묘한 역사적 시간에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의아해 하던 나는 언젠가 마음먹고 그 사실을 질문했었다. 소신대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일단 식구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의문을 갖고 질문하면 늘 성의를 다해 설명해주는
것이 그분 성품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혁명 당시 나라 형편은 그야말로 위기였소.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엄청난 사실을 들었을 때 내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혁명은 이미 일어났는데 혁명을 일으킨 군인들에 대해서도, 또 혁명의 성공 여부조차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이었소. 만일
그 군사혁명이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겠소?
혁명을 일으킨 무장 세력과 또 다른 무장세력 간의 충돌이 필연적으로 벌어지게 될 것 아니오? 나라는 어지러운데 군사세력들이 일어나서 서로 싸우고 사상자가 나면 대체 나라 사정이 어떻게 되겠소? 그야말로 호시탐탐 남침 적기만 노리고 있는 북괴에게 치고 내려올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오. 그날 혁명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이거야말로 잘못하면 대한민국의 최대 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디다.
그러니 잠시도 더 기다릴 수가 없었던 거요. 혁명을 주도한 사람을
직접 만나 그분으로부터 직접 얘기를 들어보고, 만약 주체 세력들이 정말 자신들의 주장대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정의로운 사람들이라면 내 힘 닿는 데까지 혁명이 성공하도록 신속히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소. 물론
그 상황에서 박 장군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또 만난다 해도 자칫하면 내가 큰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도 생각은 있었소. 나라를 위해 혁명할 사람들이라면 똑같이 나라 사정에
대한 우려 때문에 질문하는 내 진의를 알아 줄 것이라고 말이요. 혁명의 성격을 반드시 알아야만 했으므로
지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오. 모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는데 나라고 해서 내 한 목숨에 연연해
그 큰 국가의 위기에 보신만 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소."
민심을 얻는 데 성공한 혁명세력은 이후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혁명을 주도했던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이 바뀌었다.박 장군은 제2대 의장으로 취임했다. 박 장군도 강한 인상을 받았던 모양인지 의장 취임 후 그이를 의장실 민원비서관으로 임명했다. 자신의 곁에서 일하게 한 것이다. 그것이 1961년 7월의 일이다.
자신의 꿈과 포부였던 군의 야전(野戰)이 아닌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실이라는 임지가 남편에겐 참 뜻밖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훗날 역사의 전면으로 나설 중요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직속상관인 비서실장 박태준
대령, 비서실장 보좌관 윤필용 중령, 경호대장 박종규 소령
같은 인물들 사이에서 박 의장을 보좌하면서 혁명초기 권력중심부의 중요한 목격자가 되어갔다.
댓글목록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5.18은 이미 들통나 답까지.책으로
좌파들이 고도의 꼼수를 부려봤자
몰상식한 좌파들의 능력으로는
5.18의 진실을 밝힐수없으니 보수정권에서
마무리지어 역사를 정리하고 간첩문재인 무리들은
강력히 처단하고 좌파의 뿌리를 뽑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