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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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14 04:57 조회1,9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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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아버지의 가정교육
나는 태어나 14개월 만에 연년생인 남동생이 태어나는 바람에 할머니 차지가 되어 그때부터 할머니 앞에서 응석만 부리고 위함만 받았다. 12살 때 부모님과 거제도에서 상봉한 뒤에 비로소 어른들이 할머니를 어떻게 모시는지, 즉 어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매일 보고 배우게 되었다. 함께 모여 사는 가정의 분위기를 체험한 것이다.
아버지는 할머니 앞에서 당신이 어른인데도 나와 같은 어린 모습으로 뵈었다. 매일 아침 코앞에 닿을 만한 거리의 교무실로 출근할 때에도 반드시 “어머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저녁때에도 돌아올 때는 “어머님 잘 다녀왔습니다.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으셨습니까?” 하였다. 할머니가 아니 된다 하면 될 만한 일도 당장 그만두었다. 아주 철저했다.
나도 지금까지 집 앞 문방구에 잠시 나갔다 올 때에도 아버지 생전에 할머니를 대하던 모습으로 어머니께 인사를 드린다. 아내가 처음엔 너무 그렇게 하니까 좀 가끔 인사드리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더니만 이제는 온 가족이 습관이 되어 어른께 인사드리지 않으면 오히려 어색하다. 이것이 아버지가 남긴 우리 가정의 전통이다.
피난민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학교의 학생 수도 늘어났다. 연초 중학교도 교사(校舍)가 모자라서 사택 뒤로 신축을 했다. 황토 진흙을 운동장에 산같이 쌓아놓고 볏짚을 작두로 ‘쑹덩 쑹덩’ 썰어 황토 흙과 섞어서 흙벽돌을 만들었다. 교장인 아버지가 바지를 걷어붙이고 온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물을 뿌리며 밟은 황토 흙을 되게 뭉쳐서 늘어진 새-끼줄에 안팎으로 붙이면서 교실 벽을 세웠다. 이렇게 학교 건물을 만들었다.
나도 일요일이면 아버지와 같이 나가 미끈덕거리는 황토 진흙에 섞인 볏짚을 맨발로 많이도 밟았는데 발바닥이 물에 풀리는 짚과 황토 진흙에 닿아 간질간질하던 기억이 난다. 교사를 다 지은 뒤 방과 후면 교사 안에서 아버지와 탁구를 치곤 했는데 이때의 연습 덕분인지 나이가 많이 든 뒤에도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교사 탁구대회를 개최하면 가끔 우승을 한 적이 있다.
교사(校舍)가 부족하기는 내가 다니던 연초 국민학교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피난민의 증가로 인해 학생 수는 늘어나고 교실은 모자라서 본관 동쪽 빈터에 임시 교실로 텐트를 높다랗게 치고 그 안에서 공부를 했다. 땅바닥에 각자의 깔개를 준비하고 엎드려 필기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비만 오면 낭패였다. 밖으로 흐르는 물이 텐트 안으로 조금씩 새어 들어와 빗물이 고이는데 몽당연필로 땅을 파고, 실오라기처럼 물이 흘러나가도록 작은 도랑(?)을 내어 옆 아이를 놀래어 주려고 친구와 엎드려 장난을 치며 킥킥대던 생각도 난다.
46. 절약정신
그때엔 모든 물자가 부족했었다. 몽당연필도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될 때까지 가느다란 대나무를 연필 길이만큼 자른 뒤 대나무 구멍에 끼워 나머지 몽당연필을 사용했다. 모두 원조물자였다. 공책도 미군부대에서 쓰레기 처리장에다가 버린 종이들을 다시 정리하여 골라 가져와 가게에서 파는 것을 사용했다. 한쪽 면은 인쇄된 면이고 다른 빈 면만을 사용했다. 종이의 질은 아주 좋았다. 그 공책에 글씨가 깨알같이 빼곡하게 씌어져 있어야 아주 잘 사용했다고 칭찬을 받았고, 좀 듬성듬성하게 칸을 많이 남기고 다음 면으로 넘어가면 어른들께 물건 아낄 줄 모른다고 크게 지적을 받았다. 모든 공책은 철끈으로 꿰매서 사용하였다.
