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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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2-12 08:14 조회1,790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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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친구 김승엽의 피난 이야기
승엽이는 함경남도 흥남시에서 피난을 내려왔다. 거제도 연초 초등학교에서 같은 반이었었고 후일 육지 부산에 나와 그는 덕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우연하게도 62년도에 논산훈련소에 나와 같이 입대를 하여 훈련소 한 내무반에서 지냈다. 승엽이네 가족의 6ㆍ25 경험과 피난 내려올 때까지의 사연은 애달프고 또 슬펐다. 나와 동갑인 그도 인민학교 3학년 때 전쟁이 났다. 6ㆍ25 동란 6개월 전부터 흥남 유정리 마을에서는 인민군 신병 훈련이 하루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고 한다.
6ㆍ25가 난 직후 함경도 일대의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38선에서 국방군과 여기저기서 작은 전투가 벌어져 서로 밀고 밀리는 가벼운 전투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계획된 불법 남침이 아니고 북침이 먼저라는 느낌을 심어 주었다고 하였다. 승철이 친구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라나다 폭격기
38 접경지역 말고는 이북 전역의 학생들이 그렇게 알았다고 했다. 지금은 역사적으로 누가 불법으로 사전 전투 계획을 하여 남침했는지 세계만방에 다 증명된 사실이지만 그때는 그러했다. 그런 가운데 참다못한 인민군이 강하게 내리 밀어 남쪽으로 남쪽으로 진격해 갔다고 설명하였다고 했다.
전쟁이 우연하게 일어난 것처럼 이북 주민과 어린이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그들의 불법남침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북의 어린 소년들에게 남쪽이 나빴다는 핑계를 대어 제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 씌워가면서 거짓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지금도 이북의 빨치산 교육은 제 잘못을 무조건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억지 전술을 구사한다.
내가 있던 38선 바로 이북에서의 생생한 경험 상황과는 아주 다르게 들은 6ㆍ25 발발상황을 꾸며서 설명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거짓말은 곧 들통이 나기 마련이다. 요즈음은 6․25가 북침이다, 라는 말이 쑥 들어갔지만, 한동안 정치 운동권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려고 이북 예찬을 하면서, 실상은 그들이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6․25가 북침이라고 청소년들에게 거짓 교육 행위로 일선학교 안으로부터 다가간 사례가 아주 많았던 시절도 있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후르시초프의 회고록에서, 6․25는 김일성이 계획하고, 소련의 스탈린이 승인, 그리고 중국 모택동의 군사지원 밀약으로 북이 도발한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된 뒤에도 그랬다 하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더욱이 1996년 7월 중국에서는 종래의 대한민국의 북침 설을 수록한 교과서를 모두 개정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이 모택동의 지원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기습 남침하였다는 사실을 수록한 것이 세계인에게 이미 다 알려졌다.
이어 얼마 있다가 방학이 되었고 8월 중순이 넘어 학교에서 말하길, 얼굴이 시커멓고 무섭게 생긴 괴물 같은 사람들이 진격해 올라오는 바람에 인민군이 후퇴를 한다 하였다. 이러기를 여러 날을 지나니 갑자기 흥남에 수도 셀 수 없는 B-29 비행기가 새카맣게 떠서 도시 전체를 융단 폭격하는데 시민들이 모두 방공호에 숨어 숨을 죽이면서 가슴 졸였다고 한다.
당시 원산항도 며칠씩이나 그러하였다. 승엽이는 호기심이 나서 마을 뒷산 방공호에서 나와 하늘을 덮은 비행기들을 구경하였다고 하였다. 비행기에서 흥남시를 향해 폭탄을 물 붓듯이 떨어뜨리는데 시가지 전체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때 흥남시 여러 곳의 주요 공장들이 모두 다 폭파되었고 시가지는 불바다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나에게 말해준 원산이 폭격 받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낙동강에서 인민군이 패퇴하고 후퇴한 뒤 국군이 원산을 거쳐 흥남 함흥으로 진격하였고 이때 유엔군들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그들의 물자 제공과 베푸는 여유를 보고 이북 주민들은 비로소 김일성에게 속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승엽이네는 흥남에서 부유하게 살았었는데 김일성 통치하에서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배급받는 최저의 생활을 하였다 한다. 그는 국군이 진격했을 때 함흥의 외갓집에 가 있었다고 한다. 외갓집에서 집으로 올 때 청천강 변 여기저기를 보니 강변마다 죽은 시체가 나뒹굴었고 보기에도 끔찍하였다고 했다.
공산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다 북으로 피신을 하였고 승엽이네 집은 폭격 당해 없어졌기에 인근 유정리에 집을 비우고 도망간 공산당 간부 가족들이 들어 살던 일본인 연립주택 같은 빈 집에서 넉 달 가까이 거제도로 내려오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10월 중순에 국군이 진격해 들어오고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까지 한 번도 배워 보지 못한 한자공부를 처음 하였다고 한다.
