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호외는 가짜 김일성을 진짜로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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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탈로즈 작성일10-09-13 00:40 조회3,598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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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진짜였다면 북한에 들어올 때부터 인정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정받을 수도 없었고 인정해서도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나 김일성은 김성주로 알고 당연시 했었는데 친북좌파 정권 10년 동안 보천보 전투의 주역을 김성주(가짜 김일성)로 굳히기 해버렸던 것입니다. 친북좌파들은 대학가를 벌겋게 물들인 후 언론을 비롯 국사역사학계와 국문학계통 그리고 문화연예 계통에 공을 엄청나게 들였는데 그렇게 했던 가장 큰 이유가 이승만 박정희를 폄훼하기 위함이었던 동시에 가짜 김일성(북한의 유훈통치를 한다는 죽은 주석)을 진짜 김일성을 조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보수우파라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러려니 하는 종자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전 그런 사람들을 보면 한마디로 환멸을 느낀다는,,, 아예 강만길 문하로 들어가서 엉덩이 문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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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인 글이 또렷하지 않으므로, 또렷하게 보시고 싶은 분들은 http://gall.dcinside.com/list.php?id=news&no=1329801로 들어가서 보세요.
이 름 | 좌빨척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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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사과문]김일성 장군님의 보천보전투의 업적을 부정한것을 반성합니다. | |||||||||||||||
김성주의 김일성 행세 전모.JPG 보촌보전투 DNKF00045652_2.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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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2월 19일 보천보 전투의 지휘자는 김일성이 아니였다?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 실제 독립군도 아니다. 蘇, 북한공산정권수립 이용 목적으로 김성주를 김일성장군으로 둔갑시켜... 박갑동씨, 당시 사건으로 복역한 박달·박금철이 김일성 장군아니라고 증언 일본 육사출신의 보천보 항일투쟁의 주역 실제 김일성 장군의 본명은 김광서 (함경남도 북천군태생 1887 ~1937년 11월 전사) 현 정부의 치적만을 국정교과서에 기술, 역사교과서 검정위원 선정 형평성 문제 등으로 비난의 대상이 돼온 교육부가 이번에는 북한 김일성의 대표적 항일무장투쟁으로 북한이 대대적으로 선전해 온 보천보 전투를 한국 근 현대사 검정 통과본 역사 교과서에 실어 비판이 일고 있다. 파문의 이유는 보천보라는 말 자체가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을 상징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 주도했고 항일무장투쟁 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북한의 인기있는 대표적 대중악단 이름이 바로 보천보경음악단이고 보천보햇불상체육대회와 같은 명칭의 사용에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김일성 우상화의 일환으로 거짓조작된 것이다. 이에 대해 실제 보천보 전투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김일성장군을 연구하다 3년전 타계한 이명영 교수 (전 성균관대 정치학 교수)는 그의 저서 ‘김일성 열전’(1974년 출간, 신문화사)을 통해 북한의 조작사실을 밝혔다. 이 교수는 저서에서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육사 출신의 본명이 김광서라는 사람”이고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정권이 해방후 북한의 공산정권수립에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명도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소련의 지휘하에서 훈련받았던 만주의 공산유격대 출신인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이고, 북한에 들어와서 처음엔 김영환(金英煥)이란 (變名)변명으로 행세했었다. 이후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멤버들에게 김성주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로 하여금 김일성으로 행세케하여 김성주가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87)씨는 “연설에 앞서 스치차코프 점령군사령관(대장)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77)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치차코프는 여기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 며 역설해 소련도, 김성주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던 셈이라고 덧붙였다. 김성주가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이 있다. 증언의 주인공은 ‘김일성 평전 속(續)’을 내며 김일성을 연구하고 있는 허동찬(70·현 고대 북한학과) 전임강사다. 재일동포로 조총련의 일본내 조선대학에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가르친 바 있다. 