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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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2-16 06:18 조회1,871회 댓글8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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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사춘기
1956년에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나의 만화책 보기이다. 틈만 있으면 만화책을 보는데 친구한테서 빌려도 보고 가게에서도 빌려 보았다. 그 때엔 왜 그렇게 만화책만 눈앞에 어른거리는지 참으로 특이한 징후라 생각한다. 코주부 김용환의 삼국지 만화는 거의 압권이었다. 그리고 김용환 선생의 펜화로 그린 삼국지 인물 그림에 나는 홀딱 반하였다. 동아일보의 고바우 김성환의 만화도 인기가 있었는데 ‘거드름 피우면서 가는 사람보고 누구냐고 하여 대답하기를 저 사람은 경무대에서 똥 푸는 사람이다’라는 만화는 당시에 걸작 풍자만화였다.
신동헌의 만화도 참으로 재미있었고 뒤이어 나온 신동헌 그림과 비슷한 신동우의 만화도 대단히 인기 있었고 정운경의「아지매」도 많이 읽혔다. 나는 그 중에서 박기당의 만화를 좋아했다. 내용도 좋고 만화 속의 그림 표정이 너무 사실적이었다. 참으로 익살스러운 내용이 많았다. 만화가 이름을 잊었는데 「타잔」이란 만화는 여러 권씩 차례로 나왔는데 그 타잔 만화 기다리느라고 만화가게 앞에서 조바심을 많이도 내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삼국지》《수호지》《서유기》등을 읽고 동네 친구들과 후배들을 한 방안에 모아 놓고 읽었던 고전의 내용을 등장인물을 거의 다 빠뜨리지 않고 신바람 나게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 때의 친구들을 만나면 그 이야기 듣던 일들을 회상해 주어 옛 생각을 하기도 한다.《수호지》는 그때《학원》이라는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아주 건전하고 유익한 잡지에 연재되었는데 후일 <정음사>에서 간행된《삼국지》와《수호지》는 그 즉시 사서 지금까지 지니고 다닌다. 내 경험으로 하여 말한다면 중학교 때 나이 3년 과정에서 얻은 동서양의 고전문학과 그 외 유익한 책들 속에서 얻은 지식 등 정서적인 것은 나의 평생의 사고를 좌우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기도 한다.
열여섯 살 여름방학 어느 날, 우리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까지 모두 데리고 도보로 동삼동으로 갔다. 태종대 못 가서 왼쪽으로 ‘서발’이란 지명이 있는데 그 곳 마을 뒤 왼쪽 언덕을 넘어서면 동해바다의 장관이 펼쳐지는데 특히 그 곳엔 ‘곰푸’라 불리는 맛이 좋은 쇠 미역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 곳으로 곰푸를 뜯으러 갔다.
지금처럼 바다에 관리하는 임자가 있는 때가 아니었다. 모두들 바다에 들어갈 옷차림을 바꾸느라고 준비하는 중 나도 멀찍이 떨어진 커다란 바위 뒤로 가서 수영복을 갈아입으려다가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지난해 가을 언젠가 우리 집 돌담 울타리를 넘어와서 코스모스를 한 아름 꺾어갔던 우리 동네에서 제일 예쁜 여학생이 있었다.
아무도 몰래 먼저 와서 수영복을 갈아입는 후생주택 28호에 사는 윤정자라는 그 여자애가 놀라면서 벗어 놓은 평상복으로 몸을 가리면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그 여자애는 수영복은 다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나도 크게 당황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렇게 맞닥뜨리다니! 예고 없이 일어난 그 장면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좀처럼 있을 법한 일이 아니었다. 서로가 당황하였고 나는 뒷걸음으로 얼른 그 장소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서 수영복을 갈아입었다.
그 여자애와 이후에도 장소가 다른 곳에서도 가끔 지나쳤지만 그 애가 나타났다 하면 그 앞에서는 매번 주눅이 들어 한 번도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네 보지 못한 사이였다.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사춘기 때의 추억이다. 바다에서 어릴 때부터 해변에서 자란 나는 그날 동네사람들 모두가 보는 것 같아서 수영 솜씨도 마구 뽐내며 자랑하였고 해녀들처럼 물속으로 자맥질해 가면서 곰푸도 많이 땄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이렇게 그 무렵의 청학동 동삼동 바닷가 돌바위 위에서 배운 다이빙 솜씨가 나의 잊혀지지 않는 평생의 추억거리가 되었다. 이로부터 7년쯤 흐른 어느 날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군 복무할 때였다.
