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따이한’을 교육시킨 북한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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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발해의꿈 작성일10-03-06 12:02 조회3,214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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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따이한’을 교육시킨 북한
渤 海 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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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블라디보스톡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는 중간에 일행 중 간사를 맡은 박OO 박사가 “당신이 올 때 달러로 교환해준 젊은이와 같은 자리에 타고 왔는데, 그가 말하길 ‘어패럴’ 가공공장을 하려고 하더라. 그런데 그 사람 국적에 대해서 물어도 웃기만 하고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내 짐작으로 ‘라이따이한’ 같았다”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월맹군 고위군관들이 하바로브스크에 있는 극동군 사령부에 교육을 받으려 서울을 경유하여 자주 드나들곤 하는 것은 본 바가 있지만 ‘라이따이한’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극동러시아를 왕래하는 것일까 하고 잠깐 의문을 가졌으나 곧 잊어 버렸다.
그로부터 6년 후인
그 해 겨울, 필자는 베트남의 하노이 군사박물관을 방문하여 금고 속에 잠자고 있는 국가 기밀문서들을 거금을 투자하여 모두 읽어 보고 왔다. 필자가 보고 온 문서의 내용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군은
(2) 월남전에 북한 군사고문단과 ‘미그 17, 19, 21’ 등 3개 기종의 조종사 등 853명이 월맹군을 지원하다.
(3) 월맹군이 포획한 한국군 포로들을 북한 군사고문단에 인계하다.
(4) 미군이 뿌린 고엽제 영향으로 전투지역 주민들이 병마에 시달렸다.
(5) 한국군과 월남현지 여자들과 사이에 태어난 소위 ‘라이따이한’이라고 불리는 어린이들을 1978년부터 1983년까지 북한지원으로 교육원을 만들어 양육했다.
이중에서 특히 다섯 번째 내용의 ‘한국군 사생아를 북한 당국이 지원하여 양육 및 교육시킨다’라는 내용은 지난 세월 동안 들어본 적이 없는 처음 보는 것이라서 충격적이었는데, 확인결과 사실이었다. 그런데 훗날 이들 어린이들이 갑자기 사려졌다는 사실을 당시 교육원 부근에 살던 주민들의 증언을 듣게 되었다.
필자는 귀국후 한국정부에 확인한 결과, ‘라이따이한’이 약8천명 될 것이라는 막연한 답변을 들었고, 베트남 당국자(주한베트남 대사관)는 1만3천명으로, 북한측 전문가들은 약2만3천명이라고 하는 등 도대체 어디에도 정확한 기록은 없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곳은 호치민市(옛날 사이공) 인근 농촌이고, 1968년生이며 이름은 ‘장 투안OO’이고 어머니는 순수 농민의 딸이었는데, 전쟁통에 먹고 살기 어려워 한국군 건설지원 공병단 군인들이 자주 다니는 길가에서 바나나 등 열대과일 장사를 하다가 아버지 되는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동정심이 많아 어머니와 서로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만 임신하게 되었고, 아기를 가진 사실을 안 아버지는 이후로 발길을 끊었다고 했다. 아버지 계급이 무엇이었냐는 필자의 질문에 “항상 계급장 없는 사복 같은 것을 입고 와서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성도 이름도 자세히 모른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는 그야말로 황당한 이야기를 하였다. 어머니는 애비 없는 자식을 키우느라 온갖 수모와 고생으로 1983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병들어 돌아가시며 “아버지를 꼭 찾아보라고 자신의 손을 잡고 가르쳐 준 것이 이름은 ‘장병금’氏이고, 고향은 ‘경북 이성군 안(?)면’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 돌아가신 이듬해(1984년) 봄, 그 동안 북한 사람들이 와서 가르치던 교육원에서 자기 또래보다 어린 동생 같은 아이들 1백여 명과 함께 북한 평양으로 유학(?)와서 7년 이상 교육을 받았는데, 그때 자기들을 가르친 선생이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 이름이 ‘장병금’이 아니고 ‘김병장’이고 이것은 남한군대 사병의 계급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했다. 그때 배신감이 갑절되어 아버지를 반드시 찾아서 죽일 것을 다짐했는데, 교육후 베트남에 돌아와 한국인 신발공장과 어패럴 공장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다 돈을 모아 러시아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때야 비로소 남ᆞ북의 현실과 그토록 증오했던 남한사람과 미국사람들 덕분에 사업을 하고 있고, 좋은 여자(라이따이한)를 만나 지금은 행복하다면서, “당신을 처음 만난 날인
귀국후 이 사람이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보고서를 만들어
당시 보고서를 요약하면, “한국군이 만든 월남 사생아 ‘라이따이한’들이 그곳에서 북한당국의 지원으로 고아원과 유치원ᆞ초등학교 등에서 공부했고, 이들은 다시 평양으로 가서 5~7년간 공부하면서 간첩교육을 받았다. 이들의 행적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MB정부가 들어선 이후, 문득 이 사람 생각이 나서 아버지를 찾아줄까 하고 알아보니 경북 의성군 안개면 출신 김병장이었는데, 이곳 출신자중 월남 파병한 사람은 3명뿐이라 금방 알 수 있었고, 그는 일찍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그 역시 행복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분명한 것은 한국 정부는 버리고 외면한 ‘라이따이한’을 북한
댓글목록
새역사창조님의 댓글
새역사창조 작성일글쎄요... 내가 외국에 여행갔다 그곳 여자와 썸씽이 있어 애가 생겼을 경우 국가가 나서서 챙겨야 할 의무가 있을까요? 그리고 김일성이 챙겼다고 표현했는데 남파간첩용으로 양성하려했다면 챙긴것이 아니라 전쟁고아를 총알받이로 이용하려했다고 표현해야 하는게 맞는게 아닐까요?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새역사창조님!!!
남자가 바람을 피울 수도 있지요
국가가 나서서 챙기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그걸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걸 김일성(김성주)는 라이따이한을 챙겨서 이용했었지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그걸 계획적으로 이용한 놈이 바로 김정일 북한 집단이라는 거지요.