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된 영웅담의 수혜자 존 F.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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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thfinder12 작성일25-09-30 23:04 조회1,823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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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조된 영웅담의 수혜자 John F Kennedy
2차대전 中 케네디의 이기적인 습관
2차 대전 중 존 F.케네디는 어뢰정 정장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순찰을 마친 후 귀환할 때, 연료 보급을 위해 줄을 설 때 첫 번째 자리를 잡기 위해 최고 속도로 배를 모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매번 최고 속도로 부두에 접근하여 마지막 순간에야 엔진을 껐다.
기관사 패트릭 맥마흔은 무리하면 엔진이 꺼질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케네디는 듣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엔진이 마침내 고장났고, 109호는 미사일처럼 부두에 부딪혔다. 일반적인 지휘관이라면 케네디를 그 자리에서 군법회의에 회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이었던 앨빈 클러스터는 '그의 친구'를 봐주었다.
일본군 구축함 발견 신호 무시
3척의 PT선이 순찰을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북쪽으로 가는 일본 구축함 중 한 척을 발견하고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선장은 무전으로 동료 선박들에게 일본군 구축함이 오고 있다고 알렸다. 오전 2시 30분경, PT-169호의 포터 중위는 구축함의 인광성 흔적을 보았다. 그는 나중에 자신도 무전으로 일본군 구축함의 존재를 알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케네디가 탑승한 PT-109에서는 임박한 위험에 대해 무심했다. 로스 소위는 망을 보기 위해 갑판에 있었고 기관사인 맥마흔은 엔진실에 있었다. 승무원 두 명은 잠들어 있었고, 다른 두 명은 나중에 "누워 있었다"고 묘사되었다. 승무원 2명만이 정해진 위치(망을 보는 로스 소위와 엔진실의 맥마흔)에 있었다는 것이다. (* 위험을 탐지하거나 적함을 발견하려면 적어도 2명이 망을 보고 있었어야 했는데 1명만 망을 보고 있었다는 것은 문제였다)
(*전쟁 기간 동안, 적함에 충돌해 부서진 미군 어뢰정은 PT-109 한 척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볍고 빠른 PT 어뢰정은 일본 함정이 다가올 경우 재빨리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와같은 충돌 사고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
나중에 공군 조종사였던 JFK의 형 '조 케네디'는 JFK에게 편지를 보내어 물었다. "구축함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니?"
케네디 아버지의 영향력
케네디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어야 했지만,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그의 아버지의 영향력 때문에 회부되지 않았다고 한다.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영국 대사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109호는 3개의 엔진 중 2개를 꺼 놨었는데, 이처럼 엔진을 두 개 끄는 것은 해군의 기름 절약을 위한 지침을 따른 것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적함이 근처에 있다는 무전을 들었다면 엔진을 켰어야 했다. 즉, 동료 함정들의 무전을 듣고도 반응하지 않은 것은 이 사건의 핵심적인 원인일 수 있었다.
케네디를 미화한 기자, 존 허시
전쟁이 끝나고, 케네디는 뉴욕에서 저널리스트 존 허시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는 JFK의 전 여자친구 중 한 명과 결혼한 지인이기도 했다. 허시는 Life 지에 PT-109 기사를 쓰자고 제안했다. 케네디는 다음 날 아버지와 상의했는데, 아들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하고 싶어했던 조 케네디는 그 아이디어를 좋아했다.(※ Life지는 수록을 거절했고, New Yorker가 승락함)
(※ 나중에 존 허시(John Hersey)와 한국어 발음이 비슷한 세이모어 허쉬(Seymour Hersh)라는 작가가 케네디에 대한 폭로 서적(The Dark Side of Camelot)을 집필함)
미 해군 동료들, 구축함 충돌에 대해 케네디 비판
PT 함대의 동료 중 일부는 구축함 충돌의 원인을 "Crash" Kennedy(부두 충돌 사고로 이러한 별명이 붙음)로 돌렸다. 그의 승무원은 고도의 경계태세를 취했어야 했다고 그들은 말했다. 룸바리 기지의 지휘관이었던 워필드는 나중에 케네디가 "특별히 훌륭한 지휘관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워필드의 후임자인 중령 잭 깁슨은 훨씬 더 강경했다. 깁슨은 나중에 "그는 승무원의 매우 열악한 조직력으로 109 를 잃었다. 그가 물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가 한 모든 일은 잘못된 일이었다." 라고 말했다.
다른 장교들은 일본 구축함 아마기리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109호 엔진이 고장난 원인을 케네디에게 돌렸다. 그는 엔진 하나만 가동하고 있었고, PT 선장들은 갑자기 스로틀을 최대 출력으로 밀면 엔진이 종종 고장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다른 PT 보트가 '도쿄 익스프레스(일본군 구축함)가 109가 순찰하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신호를 두 번이나 보냈다. 왜 케네디의 무전수는 갑판 아래에서 무전을 듣고 있지 않았을까?
