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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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0-04 00:23 조회2,196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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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민재판
전쟁이 나고부터 우리 동네에서는 저녁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인민위원장 주도로 인민재판이 뻔질나게 벌어졌다. 우리 아랫집 종덕 아저씨도 인민재판을 받고 전신을 두들겨 맞아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 끌다시피 하고 다녔다.
그 이유는 종덕아저씨의 형 종순 아저씨가 남으로 월남하였기 때문이었다. 종순아저씨가 얼마 전에 남쪽 강릉 쪽으로 공산 치하를 피해 월남하였는데 동생 되는 순박한 종덕아저씨를 지목하여 한 동네 성씨 다른 집안 패거리가 인민재판이란 명목으로 뭣도 모르고 모여든 동네 사람들 앞에서 경우 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팬 것이다.
난데없이 갑자기 억울하게 얻어맞아 인사불성이 된 아저씨는 그날 저녁 들것에 실려 집으로 옮겨졌다. 그 집 가족들이 울고불고 야단이 났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당시 이런 일이 인근 여러 동네에서 비일비재했다. 무법천지였던 세상이다.
날짜가 지나면서 철없는 우리 친구들은 남쪽 해방이고 전쟁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학교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에 와서 친구들과 어울려 개울가로 산으로 몰려다니며 평화로이 놀러 다니기만 했다. 학교에서 전쟁에 대한 얘기만 가끔 듣고 다닐 뿐이었다.
내게 진외가 집으로 8촌이 되는 평창 이씨 집안의 병시 형이 말했다. 6월 하순 우리 동네 사람들이 6ㆍ25 전쟁이 난 줄도 모르던 그 시기에 나의 진외가 마을 형편은 우리와 아주 달랐다. 앞서 이야기한 곰이 출몰하고 멧돼지가 산골을 누비는 서림마을 나의 진외가 동네에서는 6ㆍ25 당일 벌써부터 인민군이 삽시간에 진격해 들이닥쳐 평화로운 산골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곳은 38선에서 남쪽으로 겨우 3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남설악의 고산지대 마을이었다. 신선이 산다는 하늘밑 첫 동네 미천골 마을도 모든 파괴 상황이 예외는 아니었다. 한동네에 사는 전주이씨 집안의 청년들이 모두 의용군으로 끌려갔는데 그중 몇 명은 전쟁 와중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고향에 돌아온 뒤 다시 이번엔 국군으로 또 입대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인민군도 되었다가 국방군이 되는 과정을 겪어가면서 후일 국군의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들 중 몇은 지금도 생존해 있다.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는 산골마을에도 여기저기서 인민재판이란 무법천지의 과정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산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희생당하였다 했다. 난데없이 그 순박한 산골마을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모두 깨져 버린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양쪽 군대가 번갈아 들어오면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군인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안 해도 될 신고를 일부러 해 가면서 사는 환경으로 바뀌니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병시 형네 집 할아버지는 당시 연세가 많아서 항렬로 형에게 숙항이 되는 아저씨들이 교대로 지게에다 모셔 지고서 강릉 아래 맹방까지 나갔다 왔다 한다. 병시 형도 경상북도 경산까지 피난 나갔다가 고향 수복 후 돌아왔다. 나의 작은댁 할머님 친정 아래동네 ‘황이’라는 곳의 경주최씨 마을에서도 이 같은 처참한 현상이 벌어졌는데 지금도 산골 여기저기 6ㆍ25 이야기만 나오면 당시를 경험한 사람들이 끔찍한 마을 파괴 현상에 대하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기억조차 하기 싫어하는 분위기이다. 얼마나 처참한 당시의 일들이었겠는가.
내 어머니의 고종사촌동생 중 김성호라는 아저씨가 있다. 성호 아저씨의 어머니는 바로 설악동 상도문에서 절만 짓는 대목으로 유명한 나의 외할아버지의 여동생이다. 나에게 외갓집 고모할머니가 되는데 할머니 가족은 해방 후 금강산 온정리에 살다가 곧 서울로 이사를 갔다. 성호 아저씨는 6ㆍ25때 서울을 사수하던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6ㆍ25가 나고 3일 뒤 새벽에 인민군이 서울로 진격해 들어오는 바람에 일부 국군들이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고 이어서 성호아저씨가 속한 부대도 서울을 지키다가 후퇴를 하게 되었다. 27일 자정이 넘어서 성호아저씨는 지프차를 타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는데 인도교 전체가 남쪽으로 향하는 서울 피난민 행렬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피난민들과 군인들이 뒤섞여 천천히 인도교를 건너는데 서울역 부근에서는 총과 대포소리가 들리고, 피난민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비행기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꽝! 꽝!”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피난민과 군인들은 다리 위에서 남쪽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적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한강 다리를 폭격해 끊는 줄도 모르고 피난민과 군인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까마득한 다리 밑 물속으로 폭포수 떨어지듯이 모두 떨어졌다. 성호아저씨도 밀려 앞으로 나가다가 차에 탄 채로 경황없이 다리 밑 강물로 떨어졌다.
성호 아저씨가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여의도 샛강 얕은 물가였고 동료들과 지프차는 어떻게 된 줄도 모른 채 심하게 다친 몸을 이끌고 요행히 부대를 찾아갔다. 전투를 할 수 없어서 대구 육군병원에 부상병으로 장기간 입원을 했다. 그 이후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의가사 전역이 되었는데 다친 몸이 완쾌되지를 않고 늑막염으로 내내 고생을 하였고 다른 합병증까지 도져 1962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저씨는 유화를 잘 그리는 화가였다. 마음이 인자하고 항상 웃음을 머금은 듯한 얼굴로 노래도 잘하였다. 당시 아저씨에겐 미봉, 용기, 미선 어린 삼남매가 있는데 어린 시절 그들은 아버지 잃고 어머니와 고생을 하며 성장했으나 모두들 재능이 뛰어나고 또 성실하다. 특히 미선 여동생은 아버지를 닮아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재원이다. 지금도 성호 아저씨 이야기를 하면 아저씨의 외사촌 누이인 내 어머니부터 시작하여 6ㆍ25의 아픔이 그렇게 클 수가 있었는가 하고 모두들 눈시울을 적신다.(계속)
댓글목록
금강인님의 댓글
금강인 작성일
누구네 집이나 이런 이야기의 줄거리를 다 겪었는데....!
선열들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잊어버리는 한심한 족속들 때문에.
그리고 예외로 김뒈중, 뇌물현 일가는 이런 피해를 겪은 일이 없었고.
그러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