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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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애린 작성일25-12-19 10:10 조회84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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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단독] 2025.12.19.금
'4·3 박진경 대령'의 마지막 부대원 "30만 도민 희생설? 새빨간 거짓말"
한성택 예비역 소령
"암살 옹호한 안내판… 정말 고약한 해코지"
“역사는 진실되게, 바르게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새빨간 거짓말’을 어떻게 역사라고 합니까.”
노병(老兵)은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마지막 기운을 짜낸 것 같았다.
한성택(95) 예비역 육군 소령이다. 한 소령은 1948년 제주 4·3 사건 초기 수습을 맡았던 고(故) 박진경(1920~1948) 대령이 이끌었던 9연대 장병 중 마지막 생존자다.
그는 “남로당 무장 세력의 폭동으로 제주 4·3 사건이 일어났다”며 “당시 박 대령은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강경 진압한 적이 없다”고 했다.
18일 오후 박 대령의 추도비가 있는 제주도 제주시 한 카페에서 만난 한 소령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 건 박 대령이 ‘폭동 진압을 위해선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했다는 이른바 ‘30만 희생설’을 두고 한 말이었다.
‘30만 희생설’은 박 대령 암살범 중 한 명인 손순호 하사의 법정 진술에서 나온 말이다.
이런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5일 박 대령의 국가 유공자 지정 취소 검토를 지시했다.
한 소령은 이에 대해 “‘30만 희생설’ 같은 허위 사실을 잘못 보고받고 한 어처구니없는 지시”라고 했다.
한 소령은 제주도청이 박 대령 추도비 옆에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듯한 안내판을 세운 데 대해선 “목숨 걸고 제주도민을 지키다 암살당한 분을 해코지하는 고약한 짓”이라며 “당장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다.
한 소령은 인터뷰에 응한 이유에 대해 “당시 9연대에서 복무한 장병 550명이 모두 죽고 이제 나만 남았다”며 “있는 그대로 후세들에게 역사를 전하는 게 어른들의 책무”라고 했다.
그는 “4·3 사건은 정말 잘못 알려졌다”며 “지금도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산 증인’이니 정부가 부르면 있는 그대로 증언하겠다”고 했다.
고령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지만, 당시 상황을 말할 때는 거침이 없었다.
◇“부하에게도 존댓말 쓰던 박 대령… 주민들 피난시켜"
18일 오후 1시 한성택 소령은 고(故) 박진경 대령의 추도비가 있는 제주시 어승생한울누리 공원을 찾았다. 그는 하지 정맥류로 거동이 불편하다. 한 소령은 추도비로 걸음을 옮길 때 주춤거렸고,
도랑을 만났을 땐 기자 손을 잡고 겨우 건넜다.
그러나 추도비 앞에선 몸을 꼿꼿이 세우고 거수경례를 올렸다. 그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국가보훈부는 박 대령이 1950년 받은 을지무공훈장을 근거로 지난달 10일 그를 국가 유공자로 지정했다. 그런데 제주 4·3 단체와 현 여권 일각에서 “박 대령은 학살자”라고 반발하자 이 대통령이 박 대령에 대한 국가 유공자 지정을 사실상 철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같은 날 제주도청은 박 대령 추도비 옆에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듯한 안내판도 세웠다.
이에 대해 한 소령은 “박 대령이 부임한 지 한 달 뒤 암살당할 때까지 상황을 지금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박 대령이 학살자란 주장은 명백한 허위”라며 “어떻게 일부 세력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그런 지시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런 사달이 난다”며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또 박 대령을 국가유공자로 모실 것이냐”고 했다.
박 대령은 4·3 사건의 수습 임무를 맡았던 조선경비대(국군의 전신) 9연대장이었다.
남로당은 1948년 5·10 선거와 대한민국 수립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제주에서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 발생 한 달 정도 후인 5월 6일 박 대령은 제주 9연대에 부임했다.
서귀포 출생인 한 소령은 이로부터 1년 전인 6월 30일 입대해 9연대에서 복무 중이었다.
당시 18세 병장이었다.
한 소령은 “당시 제주도민들은 남로당에 들어가거나 군대 가거나 두 길밖에 없었다”며 “거리 곳곳에 남로당 홍보 전단이 붙어 있었는데 나는 나라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입대했다”고 했다.
그는 “박 대령이 취임할 때가 생생히 기억난다. 항상 미소를 짓는 분이라 부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며 “박 대령은 경상도 사투리를 썼지만 부하들에게도 존댓말을 썼다”고 했다.
