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폭도들이 광주 방송국들에 방화한 이유)
You Tube
happydaery — 2010년 02월 13일 — 1980년 5월 20일 민간인 한 명, 군경 5 명 사망했다는 아주 정확한 뉴스였다. 그날 시위대 차량에 깔려 군인 한 명과 순경 4 명이 사망했다. 오후 6시 그 뉴스가 방송되던 시점에 그 날의 시민 사망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더구나 그 시민도 광주사태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폭력 사고로 사망하였던바, 그 가해자는 조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폭도들은 불순세력이 유포한 악성 유언비어대로 방송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광주 방송국들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김대중 조직의 간부가 "전라도 새끼들 한 일만 명 죽여버린다"고 그랬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린다.(5월 20일 금남로)
+
폭도들한테 얻어 맞고 얼굴을 닦는 국군의 모습(上千人的示威隊伍)
+
폭도들은 광주 MBC가 유언비어를 보도하지 않고, 사실대로 보도하였기 때문에 방송국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
|
http://www.stouchdesign.com/chinese/tv/Community_show.asp?id=877
자세한 상세정보를 보면 위의 동영상에 대한 이해가 더 쉬울 것입니다.
5월 18일의 유언비어
<광주시내에는 첫날부터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거나 여학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등 기상천외한 유언비어들이 나돌았고, 이 거짓 유언비어를 듣고 흥분한 시민들은 점점 더 많이 중심가로 모여들어 시위대가 공수부대원들에 매맞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더 많은 유언비어가 확대 재생산되어 시위대의 규모를 순식간에 키웠다. 악성 유언비어는 분노와 폭력을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으며 광주의 첫날에 퍼진 유언비어는 다음과 같다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진압작전을 시작했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러 왔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을 이틀씩이나 굶기고 술과 환각제 등을 복용시켜 광주에 투입했다.
도청 앞에서 시민들이 다 죽어간다.
공수부대원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
죽은 시민을 불도저로 밀면서 처리하는 과정이 TV에 나왔다.
공수부대원이 광주에 들어오면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죽일 것이다.
대검으로 시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냈다.
출처: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2권(4권 중) 109쪽~ 110쪽>
5월 19일의 유언비어
<유언비어의 수위가 더욱 높아졌고, 시위대는 시체를 끌고 다니면서 시민들을 선동했다. 계엄군은 포위되어 매타작을 당해 빈사상태에 이르고, 계엄군이 소지했던 M-16 무기들이 피탈됐다. 다급한 상황에 몰리게 된 계엄군 장교들은 누구의 명령도 없이 단지 살기 위해 공포탄을 발사했고, 발포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모란봉의 꽃으로 불린 전옥주라는 여인 등 몇 명의 여인들이 확성기를 들고 시내를 누비고 다니면서 애끓는 목소리로 시민들을 선동하고 동원하는 방송을 했다. 이날의 유언비어는 전날보다 더 다양하고 자극적이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 죽이고 있다.
경상도 군인이 와서 전라도 사람을 쑥밭으로 만든다.
공수대원이 이화여대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3명의 팬티와 브라자까지 모두 찢어내고 구둣발로 엉덩이를 찬 후 대검으로 등을 찔러 죽였다.
공수대원이 광주 수창고등학교 앞 전봇대에 산사람을 거꾸로 매달았다.
5월 18일 40명의 시위학생이 죽어 금남로가 피바다가 됐다.
공수대원들이 젊은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고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 개 몇 마리 잡았느냐고 농담을 한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김대중을 잡아 죽이고, 전라도 사람을 몰살한단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삼립빵 트럭이 시체를 실으려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부녀자의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니 참을 수 없다.
출처 :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2권(4권 중) 150쪽~151쪽>
5월 19일의 유인물
<17:30분, 금남로 2가 가톨릭센터 앞에 시위대 200여 명이 집결하자 공수부대는 장갑차 2대를 앞세워 해산시켰고, 공용터미널에 1,000여 명, 금남로에 2,000여 명이 집결했지만 계엄군의 강력한 진압으로 해산됐다. 이 때 1,000여 매의 유인물이 살포되어 시민을 자극했다.
학생 시민은 궐기하라.
경상도 군인들이 와서 광주를 쑥밭으로 만든다.
경상도 차를 보면 불을 질러라.
