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대한이여, 그 날의 우리를 잊지 말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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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공포로 작성일10-12-07 17:54 조회1,799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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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청취자 여러분. ‘북조선이 궁금하다’의 진행을 맡은 오주한입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북조선 동포 여러분들도 궁금해 하시는 북조선 이야기 중 하나인 구월산 빨치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구월산은 황해남도 은율군과 안악군 경계에 있는 산입니다. 해발 954미터의 이 산의 본래 이름은 궁홀산이었습니다. 머나먼 신화의 시대 당시 단군이 수도를 옮긴 후 은퇴한 아사달산이 구월산이라는 전설도 있습니다.
구월산은 무성한 삼림과 계곡을 흐르는 물이 한데 모여 절경을 이루는 용연폭포 및 구월산성의 옛 터 등으로 인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명산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평화롭고 아름다운 구월산은 과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였습니다. 바로 구월산 빨치산, 즉 구월산 유격대입니다.
북조선 동포 여러분들은 전쟁 기간 지리산에서 활동했던 빨치산은 아실 것입니다. 남조선도 마찬가지로 지리산 빨치산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명까지 대한민국의 북진 통일을 꿈꾸며 장렬히 싸웠던 구월산 빨치산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조선 독재정권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함께 해방의 기쁨을 나누었던 한민족이 서로 적이 되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황해도 지방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북조선에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인민들이 많았습니다. 김일성의 폭정이 시작되면서 2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남녘으로 피난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인민들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남조선 국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빨치산을 조직해 독재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중국이 참전해 국군이 평양을 버리고 후퇴하기 시작하자 황해도 지역의 빨치산들은 미처 몸을 추스를 틈도 없이 중공군에게 포위되고 말았으며, 이들은 구월산 등 산악지역과 섬 지역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황해도는 일제시대 당시 일본의 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폭탄을 던진 안중근 의사, 일제시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석을 지낸 김구 선생,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선생 등 자유민주주의적 애국자들이 많이 태어난 곳입니다. 이러한 환경의 영향을 받았는지 구월산 빨치산들은 국군이 다시 북진해 통일할 날을 꿈꾸며 근 5년 동안 치열한 유격전을 펼쳤습니다.
당시 북조선 독재정권은 인민군 제26여단을 투입해 이 지역을 점령하려 했으나 예상 외로 막대한 피해를 입자 두 개 여단을 추가로 투입했으며, 남북 간의 전선이 38도선에서 고착되자 1951년 4월 제17사단과 중공군 일부를 다시 투입했습니다.
최초의 구월산 빨치산 부대는 병력 750여명이었습니다. 구월산 빨치산 부대의 창설 당시 부대명은 ‘연풍유격대’였습니다. 이들은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중공군 후방 교란 등을 훌륭히 수행해내었으며, 각종 자료를 종합하면 중공군 사살 984명, 포로 296명, 무기노획 소총 333정 등의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피해도 적지 않아 357명이 작전 과정에서 전사했습니다.
구월산에 남성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약 30명의 여성 빨치산들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강원도 원산 출신으로 1949년 해주로 시집을 갔다가 전쟁 직전 남편과 사별한 이정숙 대장이 이끈 여성 빨치산들은 혁혁한 공로를 세웠습니다.
이정숙 대장은 구월산에 입산한 후 30여 명의 여성 대원들을 훈련시켜 대원으로 활용했으며, 이후 재령부대 구출작전 등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남성 대원들을 독려해 많은 전공을 세움으로서 훗날 정일권 남조선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특별표창을 받았습니다.
고립된 상태에서 길고 처참했던 유격전을 벌인 끝에 구사일생으로 남조선으로의 후퇴에 성공한 구월산 빨치산 생존자들은 그러나 국가유공자 대상자에서 제외되는 등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시대상황이 혼란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구월산 빨치산은 정규군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월산 빨치산 용사들은 그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었기에 자유대한을 지켜냈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보상 논의도 꾸준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생존한 구월산 빨치산 용사 200여 명은 노무현 정권 시절이던 지난 2004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국가유공자 인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들은 북조선 독재정권이 남파한 간첩을 민주화운동인사로 규정하는 노무현 정권의 행태를 규탄하는 등 오늘 날에도 여전히 자유대한을 수호하기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오늘은 북조선의 구월산 빨치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 보다 알찬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자유북한방송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북조선 동포 여러분들도 궁금해 하시는 북조선 이야기 중 하나인 구월산 빨치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구월산은 황해남도 은율군과 안악군 경계에 있는 산입니다. 해발 954미터의 이 산의 본래 이름은 궁홀산이었습니다. 머나먼 신화의 시대 당시 단군이 수도를 옮긴 후 은퇴한 아사달산이 구월산이라는 전설도 있습니다.