1963년 여름 내가 스물세 살 때, 나는 미 8군 카투사(KATUSA)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요즈음 한참 미군기지 부대이동 관계로 말이 많은 평택 K-6(Camp Humphrey's)에서 복무할 때이다. 부대에서 하기 해양훈련을 실시하였다.
장소는 서해안 대천 해수욕장으로 정해졌고 2박 3일간의 일정이었다. 나는 미군 PFC(일병) 슈러셔 운전병이 모는 차를 타고 있었는데, 그는 해변의 저편 해수욕장으로 펼쳐지는 서해안의 끝없는 모래사장을 바라다보더니 바다 경치가 너무나 시원한 정경에 오른쪽 바퀴는 바닷물에 잠긴 채 사정없이 질주해 가면서 차를 몰아 기분을 냈다. 젊은 우리들이라 차 위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모두 신이 나서 얏~호! 소리를 연발하였다. 한 바퀴 돌아드는 중에 해변에서 바다 속으로 얼마간 들어간 지점에 다이빙대가 높다랗게 서 있는 게 보였다.
다이빙 하면 나는 추억이 많이 있다. 피란 어린 시절 부산 영도 청학동에서 살았을 때인데, 동삼동으로 가는 왼쪽 아래편 넓섬바위 해군부대 기지 아래 바위 위에서 다이빙깨나 했었다.
봄부터 늦여름까지 바닷가에 갈 때마다 헤엄쳐 건너가서 친구들과 여름 깜둥이가 되어 가면서 다이빙 연습을 하였다. 처음엔 배우느라고 자주 했으나 나중엔 재미가 나고 또 재주까지 피우느라고 까마득하게 높은 곳까지 올라가 뛰어내릴 정도로 극성을 부렸다. 그 후 갯바위 근처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괜스레 그 앞에 가서 한번 폼을 잡고는 나름대로 멋진 다이빙 솜씨를 연출하였다. 그러곤 물가로 헤엄쳐 나오면 아저씨들이 다이빙 잘한다고 칭찬하는 소리에 어린 나이에 마음이 흡족하고 또 우쭐대는 마음까지 생겼다.
대천 해수욕장에서 다이빙대를 보는 순간 불현듯 나는 예전 어린 시절 부산 영도 청학동, 오륙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바닷가에서의 다이빙 추억이 떠올라 동료 부대원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부대가 자리를 잡고 여정을 푼 뒤 우리는 수영복 차림으로 다이빙대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밀물 때인지 바닷물의 수심이 깊은 편이었다. 고참이 나를 가리키며 어서 들어가 다이빙을 해보란 것이다. 나는 준비운동을 하고 헤엄쳐 가 다이빙대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나 오랜만에 하는 다이빙이라 좀 망설여지기도 하였다. 방금 전에 신바람 나게 자랑을 늘어놓았으니 어찌하랴. 못한다고 할 수도 없고.
다이빙대에 올라서 보니 제법 높았고 다이빙 틀은 갯바위 돌과 같이 탄탄한 것이 아니고 두터운 나무 널빤지로 되어 있어서 위에 올라서니 바닥이 울렁거렸다. 부산 영도 청학동이나 동삼동 태종대 자갈마당을 둘러싼 암벽 위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었다. 나는 피치 못하게 다이빙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만 것이다.
사실 나는 다이빙을 단단한 돌 바위 위에서만 해봤지 이렇게 출렁이는 바닥 위에서 다이빙 선수처럼 멋지게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잘하면 되겠지 하고 올라서서 한참 심호흡을 하고는 옛날에 해본 내 방식대로 점프를 해서 바닷물로 뛰어내렸다. 멋진 다이빙이기를 기대하고 발판을 굴러 몸을 솟구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구름 틀이 아래로 휘어진 뒤 솟구치는 순간을 이용하여 점프를 해야 되는데, 갯바위만 생각하고 미리 점프를 해 놓았으니 나의 몸은 중심과 방향을 모두 잃고 허공에서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순간 어떻게 되었는지를 전혀 모르겠고 바닷물이 닿는 순간 온몸이 일자로 수면과 배치기를 하여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명색이 다이빙이지 일종의 추락사고였다고 함이 바른 설명이다.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물속에서 헤엄쳐 물가로 나오니 얼굴에 뜨뜻미지근한 촉감이 있어 손으로 훔치니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매우 위험한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부대원들은 멋진 다이빙 구경을 기대하며 모래사장에 죽 늘어앉아서 바라보다가 나의 우스꽝스런 다이빙에 코피까지 흘리면서 허겁지겁 물에서 기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박장대소하면서 손가락질을 하며 요절복통을 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죽을 쑨 것이다.