허교수는 “보천보 전투 후 김일성장군을 뒤쫓던 일본군이 그해 11월 무송현에서 그가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며 “그 후 4개월 뒤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다시 나타났는데, 이 사람이 평소 우쭐대기 좋아하는 성격의 김성주였다”고 말했다. 또 1945년 해방신문의 기자로 동란 후 월북, 북한 외무성의 국장까지 지냈던 박갑동(82)씨도 있다. 그는 “평양에서 있었던 김일성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박달과 박금철에게 확인시켰더니, 사진속 인물이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했다”며 “박달과 박금철에 관해서는 보천보전투의 일본측 판결문인 ‘혜산사건 판결’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위와같은 증언과 기록들은 북한에서 주장하는 김일성의 보천보 항일투쟁 선전이 조작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戰犯者 김일성은 독립운동가 김일성 아니다 >> 증언-김허남 金許男 전 함북도민회장 필자는 1920년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허의동 백상촌이란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길림성 명월군 도무거이 촌에서 소학교 교사로 만3년 간 근무하다가 해방되던 1945년에 고향인 허의 소학교로 전임해와 근무했다. 필자는 이곳에서 우리 민족에게 분단의 아픔을 준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북간도 일대서 가장 존경받던 독립군 장군이 애숭이 소련군 소좌로 나타나 시민들 어리둥절 30대 애숭이 戰犯者 김일성 독립운동가로 변신 독립군 장군의 허상 일순간 산산이 깨져 “김일성이 아닌데” “입 꽉 다물고 있어” 그 당시 북간도 일대에 산재한 한국 사람들의 관심사와 분위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과거의 삶을 밝히는 것이다. 북간도에 살던 사람들은 드러내 놓고 내색은 않았지만 대부분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돕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기에 독립운동가들의 동태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해졌다. 항일 전사 김일성 장군 및 소련군 환영 시민대회를 10월 14일 10시에 평양 모란봉 운동장에서 개최한다는 벽보가 나붙고 선전 삐라가 산골 동네까지 흩날렸다. 나는 만사를 뒤로 미루고 평양 시민대회에 참가하기로 작정했다. 함경북도에서 평양까지 교통과 숙식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평양 시민대회에 참가하기로 작정한 것은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내 나이 또래의 아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에 관심을 가졌고 또 갖가지 풍문을 들으면서 자랐다. 특히 김일성 장군에 대한 것은 좀 남달랐다. 소학교 때는 김일성 장군이 백전 백승의 영웅적 인물로 부각되었고 때로는 도술마저 자유자재로 부리는 초능력자로 믿었고 또 흠모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어린 우리들에게 존경받는 독립군 장군은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김일성 장군, 김구 선생이었다. 그 당시 내가 4학년을 담임했는데 학생의 학부형 중 한 분이 여자 몸으로 김일성 부대에서 활동하다가 부대가 해체되니 이상하게도 일본군에 투항하여 협조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나와 동성동본이면서도 항렬도 같아 누님 아우로 호칭하면서 인간적인 정분과 교분을 쌓고 흉허물 없이 지냈다. 그녀가 김일성 부대의 실체에 관해 속 마음을 털어놓은 것은 거의 1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녀가 처음 김일성 부대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게 된 동기는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그의 오빠가 김일성 부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 부대에 오빠의 심부름으로 몇 차례 오고 가다가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 했다. “누님, 김일성 장군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봤어.” “연세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정확히는 몰라, 아마 60은 조금 넘었을 거야. 그런데 김일성 장군이 어디 한 두 사람이어야지…” 그녀는 내 물음에 답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나로선 무슨 뜻인지 몰라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김일성 장군이 또 있단 말입니까?” 환영시민대회의 사회자가 긴장된 쇳소리를 내며 빠른 어조로 말했으나 군중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어정쩡한 박수 속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나로선 김일성 장군이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란 사실이 의외였다. 내 학부형의 말로는 60세가 넘었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기대했는데 아주 새파란 젊은이가 나와서 내가 김일성이요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내 우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세상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백발이 성성한 백전노장을 기대했는데 전혀 의외의 사람이 나섰으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람은 30대 초반에 165cm가 조금 넘게 보이는 키에 살집이 약간 붙었고 좀 작아 보이는 듯한 감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는지 검게 보였는데 감색 양복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뒷머리를 버쩍 치켜 그 사람은 몸 어느 구석에서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의 티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미리 써 가지고 나온 원고마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더듬거리자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한층 더 실망했다. 