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우산속에 비가오면 생각나는 그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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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에이케이 작성일10-11-08 16:56 조회2,063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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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엔 주일의 여러 행사를 끝내고 느즈막히 집엘 돌아오는데 가을비가 떨어지데요.
제법 쌀쌀한 바람과 가로등 빛아래 날리는 낙엽 그리고 빗물이 어울어지니 이게 만추의 서정인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형님과 맥주를 한잔하고 집으로 걸어오던 터라 분위기에 젖어 오래된 최헌의 ‘가을비 우산속에’라는 노래도 흥얼거려보았습니다.
누구의 싯귀절처럼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노래지요.
그리워함의 대표적인 노래가 심수봉의 ‘그때 그사람’ 아니겠습니까?
비가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토요일 아침에 중앙일보 중 정진홍 논설위원의 소프트파워를 읽다가 저는 눈시울이 살짝 매우면서 갑자기 울컥했습니다.
물론 울컥하라고 쓴 글도 아니고, 가을날의 감성을 자극하자고 쓴 논설도 아니며, 특정인을 추켜세우자고 쓴 기사도 아닌데 저는 정말 울컥했습니다.
센티해지는게 정말 가을은 남자의 계절인가 봅니다.
제가 울컥했던 대목입니다.
“46년 전인 64년 12월 10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뒤스부르크시 함보른 광산의 공회당을 찾았다. 지금은 시민체육관으로 쓰이는 곳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 35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얼굴과 작업복에 탄가루가 묻은 채로 달려온 광부들도 눈에 띄었다. 대통령이 단상에 오르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가사가 나오지 않자 대통령의 선창으로 모두가 함께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점차 커지던 애국가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목부터는 목멘 소리로 변했고,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애국가의 선율을 덮어 버렸다.
눈물범벅이 된 애국가 제창이 끝난 뒤 당시 박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공회당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 대통령은 준비된 연설 원고를 옆으로 치운 채 말했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되던 박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 버렸기 때문이다. 공회당 안은 ‘눈물바다’가 됐다. 모두가 울었다.”
오늘 아침에도 신문을 읽다보니 경남일보회장인 하순봉씨의 회고록이 출간되었는데,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내용이 관심을 끌고있다라는 내용이 있데요.
갑자기 박정희대통령이 뉴스에 자주 등장합니다. 아래 역시 기사중의 일부입니다.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박 전 대통령과 핵무기 개발 부분이다. 하 회장은 자서전에서 박 전 대통령이 72년 초 당시 김정렴 비서실장과 오원철 경제수석을 집무실로 불러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 기술을 확보하라”고 긴밀히 지시했고 70년대 말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는 거의 완성 단계까지 진행됐다고 밝혔다. 하 회장은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이 79년 1월 1일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지낸 선우연 의원을 부산으로 불러 “나 혼자 결정한 비밀사항인데, 2년 뒤 81년 10월에 그만둘 생각이야.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핵무기를 내외에 공개한 뒤 그 자리에서 하야 성명을 낼 거야. 그러면 김일성도 남침을 못할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비운에 가지는 않았을텐데 저의 사적인 정치적인 이념이나 철학과는 별개로 참 아쉽습니다.
마침 지난 금요일엔 저의 대선배 한분과 상장회사 대표, 투자회사 대표 그리고 저 이렇게 넷이서 저녁식사를 같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때 대선배 한분의 말씀 중 당신의 젊지않은 나이에 창업을 하게된 경영이념과 철학이 정말 제대로 된 금융회사를 만들 수 있는 초석을 다짐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외국의 골드만삭스나 모건스탠리 사례처럼 100년이 걸릴지 혹 150년이 걸릴지 모를 만큼 당신 생전에는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하지 않으면 아무도 안할 일이고, 또한 금융자본의 성장없이 제조업에만 매달리다간 먼 훗날 우리의 후배들이 또 해외의 금융자본에 휘둘리게됨은 명약관화하단 취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다음날 아침에 읽은 중앙일보 칼럼이라서 그랬는지 박정희대통령의 연설중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가 저의 머릿속에 계속 맴돕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론 항상 다짐을 해봅니다. 언젠가 저의 자식들이 저는 평생 한번도 못들어본 이야기... "저 사람 누구 아들이래..."하는 이야길 들을 수 있도록...