존 허시의 아이디어는 '날조'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 침몰사건에 관심이 가질 않고, 침몰 후 케네디의 '영웅적인 구조 활동'이 주목을 받았다는 데에 있다. 앞서 말한 기자 존 허시가 '무능한 지휘관' 케네디를 구한 것이다.
존 허시가 생각해낸 기사거리, 즉 '아이디어'라 함은 침몰 후 JFK가 동료들을 헌신적으로 구했다는, 완전히 날조한 내용을 말한다.
배가 침몰하자 케네디는 다친 동료를 끈으로 연결해 그 끈을 입으로 물고, 근처의 무인도까지 무려 3마일(4.8km)을 수영해 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무인도에 이틀간 있었지만 물과 식량이 없어서, 이번엔 케네디가 혼자 인근 큰 섬으로 또 4km를 헤엄쳐 갔다는 것이다. 그 곳에서 코코넛 껍질에 구조 메시지를 적어서 원주민에게 주며 미군 기지에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제대로 먹지도 않은 케네디가 무려 8km 이상 헤엄치고, 동료까지 끌고 움직였다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존 허시는 창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케네디는 대통령이 되었다.
영어 원문 : (케네디의 행적, 동료들의 평가 등)
https://www.historynet.com/john-f-kennedys-pt-109-disaster/
한국어 자료 (구조 과정):
댓글목록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육군 전투담'에 대비하면 '해군.해병 전투담'은 적은 편이죠. ,,. '케네디' 중위의 제2차대전시 '잠수정 정장 - 해군 중위'로서 무용담은 일본 구축함에 피격되어져 부하 3명을 인근 섬으로 구조하고 기진맥진하여 익사할 뻔,,. 이 내용은 거의 아오실 터! ,,. 그러나, 이 게시판 처음 ~ 후반 직전 까지의 내용들은 저는 이게 첨입니다. 좀 부끄럽,,. ^( ^ 우리나라도 물에 익사한 부하를 구조하다가 익사하는 지휘관 얘기가 있는데요; 아실지 모르오나만은도요;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통리 직전 昭陽江에 흘러 유입되는 '인제군 기린면 현리' 로부터의 '내린천!' ,,. 여기에서 미군 공병대대 예하 미공병중대가 1951년 중공군 침공에 후퇴를 위한 '급속 도하 작전' 중 익사 직전인 공병대원을 공병중대장 'RIvingston' 공병 대위가 허우적대는 부하 2명을 1명씩 2명을 구하고 도중에 자신은 기진하여 소양강 강물에 익사.,,.
내종에 이 사실을 통보받은 본국의 어머니가 진실을 직접 확인코자 급거 한국에 오셔서, 사건 현장 자초지종을 설명 들으시고는! ,,. 일단 본국에 돌아가서,,,. 다시 한국에 오심! ,,. "이곳에 교량이 있었더라면 내 아들은 아마도 않 죽었었을 터! ,,. 이곳에 교량을 설치하되 모든 비용을 내가 전담할 터이니 '교량 명칭'을 "리빙스톤 橋"로 할 수 있겠는냐?" ,,. 이에 당시 미제8군과 한국공병단은 대환영, 감사! ,,. 동란 기간중은 물론, 새천년 초까지 근 40여년 간, 크게 이용! ,,. 제1군지역에서 제ⅲ군단 지역으로의 南北 主補給路 Main Suply Route{主補給 後送軸, Axies Suply Evacuation} 역할 했으며, 동서 연결도 겸한 기능인 요지에 설치/지정되기도 했었기에 "군사보안목표 '나'급"였읍니다. {저는 베트남 파병 귀국 후, 1972년 말 '충성대 - 3사교'에서 제Ⅴ군단 제3사단 중대장 으로 갔다가 보병학교 OAC후. 바로 그곳 육군제2사단제17연대'에 소속 보직되어져 ,,. 근3년여 근무했었기에,,.}
'리빙스톤 교' 바로 앞은 3차로인데 '제12사단 헌병 검문소'도 있었음. '을지 검문소!' ,,. 그리하여 제가 알기로는 '금 뒈쥬ㅣㅇ'롬 직전 초기 {2000년 초기} 까지 잘 써먹다가,,. 훗날 전역후 우연히 그 부근 통과타가 ,,. '금 뒈쥬ㅣㅇ' 롬, 나쁨 놈 ㅅ ㄲ ! ,,. 빠~드득! ↘