한 소령은 박 대령이 ‘폭동 진압을 위해선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했다는 ‘30만 희생설’에 대해 “그런 말을 한 사람과 직접 만나 대화하고 싶다”며 “제주도민을 다 죽이겠다고 하면 민족 반역자 아니겠느냐, 상식적으로 군인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30만 희생설’은 암살범 중 한 명인 손순호 하사의 법정 진술에서 나온 말이다.
손 하사는 위생병 신분으로 암살에 가담했다. 위생병까지 이런 작전 방침을 알았다면 부대원 대다수가 이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한 소령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남로당에서 지어낸 말이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박 대령은 공비(남로당 무장 세력)들이 산간 마을로 끌고 간 주민들을 피신시켰다”며
“공비들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으니 산에 있으면 다 죽었던 건데…. 박 대령이 ‘놔두면 다 죽는다’며 데리고 온 것”이라고 했다.
노무현 정부 때 나온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4·3 보고서)’에도 당시 소대장이었던 채명신(전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은 “박 대령은 폭도들에 대한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의 하산에 작전의 중심을 뒀다”고 진술했다.
박 대령이 주민들을 남로당 무장 세력과 떼어놓는 선무(宣撫) 작전에 주력했다는 것이다.
박 대령은 부임 한 달여 만인 같은 해 6월 대령 진급 축하 회식을 마치고 숙소에서 잠자던 중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한 소령은 “새벽 3시, 자고 있던 천막에서 약 50m 떨어진 박 대령의 천막에서 총소리가 났다”며 “비상이 걸려 연대 전체가 집합했다”고 했다. 당시 6월인데도 새벽 날씨가 유독 선선했다고 한다.
한 소령은 “그날 오후 미군이 박 대령을 암살한 범인을 찾기 위해 부대 내 탄약과 총기들을 뒤지기 시작했다”며 “연대 전체가 초상집 분위기였다”고 했다.
그는 “박 대령 장례식이 서울에서 열려 나를 포함한 9연대 장병들은 조문도 못 갔다”며 “부모님 장례를 못 챙긴 것처럼 부대원들이 침통해했다”고 했다.
한 소령은 “박 대령의 장례식이 국군 1호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져 그나마 위안이 됐었다”고 했다.
박 대령이 부임한지 나흘 뒤인 5월 10일 작성된 남로당 측의 ‘제주도 인민 유격대 투쟁보고서’는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다.
남로당이 처음부터 박 대령 암살을 계획했음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한 소령은 박 대령 암살 주범인 문상길 중위에 대해 “입대할 때 문 중위에게 교육을 받았었다”며 “그가 남로당에 흡수되지 않았다면 제주도민의 희생이 이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한 소령은 6·25전쟁 때는 낙동강 전투 등에 참전했다.
그는 “함경북도 두만강 부근까지 진출했는데 중공군이 밀려와 강원도 묵호까지 후퇴했다”며 “나만큼 전투를 많이 치른 군인이 없다.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켰다”고 했다.
그는 “휴전 이후로도 군 생활을 계속한 건 진급해서 박 대령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그만큼 나라를 사랑했다”고 했다.
‘연대장을 암살한 9연대 출신’이라는 딱지가 붙어 다른 군인들에게 차별도 많이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한 소령은 “9연대 출신 군인들이 가장 잘 싸웠기 때문에 결국에는 인정받았다”고 했다.
그는 전쟁 중 대퇴부에 입은 총상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63년 3월 소령으로 제대했다.
한 소령은 지난 10년간 박 대령을 ‘가해자’로 모는 4·3 단체들에 수차례 서신을 보내 “사실 왜곡을 멈춰 달라”고 해왔다. 그는 서신에서 “박 대령이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강경 진압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없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느냐.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한 소령은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며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 소령은 “4·3 사건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분도 많다. 희생된 분들께 애도의 뜻을 전한다”며 “그러나 4·3 사건은 남로당 무장 세력이 주도해 시작된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남로당 잔류 세력이 군을 반역자로 몰아세우고 자기들은 ‘열사’로 치켜세우는 상황이 개탄스럽다”며 “진실된 기록을 통해 제주도에 봄날이 오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댓글목록
용바우님의 댓글
용바우 작성일
친중 종북에다 실력도 내공도 없는자의 막나니 칼춤을 본다.
붉은 범죄자 집단이 대한민국을 망치려고 하지만,착각하지 말라.
jmok님의 댓글
jmok 작성일
김일성 추종자가 빨갱이들의 제주 4.3 반란을 정당화 뒤집기 위한 마지막 반역 발악.
김일성의 6.25 남침은 북침으로 역사 뒤집기 안하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