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기자님은 북한특수부대와 인터뷰라도 했었나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동수 작성일10-05-14 00:46 조회3,364회 댓글1건관련링크
본문
조갑제기자님은 북한특수부대 또는 일명 복면부대와 인터뷰 해보고 아니라고 단정을 지으신 것임에 틀림이 없나봅니다. 기자가 당사자들과 인터뷰도 안해보고 기사를 쓸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조갑제기자님의 단정은 단호하기 때문에 한 두명이 아니고 여러명의 북한특수부대 또는 복면부대와 인터뷰를 해 보고 북괴군이 아니라고 단정을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터뷰 후에 복면부대와 사진촬영도 했을 터이니 물적 증거도 확보가 되어 있겠지요. 그렇죠?
조갑제기자님이 아니라고 단정을 짓는 것은 천안함이 북괴의 소행이 아니라고 단정을 짓는 것과 똑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북괴의 소행이라고) 함부로 속단하지 말라고 단정한 청와대의 짓거리와도 매우 똑같습니다. 그렇죠?
그곳 댓글에 달린 이글을 보세요.
--------------------------------
lkh1969 2010-05-13 오후 1:22
광주사태 당시 연고대연합 수백명의 학생들이 설치고 돌아다닌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그런데 연고대를 방문해서 아무리 조사해봐도 그 당시 광주사태에 참여해 활동했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 보상금을 줄때도 당시 연고대연합 학생이었다는 사람이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당시 동아일보 기자도 이들을 수상하게 여겼다는 증언은 동영상이나 신문기사에도 나와 있습니다.(역사학도의 블로그 참조)
몇십명만 참여했어도 소문이 날텐데 삼백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에 대한 의문이 풀리기전엔 조선생님 주장을 믿을 수 없습니다.
---------------------------------
사소한 이야기이지만 518의 진실을 밝히고자 사투를 벌이고 계시는 지박사님과 여러분들께 혹시나 도움이 될까하여 올립니다. 저는 80학번으로 서울역데모에도 참가 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한민국의 대학생은 두그룹으로 나뉩니다. 한부류는 복학생들로 군대를 다녀온 그룹이고 다른 그룹은 군대를 아직 가지않은 그룹입니다. 저는 물론 군대를 가지 않았던 풋내기 1학년생이었습니다. 총이라는 것은 고등학교 교련시간에 목총을 가지고 교련수업을 받은게 전부입니다. 그당시 저에게 진짜 총을 던져주었다면 아마 두손으로 고이 붙잡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연고생 수백명은 주로 군필을 한 나이 든 복학생들이었겠지요?
서울에 살던 저는 518때 연고생 수백명이 광주로 내려갔었다는 말은 그당시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학교가 휴교령으로 문을 닫자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으나 그들로 부터도 전혀 들은 바 없습니다. 다른 대학교 학생들도 많은데 왜 하필 연고생들만 짜고 갔나요? 복학생 3백명이 서울에서 광주로 향했다면 단기간의 계획으로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차편과 숙박, 식사등 준비가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자그마치 3백명입니다. 지금같이 쎌폰이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전교생중 복학생만을 골라 하루아침에 불러 모아서 그중에서 광주로 내려갈 지원자를 확보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복면을 쓰고 하루종일 뛰어 다니자면 숨이 턱턱 막혔을터이므로 체력도 뒷바침이 되야 했을 겁니다. 안경끼고 복면하고 뛰어다녀 봐요. 또한 총도 한손으로 들고 젓가락 휘두르듯 다룰 수 있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사진을 보세요. 복면을 쓴채 한손에 총을 들고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연고대 복학생들 체력이 대단하잖습니까? 사진에 나온 복면부대는 하나같이 깡마른 체구에 매서운 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울역데모등 80년봄에 데모를 했을 때는 저는 복면을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학과 친구들도 안했습니다. 서울역이나 명동성당, 교내에서 데모 할 때도 복면착용은 안했습니다. 교내에서 데모를 하며 전경들과 대치를 했을 때 앞장서서 선동하던 사람들은 서너명 정도로 보였습니다. 아마 골수분자들은 학교당 끽해야 10여명 내외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연고대 두학교에서 목숨을 내걸고 광주까지 내려갈 만한 복학생들이 3백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비상식적입니다. 그것도 단시간에 조직해서 내려갔다는 이야기아닙니까?