나는 이 사건 이후 나보다 10여세 연장이고 9촌 숙부가 되는 김동철이라는 사람에게 김일성 장군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내가 그 사람에게 김일성 장군의 정체를 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연령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1920년생이고 모란봉 운동장에 나타난 김일성은 1912년생이다. 그렇다면 나보다 8살이 더 많은 김일성이 그런 큰 독립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소학교 1학년 땐 7~8세 정도였는데 그 때 당시의 김일성 나이가 15~16세 정도이다. 그런 어린 나이에 과연 독립운동의 지휘자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들었던 김일성 장군과는 연령차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내가 그 분에게 김일성 장군의 정체를 물은 것은 그 분이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나중에 최고재판소 소장까지 지낼 만큼 김일성 일파의 골수분자였기 때문이다. 대답은 짤막했다. “살고 싶으면 입을 꽉 다물고 있어. 쓸데없이 지껄이고 다니다간 쥐도새도 모르게 없어져.” 그 분의 강압적인 어조와 중압감을 주는 낯빛 때문에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평양시 모란봉 운동장에서 거행된 환영대회 이후아주 앳된 김일성 장군이 생겨났고 그로부터 우리 민족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1945년 10월 14일부터 33세의 애숭이 소련군 소좌가 항일전에서 백전백승한 위대한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했고 ‘경애하는 어버이 수령’으로 변모한 것이다. 평양 모란봉 운동장에서 태어난 김일성 장군이 북한 땅을 호령하면서 분단과 동족상잔이란 민족사의 비극을 연출했으며 오늘까지도 한반도 북쪽에서 독립투사 김일성으로 또 북조선 인민의 어버이로 군림하고 있는 실체이다. 김일성, 보천보, 조작 출처:보천보 전투의 지휘자는 김일성이 아니였다? 보천보전투 [普天堡戰鬪] 요약 동북항일연군 가운데 김일성이 이끄는 일부 병력이 1937년 6월 4일 함북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 일대를 잠시 점령한 사건. 언제 1937년 6월 4일 어디서 함북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 누가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 백두산지구 유격구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군 무엇을 일제 관공서 어떻게 공격 후, 포고문과 격문 살포 왜 항일 투쟁 본문 당시 백두산 일대 조선과 중국 간의 국경지역인 장백을 중심으로 항일투쟁활동을 벌이던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보천보에 침투하였다. 그들은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조선민중에게 알린다,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등의 포고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물자를 노획하였다. 이때 일경 7명이 죽었으며 여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탄압이 극심하였던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크게 보도되어 조선인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고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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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를 갔던 이유가 사실은 항일을 하기 위함이었고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편입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만주군에 배속된 후 군 기밀을 김구의 임시정부로 빼돌리는 등 활약했다고 증언한 사람은 꽤 된다. 문경소학교에서 부터 박정희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한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대구사범 때는 친일을 요구하는 시험을 백지로 제출해서 우수한 수학 등의 성적임에도 석차가 최하위권이었다고 한다. 과목을 포기해도 그정도면 실제능력은 상위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짜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의 그 진짜 김일성이라고 증언한 사람은 딱 한 명이었는데 그가 바로 김창영이다.
< 일제 때 총독부 군수·경시 등을 거쳐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에서 항일운동가들의 귀순공작 및 토벌 책임자를 지낸 김창영(金昌永·1890∼?)이란 친일파가 있었다. 친일파 연구자들에게도 생소한 이 이름은 지난 93년 도서출판 다락방에서 <반민특위 재판기록>을 영인본으로 출간하면서 처음 알려졌다. 반민특위가 본격 친일파 검거에 나선지 3개월 만인 1949년 4월 반민특위에 체포돼 재판을 받은 김창영은 그 달 16일 반민특위 충청북도 조사부에서 제2차 피의자신문 때 신정호 조사관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신 조사관 : 귀순공작의 계획, 내용을 말하라.
김창영 : 길림성 돈화현 진한장(양정우 부하, 제5사단장) 귀순공작의 실패를 거울삼아 김일성 귀순공작은 특히 신중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종락, 박차석으로 하여금 김일성 부대가 잠복할만한 신간 촌락 일원을 순회하며 두 사람의 서신과 사진을 살포하여 김일성과의 연락을 취하였던 바, 약 3개월 후 몽강현 두도화원이라는 촌락에 거주하는 농부를 이용하여 김일성 부대로부터 반신(返信)이 왔었습니다.
신 조사관 : 전술한 김일성이라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김창영 : 현재 평양에 있는 김일성으로 인정합니다.