이북 주민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8.15 해방이 되고 나서 김일성은 이북 전역에서 한문 교육을 일시에 철폐시켰다. 주체성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국군이 들어와 한자교육 받는 것도 잠시이고 새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중공군이 개입하여 인민군대와 같이 또 진격해 내려온다는 것이다. 마을 민심은 흉흉하였고 미처 피난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공산당원 가족들이 다시 설치는 바람에 아주 불안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 하에서 학교공부를 한 지 한 달여 흥남 함흥등 이북 주민들은 대한민국이 잘산다는 확실한 소문을 듣고 또 확인도 했기에 서둘러 가며 피난 보따리를 싸기 시작한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11월 초부터 이북 전역과 특히 항구도시인 흥남지역은 모진 바람이 북쪽으로부터 내려오고 벌써부터 눈이 오기 시작했다.
해방을 맞아 자유를 찾았다고 기뻐했던 각처의 이북의 주민들은 북으로부터 인해전술로 내려 미는 중공군의 공격을 알고 12월 10일이 조금 지나서부터 흥남부두로 꾸역꾸역 밀려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유정리 뒷산에서 보니 12월 13일인가부터 잠자리비행기(헬리콥터)들이 연달아 하늘을 날고 산기슭을 향하여 기총사격이 뻔질나게 일어났다고 한다.
그때 승엽이는 헬리콥터 비행기를 처음 보았다고 했다. 피난민들이 평양 쪽에서도 오고 함경북도 쪽에서도 내려와 눈보라 치는 흥남부두는 배를 타려는 피난민 행렬에 발 디딜 틈도 없었다고 하였다. 승엽이네는 흥남부두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를 않아 그 사이에 승엽이 아버지와 형이 피난을 떠나느냐 마느냐 정세 돌아가는 것만 살피고 좀 여유를 가졌는데 중공군이 개입하고 여기저기서 벌써부터 야간 포격이 심해지는 것을 보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짐을 챙겼다고 한다.
어느 날 대대적인 공산군 집중 사격이 있어 이에 놀라 외갓집에 보따리 찾으러 갖다가 오지를 않은 누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12월 23일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흥남부두가 인산인해였는데 승철이 가족은 개신교 교회 일행이 죽 늘어선 줄에 끼어 배를 타게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누나를 기다렸다가 같이 가야 된다고 했고 아버지는 외갓집에 있으니 오히려 안심되니 한 달여 동안만 잠시 배타고 나갔다가 오자고 하는 바람에 배를 탄 것이 누나와 영영 이별이 되었다고 한다. 마침 흥남부두에서 다른 곳에서 사는 삼촌 가족도 만나 같이 배를 탔다.
사흘 동안 배에서 생활을 했는데 그 배는 일본 상선이었고 만여 명을 태울 정도의 아주 큰 배라고 하였다.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같이 타고 오는 개신교회 신자들이 오늘이 크리스마스라고 하면서 배 안에서 그들끼리 모여 우리 국군이 중공군을 물리치고 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더라는 것이다.
부산항에 도착한 배는 부산에 피난민이 너무 많아 올라갈 틈도 없다면서 호주로 가야 된다고 떠났는데, 부산도 모르는 승엽이가 호주는 또 어디냐고 의아해 했다고 한다. 다행히 배는 호주로 가지를 않고 거제도 장승포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LST 군용 수송선이 상선에 타고 있던 피난민을 여러 차례 조심스레 부두로 날라 피난민 모두는 심신이 지친 몸으로 걸어서 우리가 나중에 만난 연초 면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많은 세월이 지난 그 이후 우리나라에서 세계 올림픽이 열리던 88년도 그 해에 삼촌이 미국 살다가 미국시민 자격으로 함흥엘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까지 누나는 외갓집에서 자랐었고 6․25때 가족이 남쪽으로 피난 간 사실을 숨기고 전쟁 통에 흥남에서 폭격으로 부모 형제 모두 잃었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 외갓집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88년도 당시도 가난으로 인한 승엽이 누나의 비참함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결혼을 하였는데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 하나를 두었다는 소식도 들었다고 하였다. 삼촌을 만날 때 누나는 허름한 복색이었는데 그것조차도 남의 옷을 빌려 입고 왔다고 하였다. 승엽이 3형제가 누나를 그리는 애처로움과 이북에 두고 온 딸을 두고두고 그리다가 세상을 떠난 부모님의 한이 어떠하였겠는가. 전쟁의 비참했음은 세월이 지나도 나라 도처에서 이렇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계속)
댓글목록
기린아님의 댓글
기린아 작성일
'전쟁은 겪어보지 못한 자에게는 유쾌한 일이다.'
라는 히틀러의 명언이 생각납니다.
전쟁이 참 무서운 거라는 걸 실감합니다.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이곳 춘천 중앙 도서관{평생 교육 정보관}에 ㄴ이 챋이 비치된 걸 읽! ,,. 삼천리 시립 도서관에 지난 보름 전 경 또 비치 요창, 신청 완료! ,,. 모두가 열람 책! /// 여불비례,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