17시 30분경에는 가톨릭센터 앞에서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계엄군의 장갑차를 포위하고 투석과 폭행을 하여 장갑차에 타고 있던 병사가 겁에 질려 도망을 가고 이 과정에서 계엄군 1명이 중상을 입고 장갑차와 계엄군이 소지하고 있던 M-16이 또 피탈되었다. 5월 19일 벌써 3정의 M-16소총이 피탈당한 것이다. 19:45분, 시위대는 유동에 세워진 석탄절 봉축 대형 아치에 불을 질렀고, 중흥동 광주터미널 부근 청과물 시장에서 경남번호판을 단 화물차 1대에 불을 붙여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시켰고, 이어서 북구청에 돌을 던지고, 누문파출소, 역전파출소, 임동파출소, 양동파출소를 공격한 후 방화했다. 21:00시, 시위대가 역전파출소를 다시 점령하고, KBS 광주방송국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했다. 이 때 33대대가 광주역에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경찰과 함께 북구청 주변에 위치한 빌딩, 여관, 다방, 주택가를 뒤져 방화용의자 13명을 검거했다. 23:00시, 누문파출소와 양동파출소에 경찰과 96연대가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이 때 서방주유소 근방에 있던 시위대 2,000여 명이 군`경의 저지로 해산하는 과정에서 주유소 휘발유 9,500리터를 탈취해 갔다. 이날 밤 35대대와 61대대는 공용터미널에서 숙영했고, 61대대는 이튿날 새벽 05:20분에 전남도청 앞으로 이동했다. 19일 오후 내내 지속된 시위는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 밤 11시에 접어들면서 점차 조용해갔다.
계엄사는 시위가 불길처럼 확산되고 시위양상이 격화일로를 치닫자 1개 공수여단을 더 증파하기로 하고 , ~~~~
출처 :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2권(4권 중) 170쪽~171쪽>
5월 20일의 유언비어
<20일 오전에는 공수부대가 대거 이동하여 배치되는 시간대였기 때문에 그 위력에 눌려 시민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공수부대가 배치되고, 부동자세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오후부터는 시민들이 대거 운집하기 시작했다. 이 때 시내에는 아래와 같은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죽은 인원이 수십 명이다.
공산당도 이렇게 무자비하지는 않았다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다.
차에 타고 있는 젊은 사람을 무조건 하차토록 강요하고 불응자는 대검으로 귀를 잘라버렸다.
가가호호 수색하여 학생이면 무조건 구타하고 연행했다,
도청 앞에 대규모 시위가 있다.
광주은행 앞에 끌려온 사람들 신발 30족이 전시됐다.(이는 사실임)
시위학생을 태운 운전기사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출처 :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2권(4권 중) 179쪽>
5월 20일의 사망자수
<이날 발생한 사망자수는 군인 1, 경찰 4, 학생 1, 민간 4명이었고, 물적 피해로는 차량 41대 (파손36, 방화 5), 파출소 6개 전소, KBS 파괴, MBC 전소, 임동우체국 전소, M-16 2정이 피탈되었다. 일반국민들은 광주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5월 20일 하루에 발생했던 상황과 피해를 보면 오히려 군경이 포위되어 차량돌진, 불타는 휘발유, 돌, 쇠파이프 등의 살인무기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수모를 겪고 피해를 당했던 것이다. 시위대는 파출소, 세무서, 2개 방송국, 차량 등 국가재산을 마구 파괴했고, 계엄군은 이러한 파괴를 막기 위해 피를 흘린 것이다. 성난 10만 시위대에 계엄군은 모두 전라도 사람들을 청소하러 온 경상도 폭력배로 보인 것이다.
출처 :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2권(4권 중) 175쪽>
5월 20일의 폭동 양상과 공수부대 상황 일례(一例)
<3공수 13대대 9지역대장 이상휴 대위의 증언(육본 역사자료집)
5월 20일 밤, 무전기를 통한 첩보는 충장로에서 많은 데모 인원이 당 지역대가 있는 곳으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인솔한 64명의 부대원들(사병 53, 장교 11)이 도청 쪽 도로를 가로막았다. 300여 명이 데모 군중이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지역대장으로서 메가폰으로 "선량한 시민 여러분, 자제하시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라고 방송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데모 군중은 반응이 없었다. 인도에는 선량한 많은 시민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대대장에게 보고했더니 명령이 떨어졌다. "충정대형을 갖추어 해산시켜라.
