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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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03 06:54 조회2,062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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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거제도 인민군 포로수용소
전쟁 통 내내 할머니에게 걱정만 끼쳐 드린 나에게 아버지는 ‘할머니 잘 모시고 있거라. 부탁한다.’고 했다. 어린 아들이지만 나를 대견스레 생각하고 태어나서 그때까지 다 쭈그러들어 주름살투성이인 할머니 뱃가죽만 만지작거리다가 잠드는 어린 나에게 당신 대신에 할머니를 잘 모시라고 편지에 썼던 것이다.
아버지가 권상사 아저씨를 만난 동기는 이렇다. 나의 아버지는 1951년 늦 봄에 같은 1.4 후퇴 때의 피난민 중 연초면에서 우연히 30대 초반의 오찬명씨라는 분을 만났다. 오찬명씨는 내가 다니는 천주교회의 교우 김한봉(요셉 1935년생)씨의 매형이었다. 그는 평안북도 서북청년단원인 철저한 반공주의 자였다. 당시 그는 고현의 거제도 주둔 미군사령부 소속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을 심문하며 또 상담역할을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이었다. 그의 추천으로 아버지도 유엔군 사령부 소속이 되어 한동안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민주주의 교육을 시키는 정훈 교관이 되었다. 민간인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은 “김씨 아저씨”로 통했다. 같은 사무실에 영어를 잘하는 20대 후반의 방치형이란 분과 사환 일을 보는 당시 17세의 김석봉씨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는 한준명 목사 이렇게 다섯명이 근무를 했다 한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는 피난민의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못하는 현상을 안타까워 해서 학교 설립을 구상하였고 곧 이를 추진하는 중이었는데 9월 중순께 반공 정훈교육을 시키는 교관으로 출퇴근을 할 때 미군부대 앞에서 피난민 학생들이 떼를 지어 부대 근처를 배회 하면서 초콜릿도 얻어먹고 껌도 달라고 애걸하고 미군들의 군화를 닦아주고 얻어먹는 처량한 전쟁 통의 학생들을 보고 ‘아! 이 아이들이 저렇게 공부도 못하고 피난을 나와 거지 떼가 되어 부대 근처에서 처량하게 배회하니 학교를 반드시 세워 이들을 가르쳐야 되겠다’고 거듭 다짐하고 (당시 거제도에는 육지의 각처에서 30만 명이 훨씬 넘는 피난민들이 내려와 판잣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연초면만 하여도 면사무소 중심으로 4만의 인구가 집결되어 산 중턱까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중학교 설립을 구상했던 것이다.
학교를 세우는데 미군 사령부의 설립 자재 도움이 대단히 컸다고 했다. 하루는 나의 아버지가 부대 앞에 중학교 1학년 정도 되는 껌 파는 아이가 있어 쳐다보니 아이가 아주 똑똑하게 잘 생겨서 그 학생의 내력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말하는데 아버지가 데려온 아이를 보니 목에 때가 더덕더덕 끼었는데 완전 거지 행색이라 하였다. 사실 그 당시 피난민은 모두가 거지이기도 하였던 시대였다. 아버지는 서울이 고향인 권오호와 약속을 하고 저녁 때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그 날 이후 우리 가족이 되어 침식을 같이하며 학교가 개교한 뒤에는 학교 소사로 일을 시키면서 공부를 하게 하였다. 오호형은 학급에서는 반장도 하였다. 나중의 일이지만 부모님 만난 뒤에 나는 학교 기숙사 한방에서 오호 형과 침식을 같이했고 교실 뒤쪽에 있는 탁구대에서 탁구도 같이 재미있게 쳤다. 오호 형은 이렇게 우리 집에서 가족처럼 생활했다.
1952년 4월 말 즈음 어느 날, 오호 형이 학교 운동장에서 배구를 하고 있는데 포로수용소에 공무로 들렀다가 장승포 쪽으로 지나가던 헌병 지프차 위의 권상사 아저씨 눈에 띄어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어디 가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어서 두 형제가 감격적으로 만났고 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나누는 중에 전방의 나와 할머니 구출 얘기가 나왔다 한다.
순간순간의 일들이 전광석화처럼 일어나던 시대였고 숨이 콱콱 막히는 일이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일어난다는 옛 말처럼 실제로 있었던 그 당시의 일이었다. 그 이후 오호 형은 아들을 잃고 부산에서 슬픔 속에 지내던 부모님의 수소문으로 부모와 다시 만났다.