창피한 정도가 아니다. 괜스레 미리 자랑을 한 것을 후회해 봤자 이미 배는 떠나간 뒤다. 이렇게 실패한 나는 잠시 진정하고 다시 헤엄쳐 건너가 다이빙 틀의 특성을 가늠하면서 다시 한번 시도했다. 나름대로 괜찮게 뛰어내린 것 같았다. 그러나 동료들과 고참들은 먼저 것만 생각하여 재미있다고 할 뿐 야속하게도 나중 좀 잘 된 것에 대해서는 칭찬은커녕 일언반구 말도 없었던 일도 생각이 난다.(계속)
댓글목록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http://www.gayo114.com/p.asp?c=7697794557 만리포 사랑{'박 경원'님 노래, 1950년대 중반 기 경}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 여유 마저도 없이, 궁핍하기 그지없던 시절! ,,. 만화, 영화! 머나 먼 저편 꿈 나라 천국같은 파라다이스, 이상향, 환상의 세계로 몰입케 했었죠.
타잔 이라는 만화는 정말 인기! ,,. 일본 번안 만화인 걸로 압니다. ,,.
박 기당 : 고양이전, 최 상권 : 만리 장성, 신 동헌 : 학생 깡패를 소재로 한 만화, 신 동우 : 홍길동전, 김 경언 : 3국지를 본 날 밤의 꿈, 김 성환 : 꺼꾸리군 장다리군, 그리고 3국지 연재 만화를 그린 분!@ 이름이 머리에서 가물 가물 도는데 미국에서 생활하시는 분이신,,. 아 코주부 김 용환! ,,. 당시 새벗' 이라는 월간지;가 아마 최고 인기였을 겁니;다. 전 거기서 지금도 다 읽지 못한 작가 미상인 연재 소설 : 잃어버린 구슬 - - - 부사 역 앞에 모자를 쓴 웬 소년이 ,,. 전 이적 지ㅏ지도 그 이야기 줄거리가 어떻게 이어진건지 궁금합니다. ,,.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만화가들 가온 데;
한 성철 : 노틀담의 꼽추{총천연색으로 된} 정말 놀라울 따름! ,,.
추 동성 {고 우영} : 짱구 박사. 약 5년 전 경 작고하셨죠. ,,.
+++
'신 동우' 만화가는 제가 알기론 1950.6.25 발발 시 육균총장 '채 병덕'소장의 전속 부관이었던 걸로 압니다만,,. Atom '손 오공', '날쌘돌이' 등 만화를 아주 잘 그렷죠. 가장 멋잇는 솜씨! ,,.
그리고, '김 성환'은 전 빨갱이로 보지 않을 수 없읍니다. 아마도 이 인간처럼 불공정한 대책없는 4칸짜리 만화 비평을 하여 국민들을 오도케한 人은 없을 겁니다. 그토록 자유당 정권을 대책없이 철퇴를 휘둘러 까댔었고, '박'통을 비하했었으며, 정작 '금 뒈쥬ㅣㅇ'롬이 집권하자 슬그머니 붓을 던지고는 ,,.
그리고 무슨 이유로 동아일보에서 1언반구도없이 조선일봉로 옮겼다가, 얼마 뒤 문화일보로 이동, 슬그머니 그만 두느냐,,. 만화 그리지 않는 게 '금 뒈쥬ㅣㅇ'롬을 도와주는 거니깐! ,,. 비평을 하지 않게되면 도움을 주는 거죠. ,,. 쥑여야 됩니다, ㅣ금이라도 조사해서요! 이런 붉은 간첩(같은) 놈들,,.
+++++++++++++++++++++++
서울【동마중학교 名退 敎監 先生님!】 ^*^ 카투사에서도 근무하셨었군요.
강원도楊口 보병제2사단 副官 參謀部【士兵係 兵力 充員班】에서도 복무하셨고요. ,,. 당시는 병들도 전방.후방 상호 교체가 있었죠. 부사관.장교들처럼요. 그러다가 아마 제 기억으론 1966년도 경(?)부터 병들은 아예 전후방 교체 제도가 없어지거,,. 병역 복무 비리때문으로 압니다. 빽있으면 後方가고, 빽없으면 前方으로 가게되고,,.
지금이야 부사관들은 군단내의 사단끼리만에 한해서 부대 교체가 있고,,.
장교들이야 부득이하니까 지금도 전후방 교체가 있지만. ,,. 장교들도 후방에 있다가 전방으로 가게되면 긴장을 하지요. ,,. 전 후방 근무를 못해봐서 잘은 모르지만,,. 후방이라야 장교 교육 기관인 학교부대에서만 있었던지라 오히려 고생만 죽도록,,.