이때 돌을 맞아 쓰러진 병사가 4명이었다. 우리는 신음하는 병사들을 병원으로 후송도 못 하고 인도에 눕혀 놓아야 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광장 중앙에 8톤 트럭이 한 대 서 있고 사람이 몰려 웅성거렸다. 알고보니 석축용 경치석이 실려 있었고 경남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이었다. 폭도들이 운전사, 조수를 끌어내려 때리고 발로 차고 밟고 하여 두 사람이 현장에서 죽었다. 갑자기 차에 불이 붙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타이어 터지는 소리에 시민과 폭도들이 괴성을 질렀다. 앙상한 차체만 남았다. 갑자기 시내버스, 택시들이 술래잡기를 했고 어떤 기사는 인접택시를 발로 차고 버스를 차고 하여 싸움이 붙었다. 자기들과 같이 차량 시위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그랬다.
광주시청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광주시청으로 향했다. 500미터 전방에 이르니 대학생 4~5명 정도와 초등학생 500여 명이 횃불을 들고 도로 중앙에 돌을 중간 중간 많이 모아 놓고 던지고 있었다. 방독면을 착용하고 가스탄(최루탄)으로 분산시킨 다음 시청에 들어갔다. 가보니 유리창 출입문은 다 깨지고 부서져 폐허와 같았다. 점령 보고를 대대장에게 했다. 그 순간 500여 명의 학생들이 돌을 던지면서 시청을 포위했다. 옥상으로 밀려 올라갔다. 옥상에서 가스탄으로 대항했지만 결국 가스탄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대대장에게 무전기로 "지역대가 포위되었으니 증원을 요청합니다"하고 보고해 대대가 도착했다. 그들도 역시 포위되었다. 그래서 여단의 가스발사통의 지원을 받아 무사히 시청을 빠져나와 광주 역전에 이르렀다. 이때 3공수 전대대가 역전에 집결해 있었다. 그 시간에 폭도들이 아세아 자동차 공장의 군용 차량들을 탈취해 운전하면서 도로를 질주하며 돌아다녔다. 감히 도로로 나올 수 없었다. 이때 폭도들이 운전하는 아세아 자동차 생산 군용 트럭이 3여단 16대대장 지프차를 고의로 충돌하여 운전병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대대장은 무사했다.
같은 시간, 폭도들이 탈취해 운전하고 다니던 광주 고속버스가 역 앞 광장에 전복되어 있었다. 폭도들은 군용트럭을 운전하다 액셀러레이터에 돌을 얹어 놓고 뛰어내려, 트럭이 마음대로 방향을 전환하여 병력을 다치게 했다.
이때, 한 여고생의 가두방송 차량이 판을 치며 돌아다녔다. 이 소리를 듣고 동조하지 않는 시민이 없었다.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2권(4권 중) 206쪽~208쪽>
-------------------------------------------------------------------------------
[오늘과 내일/박성원]퇴장 요구받는 ‘올드 보수’
지난달 26일 국방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외교통상 통일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대상 천안함 설명회가 열렸다.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극적으로 건져올린 북한 어뢰의 추진체에 대한 브리핑을 마칠 시간이 되자 “더해도 되는데…”라며 아쉬워했다. 근거 박약한 좌초피로설이니 미군오폭설이니 하는 괴담을 일거에 쓸어낼 수 있는 증거물이었다. 북한의 소행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 앞에 군(軍)보다 더 들뜬 곳은 한나라당이었다. 이윤성 의원은 “다행히 천안함사태가 인천 앞바다(에서 일어났)다”라고 실언을 했다.
아무리 좋은 노래도 2절까지 부르면 싫증내는 사람도 나온다. 유권자들은 한나라당의 ‘천안함 기대기’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반공을 편리한 집권도구로 써먹던 냉전시대 ‘올드보수’가 떠올랐다. 군대 안간 젊은 세대는 야당의 ‘전쟁이냐 평화냐’식 정치광고에 더 이끌렸다. 올드보수들의 덜컥거림은 계속됐다. 5·18 기념식장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빼버리고, 80년대 권위주의 시절을 연상케 하는 경찰의 행인 가방 뒤질 권한의 법제화를 추진했다.
