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연재합니다. " 내가 겪은 6.25"(1) / 화곡 김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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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09-22 06:09 조회2,785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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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연재합니다. " 내가 겪은 6.25"(1) / 화곡 김찬수
이 책은 2007년 6월 20일 도서 출판 명문당에서 초판으로 출간된 350p 분량의 생활수기 형식의 경험 이야기 입니다. 이 책은 애독자 절찬리에 2010년 4월20일 증보판(3판에 해당)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375p 분량으로 증보 출판한 책입니다.
오늘부터 약 200회정도로 예상됩니다만 이 책의 내용을 저자 김찬수 제가 직접 연재한 글로 회원님들을 뵙고자 합니다. 많은 지도 편달을 바랍니다. 2010년 9월 21일. 전방 춘천에서 화곡 김찬수 배.
내가 겪은 6.25
내가 겪은 6.25 (1) /화곡 김찬수
추천사 / 인강 한광덕
일본의 식민지 질곡으로부터 해방되었던 8․15의 기쁨은 순간이었고, 북의 6․25 남침전쟁이 몰고 온 분단의 고착과 갈등의 연속 속에서 반도의 남쪽에서나마 오늘의 대한민국이 성장할 수 있었음은 축복 중의 축복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위협 속에서 이룩해 낸 민주화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성공사이기 때문이다.
불행 중의 불행은 세계가 놀라는 대한민국의 성공 앞에서 이미 무릎을 꿇었어야 할 북의 공산세습 독재정권이 남쪽의 <햇볕>을 받고 살아 남아 교묘한 <대남공작>을 계속하는 것이며, 밥을 굶는 북한의 동포를 노예상태로 장악한 가운데 핵무장으로 남북관계의 주도권까지 장악해 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 기막힌 현실 속에서 6.25 전쟁 60주년을 맞는 이 나라의 친북좌익 정치인들은 6.25가 조선시대의 역사인 양 딴전을 피우는 가운데 6.25를 도발했던 북의 세습독재정권과 화해 협력을 하면 평화와 통일이 굴러오는 것으로 <평화>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형국이다.
이와 같은 거짓 평화 속에서 모두가 침묵한다면 지난 60여 년간 이룩해 온 대한민국 성공의 역사는 어떻게 될 것이가? 대한민국의 역사가 부정될 때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것인가?
대부분 70 고령을 넘겼지만 아직도 6.25 참전용사가 살아 있는 동안, 젊은이들에게 6.25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언제, 왜 일어났고 누구와 어떻게 함께 막아 내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건재할 수 있었는지를 알려야 할 책임이 5, 60대의 우리들에게 있는 것 아닐까?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책임을 통감한 60대 후반의 동지가 있었으니 그 이름 '대청화곡!'필명으로 남북의 분단과정과 피눈물 나는 6.25전쟁의 목격담을 30여 회에 걸쳐 조선블로그에 연재해 오던 그가 6.25 57주년을 맞아 <내가 겪은 6.25>라는 단행본을 펴냈다.
그는 고향인 양양이 북위 38도선 이북에 위치한 탓으로 조국의 남북분단 당시 <인민공화국>에 살다가 6.25 전쟁을 통한 휴전선의 설정으로 자유 대한민국에 살게 되었으며, 양양군의 회룡인민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때 6.25를 맞는다.
그의 부모는 일제의 억압으로 고향을 떠나 함경도 일대를 전전하며 살았다. 그가 다섯 살 때 해방의 기쁨을 안고 고향에 돌아온 그의 가족은 인공치하의 백성이 되었고, 김일성 무리들의 폭정에 시달리다가 6.25를 맞는다. 6.25가 나던 해 몰래 원산으로 피신했던 부모와 두 동생과 생이별한 그는 전쟁의 한가운데가 되어버린 고향땅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남아 이리저리 피하고 쫓기면서 처절한 전쟁을 목격한다. 그러던 중 나이어린 화곡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원산 일대에 대한 호주 쌕썍이의 공격으로 죽었을 것으로 알았던 그의 부친이 1.4후퇴 때 거제도로 피난을 가서 그곳 포로수용소의 정훈교관이 되어 7,000여명의 반공포로를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도록 하고 있었으니! 학교를 세우고 교편을 잡으신 그의 부친은 군인 학부모를 통해 양양 일대의 전쟁터를 수배하여 할머니와 그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거제도를 이산가족 상봉의 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의 기쁨은 잠깐이었지만 전쟁의 아픔은 기나길었다. 화곡은 부산 등지에서 신문팡이로 연명을 했다. 국군과 인민군의 주고받는 격전이 반복됐던 양양일대에서의 명석한 한 소년의 목격담과 그 후 13년간의 처절한 삶의 이야기가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필자는 해방 1년 후 부모님을 따라 탈북 후, 서울 뚝섬의 경동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충북 옥천의 지전국민학교 3학년 때 6.25의 피난길에 올랐지만, 자식들에게 별로 할 이야기가 없었다. 북에 주둔했던 소련군을 본 기억도 없고, 6.25전투 중의 국군과 인민군을 목격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관찰력과 기역력 면에서 대청화곡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진솔한 이야기는 참으로 많은 사실을 일깨워준다. 6.25 이전 인공치하의 삶과 6.25전쟁 와중의 삶, 그리고 거제도 피난민 생활과 청소년기 부산에서의 성장과저을 통한 삶이 그의 확고한 인생관 확립에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을 도처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원한 조국은 대한민국이 되었고, 그의 이상은 애국이 되었고, 그의 가슴은 박애정신으로 충만해 있다. 중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그의 애국정신 발로가 높이 인정되어 대한민국 옥조근정훈장이 수여된 것을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한다.