즐겁고 활기찬 한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중앙일보 기사원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땀과 눈물의 응결체 ‘대한민국’!
우리는 매일 목숨 건 전투를 했다. 지하 700~1200m에 있는 독일 광산의 막장 온도는 30도가 훌쩍 넘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비 오듯 하는 이곳에서 안전을 위해 ‘중무장’을 한 채 매일 80개의 쇠동발(스템펠·Stempel)을 박아야 했다. 그러나 너무 더워 윗옷을 다 벗거나 아예 속옷만 입고 일하는 게 다반사였다. 땀에 젖은 팬티를 하루 다섯 번 이상 짜서 입어야 했고, 장화는 땀으로 젖어 열 번 이상 쏟아 내야 했다.”(재독한인글뤽아우프친목회 엮음, 『파독(派獨) 광부 30년사』, 1997, 188쪽). 1963년 이런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000여 명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적잖았다. 그만큼 우리는 먹고살기 힘들었다.
독일 루르탄전에 소재한 뒤스부르크시 함보른 광산, 오버하우젠시의 로어벡 광산. 지금은 주변에 철조망이 쳐진 채 잡초만 무성하지만 바로 그 땅 밑 1000m 아래 막장에서 45년여 전 우리의 광부들이 1m를 파 들어갈 때마다 4~5마르크씩 받으며 일했다. 쇠동발을 뽑고 세우는 작업을 하는 한국인 광부치고 이 쇠동발을 붙들고 울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찌는 듯한 더위와 석탄가루, 채굴기의 소음은 귀청을 찢었지만 그들은 버텼다. 악으로!
독일 땅에 도착한 한국 간호사들이 처음 맡았던 일은 알코올 묻힌 거즈로 시체를 닦는 일과 그 밖의 허드렛일이었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은 66년 1월 기준으로 월 440마르크(약 110달러)를 받았다. 거기서 최소한의 생계비를 제외한 거의 전부를 고국으로 송금했다. 63~78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한국 광부들은 7800여 명. 66~76년에 걸쳐 독일로 간 한국 간호사는 1만30여 명이 넘었다. 이들의 최고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국민총생산(GNP)의 2%대에 달했다. 그들의 땀과 눈물 젖은 송금액이 경부고속도로·제철소·화학공장 건설의 종잣돈이 됐고 오늘의 우리가 있게 만들었다.
46년 전인 64년 12월 10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뒤스부르크시 함보른 광산의 공회당을 찾았다. 지금은 시민체육관으로 쓰이는 곳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 35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얼굴과 작업복에 탄가루가 묻은 채로 달려온 광부들도 눈에 띄었다. 대통령이 단상에 오르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가사가 나오지 않자 대통령의 선창으로 모두가 함께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점차 커지던 애국가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목부터는 목멘 소리로 변했고,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애국가의 선율을 덮어 버렸다.
눈물범벅이 된 애국가 제창이 끝난 뒤 당시 박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공회당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 대통령은 준비된 연설 원고를 옆으로 치운 채 말했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되던 박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 버렸기 때문이다. 공회당 안은 ‘눈물바다’가 됐다. 모두가 울었다.
다음 주면 서울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다. 원조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가 됐고, 남의 나라에 막장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해 외화를 벌어야 했던 대한민국은 어엿한 G20 의장국이 됐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거저 이뤄진 나라가 아님을. 우리가 잊고 있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같은 이름 없는 대한국민의 땀과 눈물의 응결체임을 말이다.
댓글목록
소강절님의 댓글
소강절 작성일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
금강인님의 댓글
금강인 작성일
그 때의 고난의 과정이 이제는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너무 매달리는 바람에,
반공교육에 신경쓰지 않은 까닭에,
결과적으로 살기 좋은 돼지우리, 풍부한 먹이는 준비되었으나
살찌고 생각없는 돼지새끼들이 양산되었습니다.
최성령님의 댓글
최성령 작성일
대한민국의 발전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지요.
연방제 통일을 하고
남한이 북한수준으로 내려가면
별도의 통일비용이 필요 없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이
다 헛되고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나는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