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돈주고 뺨맞는 남한목사와 구원 얻은 서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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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전원 작성일10-11-13 00:18 조회2,07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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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달러를 주면서 누구의 자유를 샀는가?
평양을 오가는 이들에게
金成昱
평양을 오가는 한 牧師(목사)가 獨逸(독일)을 사례로 들었다. 독일도 통일 이전 엄청난 돈과 물자를 주면서 동독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자신도 김정일이 邪惡(사악)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북한의 변화를 위해서 지원에 앞장선다고 했다.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에게 돈과 쌀과 비료를 주는 게 나쁜 게 아니라고 칩시다. 그러나 그렇게 퍼주고 북한에 무슨 변화가 있었습니까? 표현의 자유가 허용됐습니까? 거주·이전의 자유가 생겼습니까? 종교의 자유가 인정됐습니까? 정치범수용소라도 상황이 조금 나아졌나요? 탈북자 강제송환이 중단됐나요? 무슨 변화를 말하십니까? 핵무기와 천안함을 말하십니까? 당신들은 북한을 더욱 망쳐놓은 이들이 아닙니까?”
동독은 통일 20년 전부터 빗장을 열었다. 1989년 기준으로 매년 20억 불의 서독 돈이 흘러갔지만 그만큼 동독의 문이 열렸다. 분단 당시 밤 8시가 넘으면 통일이 된다고 말했다. 동독 주민이 서독 TV를 자유롭게 보면서 공감대를 키웠던 것을 비유한 말이다.
‘통합정책과 분단국 통일 : 독일사례(통일연구원 刊)’라는 책에 인용된 통계에 따르면, 1983년 서독에서 동독으로 방문한 사람은 500만 명, 동독에서 서독으로 방문한 사람은 160만 명에 달했다.
같은 해 서독 → 동독으로 5900만 통의 편지가, 동독 → 서독으로 8800만 통의 편지가 전달됐다. 서독 → 동독으로 소포는 2000 ~ 2500만 개, 동독 → 서독으로 900만 개가 전달됐고, 전화는 서독 → 동독으로 2300만 건이 걸려왔다.
1986년 5월 동서독 간 문화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87년에는 ‘독일·독일의 해’가 만들어졌다. 그 해 5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에 방문했는데 청년들만 4천 명에 달했다. 돈을 준 대가로 자유로운 동서독 편지왕래, 사람왕래, 문화교류가 이뤄진 것이다.
특히 서독 교회는 프라이카우프(Freikauf : 자유를 산다)를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지원의 대가로 서독 교회는 동독 정치범 석방, 교계 인사 석방, 이산가족 재결합 등을 추진한 것이다.
동독인의 마음을 사기 위한 서독인의 노력은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설치된 후 40년이 못 돼 결실을 맺었다. 1989년 “우리가 바로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동독인들의 데모 함성은 1990년 1월 들어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라는 통일의 외침으로 변화되었다. 民族自決(민족자결)에 기초한 독일인의 의지는 戰勝(전승) 4국도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통일독일은 세계 4대 강국의 자리에 진입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의 교회가 그 많은 쌀·비료·달러를 북한에 주면서 단 한번이라도 지하교인이나, 정치범수용소, 탈북자 강제송환, 영아살해·강제낙태와 같은 만행의 중단을 요구한 적이 있는가? 학살집단을 도우면서 오히려 ‘人道的(인도적)’이니 ‘사랑’이니 하며 온갖 위선과 교만을 떨지 않은가? 양심을 말하며 가장 파렴치한 愚行(우행)을 범하고 있지 않는가?
이제 지옥의 수문장들이 북한에서 떠나갈 것이다. 깊은 어둠도 걷힐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가 북한을 둘러싼 이 완악한 미혹에 계속 머문다면 돌아올 것은 민족 전체의 끔찍한 저주와 재앙뿐일 것이다.
[ 2010-11-11, 2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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