<대청화곡>과는 인터넷 게시판에서 글을 주고받다가 어느덧 막역한 친구가 되었고, 어느 날 직접 만나 식사까지 나누며 필자보다 생일이 두달 빠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그를 화곡 인형이라 부르며, 밤 늦은 시간에도 서로 격의 없는 전화를 하곤 한다. 그의 이야기가 많은 초, 중, 고등학교 교사 및 학생들과 군장병들에게 꼭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0. 2. 9. 전 국방대학원장 예비역 육군소장 한광덕
머리말
이 수기는 1945년부터 1958년까지의 내 생애 일부의 기록입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어 온전한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남북의 분단을 만났고 급기야는 이북의 김일성에 의하여 저질러진 해괴한 6․25 동란을 겪게 되었던 역사적 아픔이 있습니다.
나는 1950년 6월 25일 이전엔 38선 이북의 공산치하에서 살았습니다. 그때 나의 가족은 형언하기도 어려운 슬픈 삶을 겪었습니다. 6․25가 나던 해엔 이산가족이 되었고 6․25가 난 이후엔 나와 할머니는 동해 중부전선에 남아 공산 인민군과 대한민국 국방군이 대치하여 공방전을 치르는 와중에서 생명의 위험이 경각에 달린 처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1952년 이후엔 이산가족이었던 나와 할머니는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6․25때 헤어졌던 가족과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국민 모두가 다 그랬듯이 우리도 쓰라린 피난민 생활을 하였습니다. 내가 겪은 6․25 동란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992년이 지난 언제인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역사 속에서 이미 다 알려진 진실되었던 사실들이 점차로 왜곡되는 방향으로 부풀려 지고, 있지도 않은 일들이 새롭게 기록되어 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6․25를 생생하게 경험한 많은 이웃들이 당황하게 되었고 나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나는 내가 직접 경험한 6․25 동란 때의 기억나는 일들을 상기하여 여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글을 쓴 목적은 첫째, 우리 국민들 누구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은 반드시 그리고 옳게 찾아서 알아야 하고, 후손들에게는 이를 교육적으로 정확하게 전수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형태의 전쟁도 이 땅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각성입니다. 셋째, 나라를 이끄는 위정자들은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정신으로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모범된 자세를 앞세워야 되겠다는 바람입니다.
처음 이 글의 시작은 2005년 1월 29일부터 5월 6일까지 내가 조선일보 닷컴의 회원이 되어 블로그에 3개월간 연재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연재를 하는 동안에 독자들이 나에게 많은 의견을 주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6․25에 대한 개개인의 경험 이야기가 아직도 도처에서 숨겨져 있는데 이러한 생생한 역사적인 사실이 자꾸 소멸되어 가는 현실에서 나와 같은 생생한 수기의 내용이 반드시 책자로 기록되어 후대에 알려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독자들의 뜻을 소중하게 받들어 기록되지 못한 나의 기억들을 다시 보충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더 보충할 내용을 다듬고 중복된 이야기들을 간추리곤 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내용의 서술이 되지를 않아 심히 송구한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한 사실을 세상에 알림이 더 소중하다는 일념에서 크게 용기를 내어 이 책자를 내 놓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제작하려는 초기부터 망설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각계에서 많은 분들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또 진실 됨을 증거함에 격려도 해주었습니다. 비로소 밝힙니다만 조선일보 닷컴의 운영자님과 관계자님들이 나를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나의 아내와 가족 모두가 하나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글자 한 자 문장 한 구절에 관심을 가져 주었던 두 아들과 며느리들에게 감동했던 마음을 소개합니다.
