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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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20 16:42 조회1,946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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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아버지의 용단 부산으로 이사 결정
1954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거제도 전역에서 국회의원 선거열풍이 불었다. 선거라는 것을 내 생애 처음 구경했는데 동네 담벼락이나 판잣집 외벽에 뽑히려는 사람들의 얼굴이 든 벽보가 나란히 붙여져 있었다. 차 위엔 확성기가 있어서 아주 커다란 소리로 누구누구를 지지해 달라고 외쳐 밤낮으로 거제도 전체가 요란스러웠다.
아주 젊고 잘 생긴 청년 한 사람이 입후보 했는데 바로 이 사람이 1992년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뽑힌 김영삼 이란 정치가였다. 당시에 야당에서는 정치계에서 알아주는 채모 의원이 또 입후보했었고 김영삼 입후보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라고까지 소문내면서 여당인 자유당으로 입후보했다. 두 사람이 아주 유력하였는데 피난민들에게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라고까지 널리 알려졌기에 이승만 대통령과 저렇게 가까우니 김영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자며 개신교회에서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그렇고 하여 전국에서 몰려든 6․25 피난민의 몰표 행사로 김영삼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당시 제일 젊은 나이로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고 하였다. 한번은 김영삼이 유세 중 우리들이 다니는 중앙교회에 왔는데 어린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자상하게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생각도 난다. 가까이서 보니 참 멋있게 생겼다 생각했다. 서울대학교를 나왔고 당시 장택상이 총리를 하였었는데 그의 비서로 일했다고도 했다. 그의 아버지가 거제도 일대에서는 큰 재력가여서 소문에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 70대나 있고 소유한 배가 200척이나 된다 하였다.
피난민들로서는 입이 딱 벌어지는 아주 부러운 귀공자로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런 그가 당선되고 나서 우리가 부산으로 이사를 나온 몇 달 뒤 그가 양자라고 내세우면서 가깝다고 자랑하던 이승만 대통령을 갑자기 배반하고 당시 야당 입후보자 채모 씨의 민주당인가 뭔가 하는 당으로 옮겨 앉았다. 만나는 어른들 사이에 김영삼이란 사람이 저렇게 젊은데 벌써부터 저러하다니 하며 몹시도 의아해 하는 말들이 자주 오갔다.
1954년 새 봄이 되면서 우리 집은 또 한 번 엄청난 변화가 생겨났다. 할머니가 이 거제도 섬에서 살기 싫다는 말을 하고 고향으로 빨리 되돌아가든지 아직 수복지구여서 어려우면 고향 가까운 육지 부산이라도 나가서 살자는 것이었다. 여기 분위기 때문에 당신의 병이 또 생겨날 것 같다는 말을 아버지 어머니에게 한 것이다. 며칠을 고민한 아버지가 크게 용단을 내렸다.
여기 연초 중학교에는 다른 훌륭한 선생들이 열심이고 원주민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계속 발전할 것이라 하면서 나는 하나뿐인 어머니를 잃고는 도저히 세상을 살 수 없으니 고향 가까운 부산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산을 다녀왔다. 우리 가족이 거주할 곳과 아버지의 직장을 구하러 나갔다 온 것이다. 마음의 결정을 하고 이 문제를 학교 선생님들과 지방 유지와 피난민 연락사무소의 관계 인사들과 통영군과 경상남도 학무과에 알린 것이다.
거의 한 달을 여러 기관에서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학교를 떠나는 뜻을 거두어 달라는 설득을 만류를 하고 학생들이 울면서,
“교장선생님 떠나지 말아주십시오. 저희들이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할 터이니 여기 계셔서 저희들을 지도해 주십시오!”
하며 학교 사택엘 매일같이 드나들면서 아우성들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결정은 단호했다. 할머니 소원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효도를 택한 것이다.
“너희들은 다른 훌륭한 선생들이 계셔서 배울 수 있지만 나는 떠나야 할 사정이 있다”
했다. 이곳에 있으니 또 병이 날 것 같다 하는 할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마음을 굳힌 것이다.
연초중학교 제 1회 졸업기념
아버지의 일기 속에 자세하게 적힌 하청중학교 연초 분교를 세우고 분교장의 직책을 맡아 이끈 사도 실천의 사연은 후일 내가 교육활동에 임하는 생활철학의 뿌리가 되었다. 연초 중학교와 관련된 아버지 일기의 내용 몇 가지이다.
