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박사도 연루된 독립협회 사건
페이지 정보
작성자 ko박사 작성일25-09-28 16:26 조회2,269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박사님의 이승만 글을 읽고 문득
위키피디어에서 펌
1898년 11월경 독립협회 사건이 발생하였다. 11월 5일 독립협회의 이상재, 남궁억 등 17인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한다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 등 대중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1월 15일 고종은 내각을 개편하고 독립협회의 복설(復設)을 허락하는 동시에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것을 약속하고 조병식 일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20] 11월 21일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던 중 수구파들이 보낸 보부상 2,000여 명의 습격을 받았다. 11월 28일 고종은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이승만·남궁억 등 50여명을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하였다.[21] 그러나 12월 23일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Harry Sherman)의 집으로 피신하였다.[12] 이후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링크 1 : 박종인의 땅의 역사 - 독립협회 파괴와 단두대 수입을 시도한 고종
독립협회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면, 이승만이 반만년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정치인이었으며 고종이 개혁군주라는 소리는 구라 중에 구라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