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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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0-22 00:13 조회2,04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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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비목(碑木)
내가 성장하면서 그 장면은 항상 내 마음 안에 있었는데 점차로 전쟁의 참혹함과 그때의 사실을 연관시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교직 생활 30여 년간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바라볼 때마다 가끔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의 아까운 젊음의 원통한 희생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울먹거렸다. 이들을 죽게 한 그 무모한 전쟁의 원인에 대하여 분노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소중한 남의 집 귀한 자녀들을 외부로부터 소중하게 보호하고 때가 묻지 않게 아름답게 키우고 가르쳐야지!’ 하는 생각이 나의 교단에서의 교육 목표, 즉 신념의 출발점이 되었다. 특히 현충일 10시에 경적이 길게 울리면 묵념을 한다든지,「비목」이라는 가곡을 부를 땐 그 애잔한 가사 내용과 그 때의 모래사장에 묻힌 꽃피우지 못한 청춘과 반드시 연결되어 주변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눈물을 마구 흘리는 버릇이 지금도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아내와 등산 도중 가끔 지나치는 산비탈의 외로운 묘소를 보면 반드시「비목」을 부른다. 그러다가 그만 울컥하여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며 노래를 마저 부르니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웬일이냐고 하여 나는 내 심회의 자초지종을 다 말해준 적이 있었다.
나의 장인도 6ㆍ25 난 해 8월에 당시 대한민국 강원도 농산물 원종장의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인민군에 끌려가서 어느 골짜기에선지는 모르지만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풍문에 들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도 나의 눈물 흘리는 연유를 알고부턴 같이 손을 붙들고 눈시울을 적실 때가 많다. 그 이후「비목」을 부를 때 내 아내는 으레 내가
비목
재직 시에 6월 6일이 가까이 오면 학생들을 인솔하고 영령들 앞에 흰 국화꽃을 놓으러 여러 차례 간 적이 있다. 주변을 깨끗이 청소도 한다. 이것으로 살아남은 우리들이 이들의 숭고하며 애절하고 엄숙한 희생에 대한 감사의 도리를 다 하고 있었는가 하며 반성하는 마음을 가져왔다. 이 땅의 젊은이! 남과 북의 이념을 떠나 생각해 보는 그 젊음과 안타까운 희생! 그 희생으로 이 땅에 살아남은 우리들은 과연 생명의 존엄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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