수필가 김두수님의 문장 작성에 대한 세심한 일깨움 및 수기 내용의 검토와 수필가 김용진님, 시조시인 이정오님의 교육적인 바람과 서석용 박사의 우국의 조언에 감사드리며 수원 가톨릭 사진 작가회 한상국님이 동해안 속초에서 강릉, 부산 그리고 거제도까지의 여정을 통하여 우정 어린 촬영 동행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이 책이 나오기 처음부터 나의 부족한 점을 내치기에 앞서 더욱 격려하며 나라사랑의 열정으로 이 책자를 펴내어 나의 뜻을 기려 주신 명문당 김동구 사장님의 따뜻하고 우정 깊은 마음에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표지부터 본문 활자 그리고 사진 배열에 이르기까지 전체 구성을 빈틈없이 이루어 주신 도서출판 팬더북 채희걸 사장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아울러 전체적인 제작을 주관하여 주신 양승웅 부장님의 배려에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2007년 6월 20.화곡(華谷) 김찬수 식(識)
차례
1. 귀향(歸鄕) / 12
2. 인공치하(人共治下) / 14
3. 아버지의 설악산 잠적 / 28
4. 감시 대상 우리 집 / 28
5. 깊은 밤중에 본 아버지 / 30
6. 금강산 수련과 아오지 탄광 / 31
7. 고향에 남은 할머니와 나 / 36
8. 김일성의 기습남침 / 42
9. 양양 군청 철수 이동 / 49
10. B-29 항공기의 강현 역과 철다리 폭파 / 54
11. 낙동강 패잔병 인민군의 퇴각행렬 / 57
12. 1950년 10월 1일―나의 태극기 사랑 / 60
13. 동해 중부전선의 끔찍한 전쟁터 와중에서 / 66
14. 인민군 총사령관 무정 / 71
15. 끊이지 않는 우리 동네의 상흔(傷痕) / 74
16. 인민위원장의 말로 / 79
17. 눈이 많이 온 해 1ㆍ4 후퇴 / 82
18. 설악산 전투 / 87
19. 전쟁 유행병 장티푸스 / 92
20. 소금재 고개 / 95
21. 1951년 최전방 국방군 주둔지 강현면 / 97
22. 양양군 남대천 하류 / 102
23. 비목(碑木) / 109
24. 동해안 삼팔교 / 111
25. 강릉의 피난민 생활 / 113
26. 전방 신병 전투훈련소가 된 복골 / 118
27. 전선야곡(戰線夜曲) / 123
28. 내 고향 진달래 피는 마을 / 127
29. 총기사고 / 132
30. 쌍천(雙川) / 134
31. 아버지의 난중일기 / 144
32. 선영이의 죽음 / 147
33. 거제도 인민군 포로수용소 / 150
34. 포로수용소 폭동과 연초중학교 개교 / 156
35. 재회를 약속한 할머니와의 이별 / 159
36. 부산 거제리 병영의 하우스보이 생활 / 164
37. 장승포 항에서의 아버지와 만남 / 166
38. 피난민 집합지 거제도 연초면 / 170
39. 생이별한 이산가족 / 175
40. 대한민국이 배척하는 마르크스 레닌 사상 / 176
41. 할머니 거제도 도착, 이산가족 상봉 / 179
42. 명견 에쓰와의 만남 / 183
43. 할머니의 발병과 동생 선심이의 사망 / 184
44. 한 많은 내 할머니의 애환(哀歡) / 189
45. 아버지의 가정교육 / 192
46. 절약정신 / 193
47. 가고파 / 197
48. 고현 미군부대 위문 활동 / 200
49. 친구 영희 언니의 애절한 이야기 / 204
50. 기초학업 손실 / 207
51. 학습 불안심리 / 209
52. 상담 심리치료 방식으로 학업 상실감 해소 / 211
53. 우선해야 할 교육풍토 확립 / 213
54. 아버지의 용단 부산으로 이사 결정 / 215
55. 명견 에쓰와의 이별 / 219
56. 자갈치 시장과 청구중학교 / 223
57. 학습 지진아 열등생 / 227
58. 멍드는 동심 / 231
59. 깡패천국 / 234
60. 부산 거인 노장군 / 238
61. 부산 대 화재 / 241
62. 이별의 부산 정거장 / 243
63. 아미동 판자촌 / 244
64. 판잣집 철거 수난 / 249
65. 남동생 웅수 출생 / 252
66. 영도 청학동 후생주택 27호 / 254
67. 내 아버지의 자녀교육(동행) / 258
68. 1955년도(6․25 5년 뒤) 부산 거리 / 262
69. 최의준 선생 / 266
70. 독립운동가 후예 / 269
71. 휴전반대와 영도다리 난간 / 274
72. 대연동 재한 UN 공원 / 276
73. 영도다리 아래 점보는 집 / 278
74. 상표 없는 밀가루 포대 / 279
75. 장갑송 아저씨의 피난 이야기 / 281
76. 원산 형무소 / 289
77. 친구 김승엽의 피난 이야기 / 292
78. 친구 이영일의 1․4 후퇴 직후 피난 이야기 / 297
79. 오신혜 선생님 / 300
80. 서부영화 / 309
81. 사춘기 / 312
82. 신문배달 고학생 / 317
83. 부두 노동자 / 322
84. 막내 여동생 선옥이의 출생 / 326
85. 한찬식 선생님 / 327
86. 영도 고갈산 / 331
87. 학창시절 나의 애국심 / 334
88. 좌파괴수 김일성의 종교탄압 / 337
89. 전쟁고아 / 343
90.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 345
후기 / 349
댓글목록
bananaboy님의 댓글
bananaboy 작성일소중한 연재 감사합니다. 관심있게 보겠습니다.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저도 bananaboy님과 뜻을 같이 합니다
더군다나 한 소장님께서 추천사를 쓰셨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