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36)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0-26 05:38 조회2,053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26. 전방 신병 전투훈련소가 된 복골
고향에 돌아온 우리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관덕정 넓은 곳, 나의 증조할아버지의 누이동생 되는 대왕고모 할머니의 아들 이왈수 할아버지의 집 과수원과 그 넓은 논밭이 모두 사단 사령부와 연병장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그 서쪽 정승골 쪽으로는 신병 훈련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밤낮으로 언덕 위로 치달으며 내리뛰면서 고함치는 소리와 사격하는 소리가 매일 이어졌고, 군가소리가 온 고을에 우렁차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려 퍼졌다. 새벽이 되면 불어대는 기상나팔도 인상적이었고 밤 10시에 울리는 취침나팔은 너무도 숙연하고 애잔하게 들렸다. 낮에는 신병훈련 중 박격포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그 포탄이 터져 연기가 자욱한 쪽을 뚫고 고함을 지르면서 돌격하는 군인 아저씨들의 기백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군용자동차가 마을 여기저기에 왔다 갔다 하고 이쪽 길 저쪽 길 할 것 없이 훈련받는 군인들이 너무 많아 강릉시장에서 사람 많이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매일 같이 보게 된 것이다. 제주도에서 신병훈련을 간단히 마치고 이곳 최전방에 와서 실전연습을 한다는 것이다. 훈련 중 오발사고로 많은 군인들이 죽었다는 얘기도 가끔 들려왔고, 박격 포탄이 사람이 지나가는 한가운데 잘못 떨어져 터지는 바람에 친구 몇 명과 지게 지고 밭에 갔다 오던 동네 아저씨 등 열세 명이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모두 목숨을 잃어 우리 아래 윗동네 할 것 없이 동네 전체가 깊은 슬픔에 젖은 사건도 있었다.
그때는 운 나쁘게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유족들에게 무슨 보상 그런 것이 없을 때이니까. 우리들은 매일같이 실제로 전쟁 훈련을 구경하는 셈이었다. 그때까지도 우리 마을은 남쪽 멀리 포항 쪽으로 피난 내려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집들이 있었다.
여름 조금 지나 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나는 3학년을 다시 다녔다. 1년을 묵은 것이다. 학교 가는 길 왼쪽으로는 사령부 연병장이 있고 오른쪽 야산은 바로 송암산 중턱까지 이어지는 신병훈련장이었다. 우리학교에서 짐미(장산리) 쪽으로 가면 동해바다까지 이어지는 그 넓은 벌판이 모두 ‘쌕쌕이’ 등 여러 가지 비행기가 내렸다 떴다 하는 비행장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속초비행장이다.
비행기가 한번 뜰 때면 그 요란하고 웅장한 소리가 강현 들판 온 마을을 울렸다. 지축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관덕정 신병 훈련소 터
어떤 때는 사다리 비행기가 한꺼번에 세 대씩이나 떠서 훈련을 할 때도 있었는데 장산리 일대 비행장 꼭대기 하늘이 온통 동글동글한 낙하산으로 덮여 있었던 기억도 난다. 우리는 이렇게 환경이 갑자기 변한 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넘은들 벌판을 넘어 속초는 이미 국군이 다시 수복하였고 간성 건봉 쪽에서 진부령으로 이어 이어지는 북쪽에서 매일같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여름 지나서는 거진, 대진까지 밀고 올라가서 김일성 별장이 있는 화진포까지 진격하였다고 전방에서 우리 동네로 내려온 국군 아저씨들이 말해 주었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원산엔 언제 쳐들어가 올려 미느냐고 지나가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묻곤 하였다. 사랑하는 아들을 그리는 모습이었다.