저녁에 숙제를 할 때에도 호야 등불을 사용했다. 석유등인데 석유 심지를 얇은 유리 호롱으로 가려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마을 이웃에서 자칫 잘못하여 호야 등이 엎어져 화재가 나서 한 밤중에 집을 태우는 사례가 너무도 많았다. 주먹이 작은 우리들이 유리로 된 갓을 맑게 닦아야 되는데 깨지기가 일쑤여서 어른들께 꾸중도 가끔 들었다. 얼마 뒤 나는 호야를 깨끗이 닦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가 되었다. 피난민 학교
요즈음 들은 이야기이다. 누가 아들에게 6ㆍ25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배가 고파 혼났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 참 딱하기도 하셨네요. 잠깐 구멍가게에 가서 라면을 사다가 물을 끓인 뒤 얼른 라면을 넣어 3분만 있으면 해결되는데 그때 사람들은 이상하네요?”
하더란 것이다. 일부러 꾸며낸 말인지는 모르지만 물건이 지금처럼 흔한 줄 알고 그때 어른들은 게으르다는 투의 이야기이다. 6ㆍ25가 무엇인지 가난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시대가 이렇게 모든 것을 바보로 만들어 덮어 두려나? 우스갯소리로 그냥 넘어갈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우리 동네는 연초중학교 옆인데 내 또래의 아이들이 많이 살았다. 4살쯤 더 먹은 농아 형도 살았는데 그 형이 우리들의 대장이었다. 그 형은 성격이 아주 서글서글하고 용감하여 우리 모두가 좋아했다. 친구들이 모여 그 형을 빙 둘러싸고 그 형처럼 떠들어대며 수화도 곧 잘하며 의사소통을 하였다. 집집마다 기르는 개들을 데리고 연사 앞 논둑길을 신나게 달리면서 뛰어다녔다. 잠시이지만 이때가 너무도 신나는 때였다.
같이 모여서 노는 것 이외에 아주 아슬아슬한 일도 있었다.고현 미군부대에서 쓰레기를 싣고 MP 다리 쪽으로부터 오는 트럭을 멀리서 보면 대장 형은 연초중학교 운동장 뚝 위에 대기하다가 트럭이 아래로 지나갈 때 서부활극에서 카우보이가 달리는 말 위에 올라타듯이 트럭 뒤로 재빠르게 타고 올랐다.
쓰레기 중 형의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조건 차 밖 뒤쪽으로 내던졌고 키가 작은 우리들은 우르르 몰려나가 길바닥에 내던져진 물건들을 집어와 한쪽 구석에 모아 놓았다. 요새로 말하면 대형 마트 같은 곳에 지천으로 있는 포장용 종이박스 같은 것들과 미군부대에서 쓰다 버리는 잡동사니 쓰레기들인 것이다.
어른들이 시킨 일은 아니었으나 그 당시 아이들은 그렇게 영악(?)하였다. 아주 좋은 물건도 있고 잡지책도 있었다. 연초 초등학교 쪽으로 차가 멀리 가면 그때서야 형이 내려와 모아둔 물건들을 나누어주었는데 우리는 형이 주는 대로 배급(?)을 받아 집으로 가져갔다.
한번은 내가 종이 박스 하나를 배당받았는데 그날 저녁 아버지가 그 물건을 낮에 떨어진 곳에 직접 가져다 놓고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아이들처럼 따라 하지 말라고 엄히 타일러 주었다. 그 이후엔 나는 형들과 같이 놀다가도 “쓰레기차가 온다!”라고 누가 고함을 치면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하였다.
한번은 참다못한 미군들이 차를 세우고 내려와 친구들을 모두 오라고 해서 다 모이게 하고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하면서 한참 손짓을 하더니만 우리 친구들을 한길 옆에서 한참 동안 손을 들고 벌을 받게 한 적도 있었다.
우리 집에 무시무시한 일도 생겼다. 어느 날 밤, 온 식구가 곤히 자는데 도둑이 들어와서 없는 살림에 옷가지 몇 개밖에 없는 것을 몽땅 집어 갔다. 모두들 말도 못하고 놀란 가슴을 쉬쉬하면서 진정한 일도 있었다.
거제도에는 옥씨 성을 쓰는 주민들이 아주 많았다.
5학년 우리 담임선생님도 옥근석 선생님이고 월남 교사인 아버지에게 대한민국 첫 부임지로 많은 도움을 준 오비 초등학교 교장 선생 이름도 옥치상씨이다. 거제도는 옥씨 집성 지역인 것 같았다. 들은 말에 의하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한 뒤 왕씨 왕족이 모두 거제도로 피난을 가서 그곳에서 정착해 살았는데 그때 임금 왕자 오른 쪽 아래에 점 하나를 찍어 구슬 옥자를 성씨로 하여 행세하며 은둔하여 산 곳이라고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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