백인기자가 광주에 진입하여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몰고가던 트럭에 동승해 찍었다는 동영상이 얼핏 생각나는데 그 때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연고대 복학생들이었다면 최소한 영어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었겠지요? 연고대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사학 아닙니까?
조갑제기자님이 광주사태에 북괴특수부대의 개입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첫번째와 두번째 이유를 보세요.
---------------------------------------
1. 광주사태는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광주시민 수십 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수백 명의 직업적 구경꾼들, 즉 기자들이 취재했다. 외국 기자들도 많았다. 공개리에 일어나고 공개적으로 취재된 사건이다. 광주사태를 취재했던 나를 포함한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2. 광주사태에 개입한 북한군이 대대규모, 즉 수백 명이라는데, 이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다.
---------------------------------------
1. 북괴특수부대의 개입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취재를 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천안함사태를 보세요. 뻔한 것도 아니라고 단정을 짓고들 있잖습니까? 광우병사태는 어떻습니까. 직접 먹어보고도 못믿고 속았습니다. 한명이 속은 것도 아니고, 두명이 속은 것도 아니고, 전국민이 홀라당 속았습니다. 광주사태도 홀라당 속은 것이라는 생각 안드십니까?
2. 북괴특수부대의 개입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취재할 생각은 커녕 다음과 같은 정신상태에서 취재를 했다고 스스로 자백하고 있군요, “광주사태에 개입한 북한군이 대대규모, 즉 수백 명이라는데, 이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을 진압군…”. 대대규모의 괴뢰군이 괴뢰군복을 입고 중무장한채 남한 땅 맨 끝 전라도에서 국군과 정면으로 전투를 벌여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열불이 나서 추갑니다) 김동길선생님은 물론이고 조갑제기자님께서 박정희대통령 생전에 얼마나 괴롭혔습니까. 독재한다고. 한줌도 안되는 남한의 빨갱이정치인들에게 자유를 선사하기위해 반독재 투쟁을 밤낮하며 돌아다녔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박정희대통령께서 10년만 더 독재를 하셨더라면 북한인민들 3백만이 굶어 죽기 전에 김일성 김정일과 그 일당들을 박멸하고 통일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주신 귀중한 인간의 목숨 수백만을 살릴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명도 아니고, 두명도 아니고 수백만의 생명입니다. 1980년 제가 명동성당에 다닐때 김동길선생님이 초빙된 강연회도 몇차례 다니면서 참 멋있다고도 생각 했었습니다만, 이제는 추해보입니다. 참 추하십니다. 두분은 박정희대통령의 발가락 때만도 못한 분들입니다.
댓글목록
흐훗님의 댓글
흐훗 작성일
광주를 취재했던 기자들 중에 시위대 전체나 그 일부를 폭도로 규정한 사람들은 많았을 것입니다. 신문기사와 사진이 증명하고도 남지 않습니까.
그 폭도들의 일부가 바로 북한특수군이었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증언 등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던 심리전 전담 북한특수군, 계엄군과 폭도 및 시민 사이를 교란하고 심지어 계엄군 폭도 시민을 살해한 놈들 중에 특수군이 다수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시위에 동정적이었던 기자들은 속으로 계엄군을 증오하고 시위대들과 친화적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선입관에 의해 5.18에 대한 관을 형성할 수도 있었겠지요.
5.18 당시 시민군 일부의 증언에 의하면 M16으로 형성된 소수의 조직( 분대~소대규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함부로 행동하지도 않고 점잖은 편이었고 신중했다고 하며 한순간에 사라져서 진압 당시에는 흔적도 없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