재미있는 그림같은 해수욕 바닷가 묘사! ,,. Excellent, vice middle school master, Sir! Over! ^*^ ///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http://www.gayo114.com/p.asp?c=7697794557
제목: 만리포 사랑 / 가수: 박경원
앨범: (1985) 가요백년사 Vol.19 / 가사: kbg1948님제공
1.
똑딱선 기적 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사랑
그립고 안타까운 울던 밤아 안녕히. 희망의 꽃구름도 둥실둥실 춤춘다
2.
점찍은 작은 섬을 굽이굽이 돌아서 구십리 뱃길 위에 은비늘이 곱구나
그대와 마주앉아 불러보는 샹송. 노젓는 뱃사공도 벙실벙실 웃는다
3.
수박빛 선 그라스 박쥐 양산 그늘에 초록빛 비단 물결 은모래를 만지네
청춘의 젊은 꿈이 해안선을 달리면, 산호빛 너울 속에 천리포도 곱구나
- - - - - 작사 : 반야월 / 작곡 : 김교성 - - - - -
김찬수님의 댓글
김찬수 작성일inf247661님 두번째 님의 댓글 중간 하단. 서울 동"아"중학교가 아니고 서울 동"마" 중학교 이구요. 직책에 "교감"이라 학교명 뒤에 바로 쓰셨는데 저는 "명퇴교감"이라 하는 긴 호칭입니다. 즉 명퇴교감이란 명예퇴직하는 원로교사에게 붙혀주는 직위입니다. 자칫하다가는 직위사칭이 되니 복잡하시드라도 올바른 표기를 해 주셔야 합니다. 또 한가지 보병 2사단 부관참모부 "사병과 병력충원계"라 하셨는데 정확한 명칭은"사병계 병력 충원반" 이 되겠습니다. 귀찮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정정해 주시겠지요? 매사가 명확한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입니다. 감사합니다.
正道님의 댓글
正道
김찬수님. 미친"개"정일 고기굽는 냄새가 여기까지 풍겨오네요,,,,,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저도 어릴 때부터 개울가에서 자라서 수영은 어느정도 합니다
다만 배가 고파서 못할 뿐이지요
하학하고 나면 남는 게 시간 밖엔 없을 때니.....
여름만 되며 매일같이 강가에서 남의 집 감자서리로, 고기잡는 뜰채로,
그 당시에느 고기가 왜 그리도 많았었는지...
세월을 보냈던 게 접니다.
그 논이 제 친구네 논이어서 마음놓고 캐다가 감자서리를 해 먹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물론, 매년 봄이되면 갸네 집 감자 심는 걸 도와 주고
여름에는 제가 심어놓은 감자를 캐 먹는 걸로
세월을 보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아, 예! 이거 제가 자세히 보질 않고서 ,,. 제 눈이 'ㅁ' 과 'ㅇ' 과를 잘 구분치 못한 탓이오며, 또 전 그저 단순히 '교감 선생님'이라고 표현하기 편리(?)해서 드렸던 것이었었을 뿐! /// ^*^
그리고 사단 참모處(처){참모部(부)} 예하 기구가 課(과)장 - - - 係(계)장 으로 이어지므로 단순히 표현했던 겁니다만,,.
무조건 修正(수정)하겠읍니다요! 역시 數學科 출신이시어선지 치밀하시군요! 빨개이들은, 요즘 그러지 않아도 些小(사소)한 걸 가지고 '침소 봉대'하여 트집을 잡으면서 말꼬리를 걸고 넘어지는 빨갱이들이 많아서 피곤한 세상이 되었읍니다요!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드려서 송구스럽읍니다. 명퇴 교감선생님을 편의상, 그냥 저는 '교감' 선생님이라고 부른 걸 허용해 주십시요. 어쨋던 '敎監'이신니깐요! ^*^
'김 찬수' 교감님! 내일 '지'박사님 재판에 시간 내셔서 방청하시거나 잠시 짬을 내셔서 만나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럼 수정하겠읍니다.【동마 중학교 명퇴 교감선생님】및【사병계 병력 충원반】으로 수정하겠읍니다. 자기가 근무햇었던 부대에 대한 애착심 및 긍지심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자랑스럽게 말씀하실 수 없으시었겠죠! 존경합니다! 진심으로요! 좋은 저녁되십시요. 그럼,,. 여불비례, 총총
김찬수님의 댓글
김찬수 작성일inf247661님 감사합니다. 반갑게 만나뵙고 지만원 박사님과 서석구 변호사님의 정의가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두분의 승리가 곧 자유민주주의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승리이고 이국지사 곧 우리보수 모두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