공수부대 낙하산 훈련
뒷짐을 지고 천천히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아주 커다란 목소리로 목에 힘을 주어 뻐겨가면서 “차렷―! 열쭈웅 쉬어―!” 그러고는 다시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차렷! 열중 쉬어!” 이렇게 여러 번 구령을 붙이다가 한 마디의 말도 않고 훈화도 없이 멀쑥하게 천천히 구령대 아래로 내려갔다. 우리들은 하도 우스워서 복도나 길거리에서 교장 형만 지나치면 속으로 “차렷! 열중 쉬어! 차렷!” 하면서 그 형이 멀리가면 키득거리고 깔깔대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한 달 조금 지나 그분은 교장자리를 그만두었다. 전쟁 통에만 있음직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교장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전혀 모르고 남이 추대하니 남의 위에 올라서 보고 싶어 분별없이 잠깐 동안 교장자리에 앉아 여러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고 평생 이야깃거리 남기며 두고두고 무안당하는 지울 수 없는 처신을 하였던 것이다. 그때나 이때나 책임질 자리는 함부로 명예만 혹해 탐낼 일이 전혀 아니다.
가을에 우리 학교에서는 운동회가 있었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백군과 홍군으로 갈라져 달리기 등 여러 가지 순서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은 당연히 운동회 때마다 있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마지막에 전교생이 백군 홍군으로 갈라져 전쟁놀이를 하였다.
그때 우리들은 동네 형들을 따라 총알을 가지고 장난감 만지듯이 하면서 놀았다. 나무로 총의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 그 나무총 위에 탄피 길이만큼 홈을 약간 파서 빠져나가지 않을 만큼 한 뒤에 철사로 동그스름하게 탄피 양끝을 감싸게 하고 나무총신 옆으로 꼭 채운다. 그렇게 탄피 껍데기가 앞뒤로, 또는 위로 튀어나가지 않게 한 뒤(탄알을 장전하는 곳을 만든 뒤) 총신 옆에 고무줄을 양 옆으로 걸고. 커다란 못을 구부려 뾰족한 곳은 뇌관 있는 곳으로 향하게 하고 ‘ㄴ’ 자로 구부린 못의 머리 부분은 고무줄에 걸어 옆으로 제쳐 못에 걸면 바로 안전장치가 겸해지도록 되었다.
오른쪽에 건 구부러진 못(방아쇠 역할)이 잘 나가도록 장치를 하고 오른쪽 엄지를 왼쪽으로 튕기며 바로 세우면 쇠못은 고무줄 탄력에 의해 앞으로 나가면서 날카로운 끝이 장전된 총알 껍데기 뒤쪽 뇌관을 치게 만든 우스운 총이었다. 반드시 총알 끝을 돌에 두드리거나 나무 사이에 끼워 흔들어 총알을 빼고 그 속에 있는 화약을 모두 제거하고 뇌관만 살아있는 빈 껍데기 탄피로 그 나무총에 장전하게 한 것이다.
한번 쏘면 딱하고 단발 음이 나지만 여럿이 모여서 일시에 쏘면 제법 전쟁하는 것과 같은 흡사한 총소리를 연상할 수 있었다. 우리 어린이들은 중부전선 양군이 대치한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 들어 총싸움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았기에 운동회 때 이런 희귀한 백군 홍군의 어린이 전쟁놀이가 있었던 것이다.
전교 남자 어린이들이 백군 홍군으로 갈라서서 “와!” 하고 소리 지르면서 운동장 한복판으로 나가 총을 쏘면 흡사 처절한 전쟁을 보는 것 같았다. 화약 연기가 교정에 자욱하고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결과는 백군이 이기도록 결말이 나 있었다. 그 지긋 지긋한 전쟁 통에 온갖 아픔과 슬픔을 다 경험한 우리들인데 학교가 문을 열자마자 운동회에서 전쟁놀이를 먼저 하다니…….
실전훈련을 마친 신병들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투입되어 죽어라고 버티는 인민군을 물리치려고 고성 금강산께로 계속 올라갔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국방군이 어서 빨리 북으로 쳐 올라가 원산과 함경북도 청진을 해방시키고 우리 가족과 청진에 있는 나의 외갓집 식구들을 만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계속)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