Pathfinder12님의 댓글
Pathfinder12
사례 공유 감사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케네디의 경우는 부상자까지 안고 장거리 수영을 할 수가 없었다고 보이는데 잡지에 실렸을 때 간과된 모양입니다. 이 글은 민주당과 흑인들 간의 커넥션의 시작이 케네디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작성해 보았습니다.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아, 예! 고맙! ^) ^ 계속 ↖ 第ⅲ軍團司令部{麒麟臺(기린대)}를 지나서 서쪽으로 인제.원통-양구-춘천으로 가려고 ‘리빙스톤 교’ 방면으로 가는 중인데 ‘리빙스톤교’가 않 나오고, 그 약 50미터 하류{남쪽}에 약 2배 정도 크기에, 높이도 약 1미터 정도 높은 교량이 신설되었으며, 그 교량 명칭은 ‘인제 대교!’ ,,. ‘리빙스톤 교’는 그대로 존치 중이기는 했지만 그 ‘리빙스톤 교’를 사용치 못하게 상판 교량 로면을 뜯고 소양강 此岸(차안)도 대안(對岸)도 양쪽 모두에 흙 뚝을 일부러 조성, 통행하던 도로도 사용 못하게 장애물을 형성, 신설 교량 도로 로면보다 훨씬 낮게함으로써, 누가 봐도 초라하고도 빈약하기 그지없! ,,. 문제는?! ,,,. 그 ‘리빙스톤 교’를 보면서 '급속 도하 작전 중 부하를 살리고 기진해 익사'한 당신 아드님 ‘리빙스톤’ 공병 대위를 회상코져 오신 어머니가 이를 보시고 당국에 매우 섭섭한 ‘유감의 념‘을 피력! ,,,. 그 어머니는 매년 몰래 한국에 오셔서 그곳을 보시곤 했었다는데,,. {교량 명칭을 '신 리빙스톤 교'로 해도 섭섭할 텐데,,.} 저는 이런 얘기를 누군가에게서 얻어듣고는 울분을 불금! ,,., ’지방자치‘는 왜 하는가? "그 ‘리빙스톤 교’ 를 그런 따위로 방치하는 것이 꼭 대책이었을까?" ,,. 오히려 그 ‘리빙스톤 교’ 남쪽 접근로 및 3차로 ‘을지검문소’ 북쪽으로의 도로를 대대적 확장하면서 ‘을지 헌병 검문소’ 인근에 큰 휴게소를 조성하여 ‘국제 관광 명소‘로 거듭나게 끔 할 의향은 없었는지?!,,. ’군단공병여단 예하 Braker’를 동원하면 일도 아닐 터인데,,. ‘금 뒈쥬ᅟᅵᆼ’롬때부터 새천년이 시작되었지만 대가리에 ‘ㄸ‘만 잔뜩 들어찬 대갈통에서 무슨 ’애국적 보은성 발상‘이 나오료? ?? ??? ,,. 지금 거기 어찌됐는지 궁금!,,. Below, to be continued! ↘↘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却說; 이곳 ‘춘천’도 유사한,,. 인제군의 그 ‘소양강’은 춘천에서 ‘북한강’을 만나 합류되어지면서 끝나는데요; 북한강.소양강 합류점 직전에 ‘소양강 처녀’ 노래비를 설치하면서 6.25 당시 군부대 작전용으로 미군공병단에서는 ‘중문교, 중부교’들을 설치하여 ‘전차, 대형 중차량’들을 운영했는데, 민간인 차량들은 그 소양강 동쪽 상류 200미터 지점에 과거 일본군이 설치 운영하는 ‘소양1교’에서만 군부대에서의 헌병들이 ‘차안, 대안‘에 헌병들이 유선전화로 통행 정보를 주고 받아 교신하면서 ’1방 통행‘으로만 사용했었음. 그러다가 역시 ’새천년‘이 되면서 그 미군 ’중문교. 重副橋‘를 그 지점 바짝붙여서 신교량을 왕복 2차선 설치 ’소양 2교!‘ ,,. 그리고는 ’美軍 重門橋.重浮橋’는 철수! 그 자리에 ‘중문교.중부교’를 설치하여 민간인도 사용케 허가한 ‘프랭크 중령’{그는 6.25 때 북진, 평양 부근에서 전사하심. 대령 추서}의 공적사항만 초라하게 소양강 북안에 비석으로만 존재하되 풀섶에 가려져 그나마도 잘 않 뵘! ,,. ,,. 제가 이곳 第ⅱ軍團공병여단 및 제ⅱ군단司令部{雙龍臺(쌍룡대)}作戰處에 투서하여 개선 요구! ,,. 그러자 현재처럼 소양강 합류점 노래비 옆에 좀 상대적 열세는 하나마 보강되어져 있는 바! ,,. 매우 부족하다는 상념! ,,. 이 나라 근본적으로 정신 상태 섞어빠졌음! ,,. ‘지’박사님이 되셔야! ,,, ! 들 끼 새 개 빠~드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