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며 부른 독립군가(역사학도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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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탈로즈 작성일10-05-23 12:11 조회4,105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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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 광복군 지하공작 대원들, 즉 비밀광복군 당사자들이 그들이 만주국군 군관 박정희를 접선했었다고 기록하고 증언하는데, 어째서 광복군에 전혀 발을 담근 적이 없는 후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사실관계의 확인없이 광복군 당사자들 및 관계자들의 기록과 증언을 무조건 전면 부정한다면 그것은 광복군 전체를 사기 집단 취급하는 것이다. 광복군은 결코 군단이나 사단 병력의 군대가 아니었다. 초창기에는 50명의 병력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는데, 무엇보다도 군량미가 없었다. 임정의 살림 형편으로는 그것도 큰 일이었다. 그리고 계속 국민당 정부의 보조금으로 군대를 유지하여서는 독립군 위상이 서지 않기 때문에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교회 등 몇몇 해외 교포들이 송금하는 군자금으로 유지하여야 했다. 연합국에 독립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병력이 적었던 광복군이 1944년 7월에 갑자기 세계 최강의 군사강대국 미국의 동맹군으로 격상되었던 이유는 대일본군 첩보전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가 박정희가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되었던 때였다. 모든 장비와 비용은 미국이 담당하기로 하고 미국이 바라는 것은 군사기밀첩보 그리고 첩보전과 게릴라전을 위한 200명의 요원이었다. 이것이 임정에 도약의 기회요, 또한 어려움이었다. 어디서 갑자기 200명을 모병하는가? 유일한 방법은 만주국군 조선인 군관들의 협조를 받는 것이며, 일본군 내 학도병들을 대상으로 모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임무를 김학규 3지대장에게 맡겼다. 이 시기의 독립운동사를 잘 모르는 이들이 박정희가 광복군 중위로 임명받은 과정에 대해 곡해하고 있다. 이미 광복 여러 달 전에 광복군은 승패를 만주국군 내 조선인 장교 접선 및 일본군 학도병을 대상으로 하는 모병에 두고 있었다. 미국의 한반도 상륙 및 침투 작전이 초읽기로 들어간 때에 임정과 광복군으로서는 미국이 원하는 병력 확보가 최우선 과제였으며, 최소 50 명이 4월까지 필요했다. 광복군 당사자들은 그 50명을 박정희가 보낸 것으로 여기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문경보통학교에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다가 불온교사로 찍혀 면직당한 박정희가 만주국에서 어떤 제복을 입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무지한인들과 사기꾼들이 우기는 것처럼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는가? 아니었다. 아래 사진은 만주국군 내 조선인 군관들에게 독립군가를 보급하던 당시의 박정희 소위의 모습을 보여준다. 위 동영상 2:15-2:24 에서 좌파방송은 마치 이 제복이 일본육사 사관생도 제복인양 시청자들을 우롱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일본육사생도가 아니라 만주국으로부터 위탁교육을 받은 유학생이었으므로 일본육사 내에서도 늘 만주국군 군관 복장을 하고 있었다. ![]() 박정희는 훗날 대통령이 된 후에도 만주국군 군관시절 음악을 독립운동에 활용하던 그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다. 월남 파병 때는 "맹호부대"를, 경제 개발을 시작할 때는 "잘살아보세"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여 보급하였으며,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때는 "새마을운동"을 작사, 작곡하여 보급하였다. 아래 동영상에서 우리는 그가 만주국군 군관시절 애창하였던 독립군가가 그가 작사, 작곡한 "나의 조국"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본다. |

해방 후에 바로 시작된 좌우익 대립은 광복군 내에서도 싹트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밤을 새워 사상논쟁을 벌이고 중대장 박정희의 명령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박정희를 중대장동무라고 부르며 시비를 걸어오는 연안계 부대원들의 도전을 받는 일도 있었는데 그때 박정희는 “동무가 뭔가? 내가 자네 동무란 말인가?”라며 반박했다. 그리고 위의 결혼식 참석 이틀 후였던 1945 년 12월 10일 오전 11시 경, 광복군 평진대대는 야외훈련중 무장한 중국군부대의 습격을 받고 전원 체포되고 북신교(北新橋)의 막사까지 연행되어, 부대원들은 모두 해산되고 간부들은 영창에 감금당한다. 몇 시간 뒤 모두 풀려났지만 부대내에 침투한 연안파(延安派 중국 공산당계)의 모함의 결과였음이 판명된다. 이 사건은 광복군의 치욕이요, 군인으로서의 박정희 치욕이었다.