인터넷과 트위터를 통해 20, 30대와 소통하지 못하는 올드보수는 젊은 층이 투표장으로 몰려올까봐 겁부터 낸다. 종교단체와 환경단체들은 환경과 복지를 얘기하는데 건설과 성장만 얘기한다. 손님은 자장면도 먹고 싶다는데 음식점 주인은 탕수육이 몸에 좋다며 자꾸 들이민다. 과거 정권의 ‘코드인사’ 적폐를 청산하랬더니 ‘강부자 고소영’ 아니면 대선캠프 출신, 과거 지인(知人)이라는 협소한 인재풀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인사가 되풀이된다.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말뿐이었다. 국방장관 빼고는 군대를 제대로 갔다온 적이 없는 사람들이 청와대 지하벙커에 앉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한다. 고위층엔 군대 못갈 병약한 자제들이 왜 그리도 많은가. “전쟁 나면 우리만 나가서 죽으란 거냐”는 청년들에게 그들의 애국심 부족만 탓할 수 있을까.
진보 쪽은 정권탈환의 진지를 구축하겠다며 정당 울타리를 뛰어넘어 곳곳에서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이익연합체 만도 못한 인상을 주는 보수들은 친이(친 이명박), 친박(친 박근혜) 싸움에 지원유세조차 반쪼가리다. 내 사람 챙기면서 잠재적 경쟁자는 공천에서 밀어내고, 후보단일화는커녕 보수끼리 헐뜯기 바쁘다. 20,30대는 물론이고 역대 선거에서 균형추 역할을 했던 40대까지 야당 또는 무소속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이런 약골(弱骨)로는 정권 재창출은 힘겨운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좌파정권 10년에 환멸을 느낀 국민이 531만 표차로 만들어준 정권이 임기반환점도 못 돌고 비틀댄다면 보수의 불행을 넘어 나라의 불행이다. 철지난 올드보수들은 퇴장할 때가 됐다. 나이가 아니라 정신이, 기풍이 문제다. 이 땅의 보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몸집불리기식 보수대연합이 아니라 썩은 살을 도려내는 보수대(大)개혁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과 세계를 향한 열린 눈을 갖고 국민에게 꿈을 주는 미래지향성, 골목대장식 계파정치를 거부하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헌신성, 자유민주주의 가치인 인권과 민주에 귀기울이고 실질적 복지와 생산적 경제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추진력, 기동성, 기획력, 도덕성. 이런 미덕(美德)으로 무장한 ‘젊은 보수’들이 전면에 나설 때 ‘대한민국 호(號)’는 비로소 선진화를 향한 항로로 들어설 수 있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
==========================================================
[중앙시평] 박정희-김정일-이명박 [중앙일보]
2010.01.14 19:05 입력 / 2010.01.15 01:25 수정
북한 김정일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 2000년 6·15 정상회담 때 그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박 대통령의 경제 발전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통치 스타일에도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그 2년 뒤엔 박 대통령의 큰딸 박근혜 의원을 직접 평양으로 초청하고 더욱 극진한 어조로 아버지를 치켜세웠다.
“김 위원장은 제 부친이 나라를 발전시킨 것에 대해 굉장히 평가하는 얘기를 했어요.” 박 의원의 설명이다. 최근 정부의 한 소식통은 당시 김정일이 서울에 올 경우 박 대통령 묘소를 꼭 참배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고 전했다.
당시도 박 의원은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였다. 이 때문에 그의 방북을 두고 남쪽 대선에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북측의 고도의 정치 쇼라는 등 해석이 분분했다. 그러나 남북 간 경제 격차를 실감하고 있는 김정일의 입장이고 보면 남북 간 경제력을 역전시킨 신화의 주인공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개발 독재로 산업화에 성공한 박정희식 마법을 배워 북한의 헐벗음을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북한이 잇따른 유화적 몸짓을 보이고 있지만 이명박(MB) 대통령은
바위처럼 움쩍 않고 있다. 일부에선 그 이유를 MB가 매파들에게 포위돼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대북 관계에서 원칙을 강조하고, 이벤트성 정상회담은 의미가 없다고 선을 그어온 지금까지의 MB 대북정책은 나름대로 평가받을 만하다. 한반도 비핵화야말로 촌보(寸步)도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인 점도 맞다. 합의했다 파기하고 뒤로는 핵무기나 만지작거리는 도돌이표 회담은 무의미하다는 설명도 설득력이 있다.
그런 단호함에 보수층은 큰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남북 문제를 지금 같은 교착상태로 마냥 방치할 순 없다. 일부에선 북한 내부가 큰 어려움과 혼란상태에 빠져 곧 큰 사태로 이어질 것이라고 점치며 그때까지 대북 강경태도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과 화폐개혁 등으로 어려움이 크다는 사실은 맞다. 그렇다고 북한 정권이 곧 붕괴될 것이란 예측은 북한 내부 사정을 한참 모르고 하는 소리다. 몇십만 명이 아사(餓死)할 정도로 지금보다 더 혹독하던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 시절도 버텨낸 북한이다. 혹 북한이 당장 붕괴한다면 남북 간 국민총소득 차이가 38대1인 상황을 감안할 때 남한엔 끔찍한 재앙이다.