구월산은 무성한 삼림과 계곡을 흐르는 물이 한데 모여 절경을 이루는 용연폭포 및 구월산성의 옛 터 등으로 인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명산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평화롭고 아름다운 구월산은 과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였습니다. 바로 구월산 빨치산, 즉 구월산 유격대입니다.
북조선 동포 여러분들은 전쟁 기간 지리산에서 활동했던 빨치산은 아실 것입니다. 남조선도 마찬가지로 지리산 빨치산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명까지 대한민국의 북진 통일을 꿈꾸며 장렬히 싸웠던 구월산 빨치산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조선 독재정권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함께 해방의 기쁨을 나누었던 한민족이 서로 적이 되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황해도 지방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북조선에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인민들이 많았습니다. 김일성의 폭정이 시작되면서 2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남녘으로 피난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인민들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남조선 국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빨치산을 조직해 독재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중국이 참전해 국군이 평양을 버리고 후퇴하기 시작하자 황해도 지역의 빨치산들은 미처 몸을 추스를 틈도 없이 중공군에게 포위되고 말았으며, 이들은 구월산 등 산악지역과 섬 지역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황해도는 일제시대 당시 일본의 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폭탄을 던진 안중근 의사, 일제시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석을 지낸 김구 선생,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선생 등 자유민주주의적 애국자들이 많이 태어난 곳입니다. 이러한 환경의 영향을 받았는지 구월산 빨치산들은 국군이 다시 북진해 통일할 날을 꿈꾸며 근 5년 동안 치열한 유격전을 펼쳤습니다.
당시 북조선 독재정권은 인민군 제26여단을 투입해 이 지역을 점령하려 했으나 예상 외로 막대한 피해를 입자 두 개 여단을 추가로 투입했으며, 남북 간의 전선이 38도선에서 고착되자 1951년 4월 제17사단과 중공군 일부를 다시 투입했습니다.
최초의 구월산 빨치산 부대는 병력 750여명이었습니다. 구월산 빨치산 부대의 창설 당시 부대명은 ‘연풍유격대’였습니다. 이들은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중공군 후방 교란 등을 훌륭히 수행해내었으며, 각종 자료를 종합하면 중공군 사살 984명, 포로 296명, 무기노획 소총 333정 등의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피해도 적지 않아 357명이 작전 과정에서 전사했습니다.
구월산에 남성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약 30명의 여성 빨치산들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강원도 원산 출신으로 1949년 해주로 시집을 갔다가 전쟁 직전 남편과 사별한 이정숙 대장이 이끈 여성 빨치산들은 혁혁한 공로를 세웠습니다.
이정숙 대장은 구월산에 입산한 후 30여 명의 여성 대원들을 훈련시켜 대원으로 활용했으며, 이후 재령부대 구출작전 등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남성 대원들을 독려해 많은 전공을 세움으로서 훗날 정일권 남조선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특별표창을 받았습니다.
고립된 상태에서 길고 처참했던 유격전을 벌인 끝에 구사일생으로 남조선으로의 후퇴에 성공한 구월산 빨치산 생존자들은 그러나 국가유공자 대상자에서 제외되는 등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시대상황이 혼란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구월산 빨치산은 정규군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월산 빨치산 용사들은 그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었기에 자유대한을 지켜냈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보상 논의도 꾸준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생존한 구월산 빨치산 용사 200여 명은 노무현 정권 시절이던 지난 2004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국가유공자 인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들은 북조선 독재정권이 남파한 간첩을 민주화운동인사로 규정하는 노무현 정권의 행태를 규탄하는 등 오늘 날에도 여전히 자유대한을 수호하기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오늘은 북조선의 구월산 빨치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 보다 알찬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자유북한방송
댓글목록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
반공 포로 석방! 1953년 7월 12일 ,,. 육해공군 해병대 헌병 총사령관 '원 용덕' 중장님의 극비 작전! ///
이 때의 秘話(비화)를 상세히 적은 '大 釋放(대 석방)'이라는 책자를 당시 헌병 총사령부 작전참모인 '중령'이 지은 책을 열람한 바 있읍니다. 그 분은 훗날 제2사단장을 지내셨더군요. ,,. 육사 # 2기생? 성명이 갑자기 가물 가물 떠오르지 않,,. 제가 그 책자를 지니고 있다가 춘천 베트남 참전 전우회에 기증했었는데 사무실을 보훈회관으로 이전하면서 불온한 해병대 하사 출신 회장(롬)이 망실(?) ,,. ,,, ,,, ,,.
수상하고도 대가리에 똥만 가득찬 것들 적지 않음. 대판 싸운 적도 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