거제도의 포로수용소에는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다. 적개심에 불타는 인민군 포로들이 매일 그들 특유의 제식훈련을 하였고 총검술 자세 훈련도 하면서 매일같이 사고를 치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한다. 뒤에 반공포로가 되어 석방된 고향 친척 집의 경수형과 건수형도 수용소에서 만났는데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으니 깨소금이 필요하다 하여 어머니가 상당 분량의 깨소금을 만들어 전달하기도 하였다 했다.
경수 형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고 건수 형은 지금도 부산에 산다. 또 아버지가 해방되기 전에 함경북도 두만강 옆에서 일할 때 일본인들에게 유난히도 곤욕을 치르며 구박을 받는 소사 일을 보는 소년을 잘 돌보아 주고 그를 따뜻이 격려하여 주었는데 그 형이 청년이 되어 인민군 포로가 되어 그 곳에서 만나서 아주 반가워하였다고 한다.
또 해방 후 고향에 내려오던 해에 속초 위 간성 쪽으로 오호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고 계실 때 아주 똑똑한 쌍둥이 형제가 있어 이들을 잘 지도했는데 그들도 인민군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반갑게 만났다고 하였다.
나중에 나의 고향이 완전 수복된 이후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자세히 들은 이야기이지만, 참으로 이모의 사연은 너무도 끔찍하고 안타까웠다. 고의태란 사람에게 시집을 간 이모는 어머니의 4남매 형제 중 제일 막내인 하나뿐인 여동생이다. 8ㆍ15 해방 전 열여덟 살 때 머일 할머니의 시누이 큰아들인 나의 이모부는 인민학교 선생이었는데 아주 똑똑하다고 머일 할머니께서 소개하는 바람에 시집가기 싫다고 하는 이모를 아버지가 적극 권고하여서 이모가 울면서 승낙했다.
그 댁 며느리가 되어 그 후 두 아들을 낳았는데 유행병 홍역으로 모두 잃었다. 마침 셋째아이를 임신 중에 6ㆍ25가 나서 1ㆍ4 후퇴 시까지 잠시 국군에 협조한 일이 있었는데 이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고자질을 하여 이모부와 만삭이 된 이모는 인민군들에게 끌려가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경 모형도
당시 38선 바로 이북엔 지리적 위치도 있었겠지만 마음속으로 거의가 이남의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많았다. 이런 일이 동네마다 비일비재하였으니 백성들이 조금 잘못이 있거나 어떻게 고약한 심보를 가진 이웃이 있어 모함질 한 번이면 그 즉시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개미 목숨보다 못한 그런 때였다.
이모는 해방 전 언니인 나의 어머니 집에서 어린 나를 업어 돌보고 어머니의 가사를 도와주면서 나를 아주 귀여워하였다 했다. 뜨개질을 아주 잘하였고 바느질 등 손재주도 뛰어났다 하였다. 이모가 머리를 곱게 빗고 따 늘인 다소곳한 소싯적 사진을 볼 때마다 지금도 안타깝기가 짝이 없다.
이모부는 성격이 활달하여서 6ㆍ25 나기 두 해 전인가 해서 우리 집에 찾아온 적이 있는데 마침 우리 텃밭을 작은할머니 댁에서 부쳤었다. 그때 감자 쪽을 쪼개어 심으며 조력하는 이모부를 졸졸 따라다니는 나에게,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며는 이 땅에 또 다시 봄―은 온―다 네― 아리랑 아리랑 ―”
하면서 “온다네―”를 다시 반복하곤 웃으면서 얼굴을 마주보며 가르쳐 주던 다정스런 모습이 생각이 난다. 나는 그때의 봄노래가 모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저 따라 불렀다. 그런 나의 이모부는 6ㆍ25 때 인민군 앞잡이들에게 신고되어 끌려가 깊은 산골에서 여기저기서 붙들려온 다른 마을의 국군 돕기에 참석한 민간인 조력자들과 함께 현장에서 총살을 당했던 것이다. 이모가 잉태한 나의 사촌동생은 세상에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흉악한 총칼에 사라졌던 것이다. 전쟁과 사상의 대립은 이렇게 무섭고 끔찍하였다.
할머니와 나는 1ㆍ4 후퇴 뒤에 강릉으로 피난을 내려갔다 올라오면서도 이 동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산다는 이모의 식구들이 어떻게 되었나 하며 잠시 마음속으로 궁금할 정도였지 그때 벌써 인민군들에게 총살된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계속)
댓글목록
피안님의 댓글
피안 작성일
빨갱이들은 악마의무리들임니다.
부모 형제 이웃 국민이란 개념자체가 지워진
동물보다 못한 것들입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