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50)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09 09:53 조회2,015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39. 생이별한 이산가족
중부전선 전쟁터 한가운데서 식량난으로 고생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심각한 피난민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튿날부터 연초중학교 운동장과 우리 집은 나를 보려고 오는 사람들의 면회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나의 소문은 거제도 전역에 있는 피난민들에게 퍼져 나갔고 멀리 육지에까지 퍼져 나갔다 한다. 모두들 와서 나의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엉엉 울며 눈물을 쏟고, “교장 선생님 댁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해서 이런 축복을 받느냐”고 부러워했다.
띄엄띄엄 통영, 마산, 부산, 진해, 진주 등지에서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우리 집을 일부러 찾아와 나를 만나는 피난민도 있었다. 나의 부모와 피난시절 친했던 장갑송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어린 딸 명숙이를 데리고 통영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로 건너와 나를 만나고 며칠을 우리 집에서 묵고 간 일도 있다.
아저씨 가족은 성진에서 부모와 세 딸을 두고 피난을 왔다고 했다. 나의 어머니와 동갑인 그 아주머니는 공부를 많이 한 분인데 이북 이야기만 나오면 두고 온 세 딸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한숨을 내쉰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 댁 어른들과 자녀들과 우리 형제들은 피난시절 정이 들어 지금까지 가까운 친척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또 얼마나 답답했으면 어린 나에게 “통일이 언제 된다고 하더냐?”고 시국에 대하여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분들은 그때의 응어리진 가슴이 이제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을 테니 이산가족의 삶이란 이렇게도 모질기만 하단 말인가…….
40. 대한민국이 배척하는 마르크스 레닌 사상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역사 바로 세우기니 뭐니 하면서 그것을 핑계로 이미 우리가 다 경험하고, 다 알고 있는 6ㆍ25라는 그 생생한 사실까지도 엉뚱하게 거짓으로 뒤집어 성장기의 청소년들에게 두려움 없이 대한민국이 북침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현실에 놀랄 뿐이다.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순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6ㆍ25의 아픔을 안고도 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하려는 국민들의 실천 행위는 이제껏 값졌던 것이다. 국민 모두가 도처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실망을 딛고 열심히 일하면서 희망에 찬 목소리가 우렁찼고 전쟁터에서 우리 국군의 열정이 남달랐던 것을 모두는 깨달아야 한다.
거제도에서 만난 김성천이란 친구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는데 함경남도 함흥에서 개신교 목회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나 종교를 탄압하고 목사들을 못살게 하는지 목회활동을 함께 하던 친구 목사 두 명은 이북에서 사상범으로 붙들려 어디론지 행방불명되었고 그때부터 친구 가족들은 슬픈 운명의 나날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내 친구는 마침 1․4 후퇴시 부모를 따라온 가족이 같이 김일성 치하를 피해 거제도로 피난 왔다. 성천이 아버지께 납치된 가족들이 말하기를 우리도 남쪽으로 가고 싶은데 잡혀간 가장의 생사를 몰라 어떻게 남겨두고 우리만 피신하겠느냐면서 망설이다가 그만 나오지 못했다. 성천이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성천이 아버지는 피난 중 너무 쇠약해져서 거제도 장목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 어느 곳 남의 땅에 산소를 정해 모셨는데 자식들이 숨을 좀 돌릴 만하여 얼마 전까지 여러 차례 아버지 묘소를 찾고자 여러 차례 찾아갔으나 어떤 곳인지 산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했다. 1955년도에 부산으로 나와 제2송도의 고아원에서 세 남매가 크고 그의 어머니는 고아원(지금은 보육원)에서 밥 짓는 일을 하면서 지냈다. 내가 간혹 찾아가면 친구 어머니는 가슴에 맺힌 한을 털어 놓느라고 듣는 나로 하여금 숨도 미처 내쉴 수도 없을 정도로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쏟아 놓았다.
성천이는 음악지식과 미술지식이 아주 깊었다. 특히 학창시절에는 클라리넷을 잘 다루었고 일어 공부를 파고들어 그 분야에서 일가견이 있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고 어머니가 이북에서의 일을 이야기 주제로 삼으면 친구는 도망가듯이 하며 듣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의 한이 너무 안쓰러워서였고 밤낮으로 들어서 어머니 아픈 마음을 통달하였기에 이제는 오히려 듣기 싫어하는 마음이 먼저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머니 이야기의 맨 처음 이야기 시작은 가짜 김일성의 무모하고 못된 개신교도 탄압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나도 몇 번 들었지만 말을 한번 꺼내시면 앞에 앉은 세 남매가 꾸벅꾸벅 졸 정도로 끊임이 없었다.
나의 외가는 아직도 함경북도 청진에서 북괴에게 모진 시련을 당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프다. 90을 바라보는 내 어머니는 지금도 헤어질 당시 청진에 있었던 친정집 형제들을 그리워하고 북쪽에 관한 이산가족 뉴스만 나오면 당시의 김일성을 욕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 때의 이산가족들의 애절한 정황을 생각하면 이제까지도 평생의 슬픔을 가슴에 지니고 이제나 저제나 하다가 아까운 긴 세월을 다 놓치고 지낸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마음 이를 데가 없다.
다시 거제도로 돌아가 본다. 이때 아버지의 일기장에 쓰인 글이다.
아버지! 부르며 달려드는 자식의 얼굴
4년 풍진 속에 몰라보게 큰 자식을
안아보는 부모 된 마음
찬수야! 얼마나 불러보고 싶은 이름이었던고
못난 아비 어미를 얼마나 그리워 저렇게도 눈물이 용솟는가
어머님 홀로 고향에 두고
우리 모두 한자리에 앉아
고향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11월 2일 권상사 가족을 불러 식사를 하다. (맺어진 인연은 인생에 추억을 남기고)
내가 배낭으로 지고 온 찹쌀은 한동안 조금씩 조금씩 수수밥에 소중히 섞어 밥상에 올려졌다. 연초엘 와 보니 고향에서 전쟁으로 피해 다니면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피난민 생활은 참으로 처참했다. 매일같이 초등학교 운동장 서쪽으로 커다란 텐트를 친 우유죽 배급소에서 우유 배급표를 내고 점심때는 피난민 학생들이 모두 줄을 서서 끓인 우유죽 한 사발을 후루룩 마시는 것으로 한 끼를 때우는 정도이니…… 한참 성장할 나이에 얼마나 배들이 고팠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즉시 연초 초등학교 4학년 2반(담임 김근자 선생님)에 편입되어 학교에 다녔다. 각 학년 1반은 본토박이 자녀들로 편성되어 있고 2반, 3반, 4반은 피난민 자녀들만으로 학급이 편성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강원도 양양지방의 사투리는 쓰지 않고 함경도 피난민 아이들과 어울려 함경도 사투리만 써서 지금도 함경도 억양이 내게서 떠나지를 않는다.(계속)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