북한 붕괴 시나리오에 대한 만반의 대비책을 강구하더라도 한편으론 남북 관계를 새롭게 펼쳐나갈 활로를 개척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미래를 책임지는 지도자다. 원칙만 강조하며 손 놓고 있는 건 민족사적 관점에서 볼 때 퇴보요 직무유기다.
어쩌면 북한이 궁지에 몰려 있는 지금이야말로 남북 문제에 새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적기(適期)일 수 있다. 특히 김정일의 건강을 고려하면 그가 건재할 때 남북 관계에 일정한 진전을 이뤄야 할 필요성도 있다. 북한 내부에서 신(神)이나 다름없는 김정일이야말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또한
가장 실효적 협상 상대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후계 다툼이 치열할 경우
협상 파트너를 찾지 못해 대화 복원까지 5~1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김 이후 전쟁 같은 최악의 상태를 미리 막기 위해서도 북한을 관리할 수 있는 끈을 확보해야 한다.
남북 간 큰 틀의 로드맵이 필요한 이유다.
남북 정상회담을 거론할 수 있는 지렛대는 무엇보다 MB에 대한 보수층의 믿음에 있다.
사실 지난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이 대화 개시라는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뒷심을 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보수층의 반발이었다. 퍼주기 논란에다 이용만 당했다는 등 매운 비판이 쏟아지며
남은 것은 남남 갈등뿐이었다. MB는 최소한 ‘이용만 당하는’ 회담은 하지 않을 것이란 묵시적 믿음을 심어줬다.
이제 그 원동력을 바탕으로 실적을 만들 때다. 핵 포기를 설득하기 위해서도 회담은 유효한 수단이다.
MB는 또한 김정일이 배우고 싶어 하는 박정희의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장 주역이었다. 한 수 배우고 싶은 상대가 틀림없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동아시아담당보좌관을 지낸 빅터 차도 그런 낌새를 눈치 챈 모양이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김정일은 과거 어느 한국 대통령보다도 비즈니스맨 출신인 MB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진단했다.
화통한 성격의 김정일과 원칙·실용으로 무장한 MB. 두 사람의 만남이 궁금하지 않은가. 예전과 다른 뭔가 실질적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고 기대된다. 연말 서울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에서 한국과 MB의 위상을 한결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도 남북 간 관계개선은 훌륭한 밑반찬이 될 수 있을 것이다.대한민국의 과제가 어디 세종시 문제뿐인가.
허남진 논설주간
허남진
http://article.joins.com/list/list_column.asp?ctg=20&page=1&column_gb=S&name=%C7%E3%B3%B2%C1%F8
<역시 이중성이 문제군요. 김대중이 집권하자마자 확실한 대공요원 580명을 제거했다고 하면 올드보수로 모는 것은 아닌지...>
다만 ‘햇볕정책’을 펼치던 그들의 입에서 안보의 중요성을 듣게 되니 낯설어 보일 뿐이다. 오히려 그들이 ‘햇볕정책’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우리 사회의 총체적 안보불감증을 부른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햇볕정책 자체를 탓하는 게 아니다. 햇볕정책은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의 가능성을 실험해봤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남북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북한 주민 저변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안보태세를 방치한 측면이 없지 않다. 북한으로 향해야 할 ‘햇볕’이 남쪽에만 쪼였는지 옷을 벗어야 할 북쪽은 핵무장의 털갑옷까지 껴입었고 남쪽만 발가벗은 셈이 됐다. 무엇보다 대북 정보체계를 붕괴시킨 책임이 크다. 전직 국가정보원 출신들은 “중국 등에서 활동하던 비공개 정보요원들이 노출되는 등 대북 정보 수집 체계가 사실상 와해됐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대북 정보의 총책임자인 국정원장이 대북 교섭창구의 최일선에 나선 것부터가 잘못이다. 노무현 정부 관계자들은 현 정부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해체한 건 문제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당시 그 기구가 안보 강화 쪽으로 기능했는지, 아니면 북한과의 대화에만 매달렸는지 자문해보길 바란다.
'[허남진 칼럼] 설마가 사람 잡았다'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