1951년 8월 15일, 연초 중학교 설립 착수(통영군수와 각 관계기관과 토의) (피난민 중학생을 위하여 헌신키로 각오)
12월 15일, 정식개학 개교식 성대(명칭 연초중학교. 교장으로 취임)(교사 4명 채용 3학급)
1월 3일, 신축교사 건축 상량식 거행
1월 13일, 통영중학교 연초분교로 인가 신유년 복잡한 해의 다단함이여, 내 뜻은 끝내 성공하여 학생들은 자란다.
1952년 2월 15일, 문교부차관 본교 시찰
3월 27일, 하청중학교 연초분교로 변경 인가
3월 30일, 국가 보조금 실현(도, 문교부 출장 해결)(3월 8일부터 신 교사에서 수업 실시)
1953년 4월 16일, 학생 책상 의자 제작(20일 완료. 운동장 확장) 5학급 340명 분의 수업시설 완료
햇수로 3년
일마다 괴로운 벌칙이었다.
욕이란 욕 다 먹으면서도
오직 하나의 신념과 인내로써
빈 터전에 학교가 섰고
나 혼자의 힘은 아니었으나
모든 시설을 위하여 얼마나 힘을 썼던고
하면 되고야 마는 것을
피 저린 풍진 속에
오늘에야 시설 완비되어 마냥 기쁘네.
우리 집이 부산으로 이사해 나오기 직전 잊혀지지 않는 사회상이 하나 있었다. 연초중학교에 윤씨 성을 가진 젊은 영어선생님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아주 좋아했고 인기가 많아 여학생 누나들이 졸졸 따라다니다시피 했다. 어느 날, 그 윤선생이 입대를 하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송별연을 여는 둥 난리법석이었다.
학교 앞 행길을 지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올라탄 트럭 한가운데에서 얼큰하게 술에 취한 듯한 벌건 얼굴의 윤선생이 ‘군 입대’라는 굵은 글자가 씌어 있는 어깨띠를 두르고 이마에는 태극기가 새겨진 천을 질끈 동이고 오른손을 세차게 흔들면서 옆 사람들과 함께 군가를 하늘이 떠나가라 목청 높여 힘차게 불러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참으로 영웅적인 모습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을 슬퍼하며 선생님의 무운을 빌었고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하루를 지나고 그 윤선생은 입대를 하였다. 그런데 열흘 정도 지난 어느 날, 그 윤선생이 학교로 슬며시 다시 돌아왔다. 군 입대를 하여 적군을 무찌르려 훈련을 받고 전방으로 가지 않고 되돌아온 것이다. 무슨 사유인지 모두들 궁금해 했다. 그리고 얼마간 학교에 다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렇게 따르던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아침 등교시간 정문에서부터 인사조차 하지를 않고 외면하는 것이었다. 이런 쌀쌀한 분위기가 점점 학교 전체로 번져가자 이를 눈치 챈 윤 선생은 얼마간 더 있다가 소문도 없이 연초중학교 교사근무를 그만두었다. 나중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군대를 갈 수 있는데도 무슨 이상한 수를 써서 군 입대를 면하였다고 했다. 학생들이 이 사실을 알고 매섭게 싹 돌아섰던 것이다. 6․25 이후 휴전되기 전 이때의 사회 상황은 어디를 가든지 대체적으로 이러했다.(계속)
댓글목록
피안님의 댓글
피안 작성일
안녕하세요 김찬수선생님.
6.25 당시 거제도는 소박한 어촌이였을텐데 지금은 몰라보게 변했겠지요
군입대를 기피한 그때의 윤선생님은 평생 죄의식에 맘이 편치 못했을겁니다.
김찬수님의 댓글
김찬수 작성일
피안님 안녕하십니까? 정말 거제도는 님의 말씀대로 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민심이 아주 후하고 순박했다고 생각됩니다. 원주민(또는 토백이- 당시 피난민들의 호칭)들은 평화 그 자체였었고 피난민들은 각박 함 그 자체였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들어 제가 가끔 여행하는 거제도 이지만 거제도는 고통속의 저를 끌어 안아준 평화로운 이상향이라 여겨집니다.
영어담당 윤선생! 이런분 같은 이들이 이젠 보편적으로 대통령과 국회의원 그리고 장관들.... 사회지도금 저명인사 행세를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리고 그것이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성실한 국민앞에서 모범이라 억지를 부리는 듯 하니! 국도방위 안보의식은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요령없이 순박한 너희들은 희생이나 하고 죽던지 살던지.... 나는 수단방법 안가리고 출세만 하겠다.... 이런의식이 지배하는 국가사회 풍토인지....이런것이 진보라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