반민특위 재판정에서 나온 '김일성의 항일운동'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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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김일성 항일운동', <동아> 호외가 증거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854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61829 >
위 인용 기사의 동아일보 호외는 가짜 김일성(김성주)을 진짜로 단정할 만한 증거가 못된다. '1998년 10월 동아일보가 평양에 취재단을 보냈을 당시, 김일성 주석의 대표적 항일 투쟁 소식을 전한 1937년 동아일보 원판을 순금으로 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물'한 그런 의미 외엔 없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기사에도 인용되는 내용 아닌가. ㅡ_ㅡ
딱 한 사람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다. 김창영이라는 사람은 죽은 해와 날짜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김창영이 김성주가 진짜라고 한 진술은 "현재 평양에 있는 김일성으로 인정합니다." 뿐이다.
수상한 점은 1993년에 도서출판 다락방에서 <반민특위 재판기록>이라는 영인본을 낸 경위다. 박정희의 친일 사진이라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시했던 박정희의 기록(만주의 신문)에도 조작의 의혹이 강한데 한낱 강만길류의 객관적이지 않은 친북좌파들이 제시하는 자료들을 믿으라고 ...
반민특위 자체에도 의혹이 많다. 반민특위에 북한의 사주를 받은 인물들이 너무나 많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반민특위를 내세우는 것 자체부터 공신력을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북한 내각부터 친일파 투성이에다가 남쪽에서 마저 친일파 출신이면서 당시 북한의 편을 드는 세력들은 의도적으로 제외시켜줬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친북좌파 세력이 포함된 반민특위를 인정해주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현재 평양에 있는 김일성으로 인정합니다라고,
참 살다 살다 별 꼴을 다 본다.
(정 가짜라도 진짜 대접받게 하고 싶으면 박정희의 더 확실한 독립운동 경력부터 인정하라, 제발 조작은 그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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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좌파들이 김창영이라는 별 볼일 없는 인물을 위키백과로 포장해 놨군요.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C%B0%BD%EC%98%81_(1890%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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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영 (1890년)
김창영(金昌永, 일본식 이름:金光昌永, 1890년 ~ 1967년 4월 2일)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 겸 경찰 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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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편집]
평안북도 강계 출신이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의 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유학했다. 교토 시의 리츠메이칸 대학 법과를 1916년 졸업했다.
귀국한 후 강계에서 면장에 임명되면서 관직을 시작했고 1921년부터는 강원도 경찰로 옮겨 근무하면서 경시(警視)로 승진, 금산군 군수도 거쳤다. 군수 직책을 맡고 있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1][2]
중일 전쟁이 발발한 직후 만주국의 치안부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만주국에 파견되었다. 무장 독립 운동 세력이 남아 있던 만주국에서는 치안부가 항일 군대의 귀순, 토벌 공작을 담당하고 있었다. 김창영은 이 곳에서 양정우 부대원 7백여 명을 귀순시키고, 임수산, 오성륜, 박득범, 김백산 등 수백여 명의 항일 세력을 체포 또는 사살하는 공적을 기록했다.
1943년 전라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영전하여 귀국했으며 이후 광복 시점까지 전라남도 광공부장 등을 지내면서 전남 지역에서 군수품과 전쟁 지원을 담당했다. 미군정 하에서도 서울시장 격인 경성부윤을 3개월간 맡았다.[3]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을 거치면서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 탄압 사실이 드러났고, 공민권정지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1949년 반민법정에서의 김창영의 진술은 김일성 가짜설의 중요한 반박 근거로 사용된다.[4]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은 시점에서 만주지역 항일 세력 귀순 공작 책임자로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김창영이 한 공식 발언이기 때문이다. 김창영은 재판정에서 지금 평양에 있는 김일성과 만주 항일부대의 김일성이 같은 인물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답변했으며, 김일성 부대에 대한 귀순 공작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증언했다. 김창영의 귀순 공작은 김일성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자세하게 기술한 바 있다.[5]
~~~~~~~~~~~~~~~~~~여기는 김창영의 사망 시점이 정확하게 나와 있군요. ???
김창영에 대한 위키백과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김창영 귀순공작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는데 김일성 회고록이 객관적인 사료적 가치로 인정받을 수나 있다는 말인가? 정상적인 환경이라면 말이다.
김창영의 행적을 김일성이 회고해서 증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자칭 중요한 반박 근거
<<<<1949년 반민법정에서의 김창영의 진술은 김일성 가짜설의 중요한 반박 근거로 사용된다>>>>-위키백과
매우 중요한 쟁점입니다. 사람 한명이 독립운동을 하고 안하고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대한민국 역사 전체에서 정통성을
좌지우지 하는 심각한 문제이므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가짜 김
일성의 독립운동 조작 규명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추가
(펌)
친북좌파들의 상투적 선전선동술중 북한은 남한과 달리 철저히 친일청산이 이루어져 민족정기를 살렸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임을 나타내는 소중한 자료임.