그럼에도 조국을 위한 박정희의 씩씩한 노래는 계속되었다. 군인으로서의 박정희의 가치는 화랑의 옛정신이었다. 독립운동시대와 군사건국기에 필요했던 화랑의 옛정신이 경제건국기에는 새마을정신으로 승화되어야 했다. 그것을 박정희는 그가 작사, 작곡한 "나의 조국"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백두산의 푸른정기 이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의 높은기상 이겨레 지켜왔네
무궁화꽃 피고져도 유구한 우리역사
굳세게도 살아왔네 슬기로운 우리겨레
영롱한 아침해가 동해에 떠오르면
우람할 손 금수강산 여기는 나의 조국
조상들의 피땀어린 빛나는 문화유산
우리모두 정성다해 길이길이 보전하세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새마을 정신으로
영광된 새 조국에 새역사 창조하여
영원토록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세

☞ 만주국군 군관 박정희는 광복군 첩보장교였다
박정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며 부른 독립군가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혈서 기사 조작
조작으로 판명된 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설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음을 입증한 김대중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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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 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이라는 친구다.
신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 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릅 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박정희가 나간 후에 김정균한테 말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 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거기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고 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 것이다."라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굳이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 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좌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 때도 김정균한테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김정균과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을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 김정균 - 상해임시정부 비밀첩보원.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함. 해방 후 김구의 비서를 지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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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군의관 엄재완(75.현재 미국 거주)과 신부 나상복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참석한 박정희 중대장(신랑으로부터 왼쪽 두번째, 신랑 바로 왼쪽은 윤영구(제3중대장). 결혼식은 1945년 12월8일 북경의 한 교회에서 치러졌다
광복군 총사령 正將 李 靑 天
정 훈 관 정 필 선 (鄭弼善 : 광복군 공작원) 까치글방 발행 1권 26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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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 박사모 (박사모) 원문보기▶ 글쓴이 : 이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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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조회 40 09.11.29 10:26 http://cafe.daum.net/issue21/5NiW/370
일본판 biglobe 포털에 개재된 박정희에 대한 약력입니다.
1937年3月 大邱師範学校70人中を 69位卒業
1940年4月 滿州國軍軍官学校に 240人中15位入学
1942年 滿州國軍軍官予科を首席卒業
1944年 日本陸軍士官學校3位卒業。滿州國軍步兵第8師團に配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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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신민과목 모범답안 제출로 목포상고에서 학생회장이 되었던 김대중과 달리
박정희는 황국신민 관련 과목들에 백지답안을 체출하여 항일하였습니다.
그러면 꼴찌여야 했는데도 70명 중 69위로 꼴찌를 면하신 이유는
수학 등 황국신민과 무관한 과목들에서 워낙 성적이 좋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황국신민 과목이 전혀 없었던 만주군관학교에서는 수석 졸업하였으며,
일본육사에서는 일년 반밖에 교육을 안받으셨는데도 3등 졸업하셨습니다.
그런데 일본육사에서도 가장 학문 수준이 높았던 포병학교에서 수석 졸업하셨습니다.
<내용에 올바르지 않은 코드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라는 박스가 나오길래 여러번 나눠서 붙였습니다.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에서 꼴찌를 면한 이유'의 한자들은 바로 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쪼개서 한자로 변환해가며 붙였습니다. 일본식한자의 경우는 전혀 붙지 않는 것도 있고 어떨 때는 붙고 어떨 때는 붙지 않는 것도 있었습니다(예 團, 屬은 한글을 쓴 후 이렇게 변환해서 붙이면 되었지만 출처의 글대로인 일본식한자로는 붙지 않았습니다). を와 に는 같이 붙일 때는 붙지 않아서 나중에 수정하며 따로 붙인 것입니다. 글을 펌해서 붙일 때 바로 붙지 않으면 나눠서 붙여보십시오.>
댓글목록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흐흣님!!!
역사학도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추천과 함께 올려드립니다
흐훗님의 댓글
흐훗 작성일심심도사님 항상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