●김일성 내각
김영주 - 북한 부주석, 북한내 당시 서열 2위, 김일성 동생 (일제 헌병 보조원)
장헌근 -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 남조선 로동당 서열 2위 (친일단체 "대화숙" 가입, 일제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정국은 - 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친일밀정, 즉 일본간첩출신)
김정제 - 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하 양주군수)
조일명 -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 - 북한 부수상 (일제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 활 - 북한 인민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허민국 - 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강치우 - 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최승희 - (일제하 친일단체 예술인 총연맹 회원)
김달삼 - 조선로동당 4.3사건 주동자 (일제 소위)
박팔양 - 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친일기관지 만선일보 편집부장, 문화부장)
한낙규 - 북한 김일성대 교수 (일제하 검찰총장)
정준택 - 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하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
한희진 -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 함흥철도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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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多......數......
●이승만 초대 내각.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 -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 항일변호사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 광복군 참모장
외무장관 장택상(張澤相) -일제시대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된 경험
내무장관 윤치영(尹致暎) -일제시대 때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재무장관 김도연(金度演) -3.1운동에 앞선 2·8독립선언을 주도하여 투옥
법부장관 이인(李仁)- 항일변호사
국방장관 이범석(李範奭)씨가 겸임
문교장관 안호상(安浩相)씨는 철학교수였습니다.
농림장관 조봉암(曺奉岩)씨는 공산당에서 전향(?)한 사람
상공장관 임영신(任永信) 독립운동가이고 교육가
사회장관 전진한(錢鎭漢) -일제시대에도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
교통장관 민희식(閔熙植) -교통전문가였습니다.
체신장관 윤석구(尹錫龜) -교육 사회운동가였습니다.
무임소 장관 이청천(李靑天) -광복군 총사령관이었습니다.
무임소장관 이윤영(李允榮)- 북한에서 항일 기독교 목사로 일했고 조만식 선생의 제자
국회부의장 김동원(金東元)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 이 분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
이상 19명 모두 독립운동가 출신
http://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free_board&page=6&sn1=&divpage=20&sn=on&ss=on&sc=on&keyword=흐훗&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85809
사죄도 참회도 모르는 파렴치한 <조선>, 그 비뚤어진 입 다물라
[오마이뉴스 정운현 기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48122
==>이북에서 온 사람도 아닌 것이 "다물라"가 뭔가, 김정일이 연단에서 "~~~영광 있으라(인민군이나 인민들에게)"라고 하지 않나, 사극에도 그런 표현이 나오기는 하더라만 어쨌든 완전 북한식 제목 ㅋ
내용을 보면 김일성은 인정하고 싶고 박정희는 한도끝도 없이 폄훼 폄하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 못함을 느낄 수 있음, 파렴치한 정운현, 친일파 놀음을 통해 대한민국 애국세력을 제거하려는 놈들 민족문제연구소와 한패, 조선일보의 흠이 백이면 김일성 김정일의 죄업은 억만겁이다. 연좌제여 부활하라, 이런 놈들이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는지 백일하에 드러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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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훗님의 댓글
흐훗 작성일
"김일성은 침착하고 식견있는 학생(?)"
"고등학교 시절의 김일성은 매우 조숙한 학생이었다. 성주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다부지고 총명했다. 침착하고 식견이 있었으며 무엇인가 깊은 민족적 한이 가슴 밑바닥에 서려있는 것 같았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 가운데 이 김성주라는 학생이 가장 인상깊었다."(김일성의 국어 교사 '상월'의 증언 인용)
도올 김용옥의 뜨거운(?) 김일성 예찬론
written by. 김필재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7128&project=
'김일성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엄마 아버지 다 자식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엄마는 어린 김일성이 목사설교가 재미없다고 교회 안 가겠다고 하면 마음대로 하라 하고는 예수 믿는 것보다 나라 위해 큰 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엄마는 (김일성이) 왜 교회를 가느냐고 물으면 "죽은 후에 천당 가서 뭐하겠니 사실은 좀 피곤해서 쉬자고 간다"고 말했던 온화하고 조용한 여성이었다.'--조작의 향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